본문) 요 21:1~14, 사63:7-14, 행13:26-35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이다. 우리는 이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가 지금 매우 활발하게 번성해 가며 세상을 풍요롭게 일구어 가는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이 세상과 인류의 생명과 구원을 위하여 더욱 활발히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친히 찾아 행하고 계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게 무엇이었나? 바로 당신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위임하고 위탁하시기 위하여, 거기에 합당한 당신의 사람들을 찾아 임무를 맡기고 성업을 이루게 하시려는 일이다.
한편 오늘은 우리 교단총회가 총회 목회자(牧會者) 주일로 지키면서 그들의 사역을 돕기 위하여 그들 연금(捐金) 주일로도 함께 지키는 데, 마침 오늘의 말씀들은 이런 주일의 내용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대체 목회(牧會)란 직임이 어떠한 직분이며, 또 목회를 맡은 목회자는 무엇 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사역을 밑받침하는 내용이 진정 어떤 것인지를 소상하게 설명하여 주는 내용들이 본문 속에 상세히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회를 말하려면, 그 이전에 목회의 결정적인 발판이 되는 교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사실 목회는 교회와 거기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고 돌보는 총체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와 목회의 기원(起源)은 모두 예수께서 세상과 인간 구원을 이루시려고 디자인하신 영역들이다. 예수께서 ‘교회’(ἐκκλησία)란 용어 자체를 거론하실 때, 그는 ‘내 교회’(my church)란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교회가 당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하셨다(마116:18절).
그러기에 모든 목회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목회자의 사적 욕망의 도구가 되거나, 개인 소유물인 듯한 마음이나 언사를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불경(不敬)이고 탐욕이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주의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는 오로지 주님의 뜻과 그의 마음이 온 교회에 제대로 전달되고 펼쳐지도록 전심전력을 다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는 주님의 충성스러운 종의 신분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주 본문인 복음서에서는 디베랴(갈릴리) 호수로 퇴각해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주님을 만나면서 펼쳐지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행보들이 올라와 있다. 이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교회가 어떤 유형의 모임이 될 것인지를 담고 있다. 제자들을 기다리신 주님과 그의 초대에 응한 제자들, 그래서 베풂과 드림이 어우러지면서 이루어진 만찬, 그러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될 제자들의 감격들이 올라와 있다.
구약 예언서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내용의 양식들을 제공하시면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인지를 전하신다. 주목되는 부분은 반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함께, 그럼에도 그의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목회는 성령을 그들에게 주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그 이름도 길이 영화롭게 하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서신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부활 신앙이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핵심임을 알린다. 이때의 증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이들이 될 것이며, 그 대상은 미숙한 신앙의 아브라함의 후손과 그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받은 부활의 말씀은 구원의 복음과 소망의 말씀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까지 이어진다.
1. 복음서 / 요21:1-14 /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요한복음은 이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顯現)이 세 번째로 나타나신 일임을 밝힌다(14절). 하지만 본문은 이제 시작하는 교회(敎會) 시대를 위해 예수께서 나타나셨음을 알게 한다(1-2절). 특히 주님이 찾아 주신 일곱 제자들에 대한 거론(2절)은 계시록의 소아시아의 7교회의 배경을 갖고(계1:11 참조), 그들이 당시의 교회 전체를 대표하며 상징하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두 제자가 보여 준 반응의 차이도(7절), 당시 교회들의 다양한 차이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면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와 그의 선택을 받은 제자들로 인하여, <교회의 시대(時代)>가 어떻게 열리고 있는지를 다음의 내용을 통하여 상세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1) 그 주도는 전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찾아오심 때문이었다(1-2절). 제자들만의 의지나 의욕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그들은 이미 옛 생활인 디베랴 호수의 어부 생활로 되돌아갔으며, 그들 마음은 ‘비록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기는 했을지라도, 그 부활을 믿고 의지하여 일어서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어서-’, 마치 실패한 자들의 모습만 드러낼 뿐이었다. 그 제한선을 넘어서려면, 딱 하나, 그 부활하신 예수 자신과의 점목(粘目)이 이루어질 때만 가능했다.
2) 그때 그들의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 준 대목이 있다. 바로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3절)와 ‘없나이다’(5절)라는 그들의 고백이 보여준 일이었다. 곧 그들은 ‘되는 것이 전혀 없던 그런 때’였다. 그때 그들의 어두운 마음 상태는 그런 그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4절). 그런 그들에게 희망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예수께서 그들을 찾아 주심을 깨닫고, 주님께 나아오는 일이었다!
3) 그런 답답한 현실의 문을 여는 일도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몫이었다(5-7절). 오셔서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고, 없음을 고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며 지시하신 주님이셨다(6절). 그 말씀에 순종하자, 비로소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그물을 들 수 없게 되면서, 그때에야 주님이 사랑하신 그 제자가 ’주님이시다!‘라고 알리면서, 제자들이 육지에 계신 주님을 뵙고자 모이게 된 것이다. 구원의 문은 그렇게 열린 것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어떤 곳이며, 그곳에 모인 무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게 된다. 먼저 교회는 완전히 주 예수님을 주(主)이며 목자로 둔 곳이다. 따라서 그곳에 모인 성도들은 그의 양(羊)들로서, 자신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바로 목자인 주님이 공급해 주셔야 해결됨을 믿으며 산다. 이를 위해 그의 양무리가 된 성도들은 언제나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물어야 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인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그와의 교제를 위하여 항상 기도에 힘쓰며 살아야 할 이유다.
4) 목자이신 주님은 양들이 스스로 풀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을 쉽게 해결해 주신다. 그분은 앞뒤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6절). 디베랴 호수에서 실의에 빠진 제자들은 찾아오신 주님을 그런 점에서 새롭게 만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때, 당신을 더욱 깊이 만나서 알게 되고 전하게 되는 제자들이기를 위하여, 그들에게 예전의 매우 중요했었던 일들 중, 두 가지를 기억(記憶)하게 하고 회상(回想)하게 하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깊이 있게 접근하셨다.
➀ 베드로와의 소명을 재각인(刻印) 시키신 방법이었다(2-7절). 이는 시몬 베드로가 삼 년 전 어느 날 빈 그물로 회항(回航)했을 때, 예수께서 그에게 오셔서 명령하셨던 일로 인하여 발생한 그 충격적인 대변화 사건(눅5:1-9)을 회상하게 하는 방법을 이번에도 취하신 것이다. 빈 그물의 상황은 똑같았지만, 그물을 던지는 곳은 달랐다. 깊은 곳이 아니라 오른편이란 차이만 있었다. 잡은 고기들이 풍성한 것은 같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➁ 제자들을 먹이시는 방법이었다(9-13절). 예전에 주님은 십자가 직전에 당신의 몸인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로 최후의 식탁을 공궤(供饋) 하셨다. 곧 성만찬을 베푸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제자들은 살과 피를 나눈 한 식구요 공동체임을 각인 받았다(눅22:19-20). 그런 각인된 식탁을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금 이곳 디베랴 호수가에서 메뉴만 떡과 생선으로 대체하여서, 조반 형식으로 베풀어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 식탁을 어떤 마음으로 받았을까? 이는 자신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영원히 하나라는 의식을 각인 받는 순간이 되었으리라.
☞ 이런 주님의 현현 사건은 교회의 생명이 무엇으로 유지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 공동체인데, 교회는 그 양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 성도들은 그 말씀을 먹고 산다. 다만 말씀은 두 가지 형태로 제공된다. 듣는 말씀(설교)과 먹는 말씀(성찬)이다. 물론 이 양식을 먹이시는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목회자는 그 대행자요 종이다.
2. 예언서 / 사63:7-14 / ”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란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니 “
본문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파괴된 뒤 하나님의 백성이 탄원 및 간구의 예배에서 불렀을 노래들 가운데 하나이다. 10절이 그 배경을 밑받침해 준다. 다만 전체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하여 택하심을 받은 것과,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시고 또 계속해서 도와주신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의 증거를 상기(想起)해 준다(출33:14-15 참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자녀)에게 꾸준히 베푸신 은혜들은 이것들이었다(7-9절). 넘치는 자비와 사랑이었다. 큰 은총이었다. 그의 백성으로 구별해 주셨고, 자녀로 상대하여 주셨다. 구원자이셨다. 특히 환란에 함께하셔서 적들에게서 구원하여 주셨으며, 사랑과 자비로 그들을 들어서 안아 주셨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를 애뜻하게 사랑으로 돌보고 지켜내는 모습과 흡사하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택하신 백성(자녀)들이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기대하셨지만, 이들은 끝내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근심되게 하였기에, 부득불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적이 되셔야만 했다. 탈선한 자식에게 마냥 복과 은혜를 베풀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징벌은 무작정 방치해 버리심이 아니라, ’언젠가 깨닫고 회개하며 돌아올 때까지‘로서, 그때까지는 아픈 가슴을 안고 기다리신 것이다(눅15:11-이하, 탕자의 비유 참조).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그들 탕자와 같은 탈선한 백성들에게 완전히 등 돌리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 안에 구원의 씨앗을 남겨 두셨다. 그 씨앗은 당신의 거룩한 영인 성령이시다(11절). 대체 그 성령은 탈선자 안에서도 무슨 일을 하시는가? 자신들이 탕자(蕩子)처럼 배신하여 아버지의 품을 떠났어도,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이전에 아버지와의 삶에서 누려왔던 은혜와 사랑의 풍성함을 생각나게 하시며 그리워하게 하신다. 그래서 자신의 반역한 과오를 아파하고 잘못된 현실을 성찰하며, 되돌이킬 방안까지도 생각하게 하신다(12-13절).
거기까지 간 자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탕자가 기다리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어, 예전보다도 더한 용서와 환대를 받게 되면서, 안식과 영광을 누리는 축복까지 받게 된다(14절). 그런데, 배신과 탈선했다가 돌이킨 자들에게 아주 필요한 대목이 있다. 돌아온 것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는 재탈선과 멸망의 퇴로에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갈 삶을 위하여, 그는 반드시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한다(요20:22 참조). 이는 성령만이 우리의 퇴로를 온전히 방어해 주실 진정한 도우미이기 때문이다!
3. 서신서 / 행13:26-35 /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리 “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전한 구원의 말씀이다(26절). 그때 그는 이미 부활 예수를 만나 그의 소명을 받고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된 자로써, 그들에게 부활 신앙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역설하였다(행9:1-9 참조).
특히 바울이 그들에게 예루살렘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에 무지했던 연유로 예수 죽이는 데 함께 한 자들이었음을 상기(想起)시키고 있었던 것을 보면(27-29절), 바울은 그곳의 청중들 역시 그런 예루살렘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무지와 믿음을 그대로 가진 자들처럼 보았다. 따라서 더욱 그들을 깨워야만 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즉 바울은 그곳 비시디아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베드로의 설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곧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3:17-21 참조).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깨우치고 완전한 부활 신앙에 들어서게 하고자, 본격적으로 도전하였다(30-32절). 이를 위해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과, 살아나신 예수를 만나고 목격한 이들이 그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 그중에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그 약속을 전파하고 있다면서, 부활은 허구가 아닌 하나님의 오랜 약속에서 나온 실재임을 외쳤다.
그를 위해 바울은 특히 다윗 왕이 오래전에 남긴 시편에 담긴 부활에 관한 여러 증언을 소개하였다(시2:7, 16:10 참조), 결국 예고된 부활의 말씀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으나, 그것은 예수로만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까닭은 부활하신 주를 믿는 자들에게까지 그 부활의 생명력이 구원과 생명으로 효력을 발한다는 점 때문이다(35절).
o 오늘은 목회자 주일이며 연금 주일이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이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세우신 그의 거룩한 몸이다. 목회자들은 그런 주님의 뜻을 받들어 온 세상과 믿고자 모인 사람들에게 부활의 주 예수를 전하며, 그 부활 신앙이 우리 존재에게 어떤 은혜와 축복을 안겨 주는 지를 전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사역자들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그런 사역자들의 가르침을 순복하며 따르고, 기도해 주며, 후원해 주어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내려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자비를 기억하고 그의 구원 행위를 찬양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확고한 부활 신앙 위에 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영생을 누리게 되도록 전심을 다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