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20:19~31, 사43:8-13, 행10:34-43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이다. 온 세상이 꽃동산이 되었다가 신록의 옷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는 때이다. 한창이었던 목련화의 계절도 지나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꽃들이, 다음 단계인 열매 맺기를 위한 수정(受精)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반드시 함께 있어 주어야 할 벌과 나비은 현저히 적은 듯싶어서, 관심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긴장감을 안겨 주기도 한다.
꽃이 열매를 맺게 할 진정한 꽃이 되려면, 그에게는 그의 절대 도우미요 이웃인 벌과 나비가 있어야 한다. 남자에겐 여자가 있어야 하고, 여자에겐 남자가 있어야 하듯 말이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세상은 금방 균형과 아름다움을 잃고 망하게 된다. 마틴 부버가 말했던, <너와 나>의 논리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 구주 메시아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까닭도 바로 이런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의 균형을 잃은 지구촌과 인류의 생태계 복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성경을 다시 보라! 오신 그분이 항상 찾아가 만나신 대상이 누군가? 각종 부족함으로 한쪽으로 밀려난 존재들이 아니었는가?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인권 면에서 가진 자들에게 밀려나서 그늘진 곳에서 소멸해 가던 사람들이 아니었는가? 그들이 회복되고 권리를 되찾고 그들이 살아나야 비로소, 그들도 잘되고 가진 자들도 건강한 삶을 향유하게 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메시아 예수의 사람을 찾아가시는 행보는, 부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토록 예수님의 사람을 찾아가시는 행보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사람이 마냥 좋아서가 아니다. 그를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함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당신에게서 받은 모든 일들을 그대로 전하여 주는 증인(證人)이요 메신저가 되게 하고자 함이었다. 예수님은 본래 인간이 인간 됨을 위해서는 기본적이고 본질적으로 되찾아야 할 길과 진리요 생명이셨기 때문이다(요14:6). 이 방법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어둠의 세상을 구원해 내시려는 것이었기에 더욱 그렇게 하셨다. 그 몫이 바로 성역(聖域)이요 선교(宣敎)며 복음에의 참여(參與)다.
최근 국내외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겨준 우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있다. 거기에서 모든 시청자들의 삶에 깊은 도전을 안겨 준 인물은 지역 호장인 엄흥도였다. 당시는 사약을 받고 강물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두고, 세조가 백성에게 ‘그 사체에 손대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하리라’는 명으로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때였다. 그때 엄흥도가 전격적으로 나서서 세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깊은 산속에 매장하고, 온 가족은 도피 길에 나선다.
그때 그가 남긴 역사적인 말이 이랬다. “위선피화(爲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 -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 그의 이 말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4-35)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도 생각나게 한다. 그런 뜻으로 죽음의 길을 택한 엄흥도였기에, 그는 570년이나 지난 지금에 다시 살아나, 진리를 전한 증인이 되어서 온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이스라엘이 보여 주는 주변 국가와 국민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의 행위를 보면서, 우리 이재명 대통령이 SNS를 통하여 한마디 충고를 던진 것이 온 세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당사자인 이스라엘 외무부는 우리에게 비난 성명을 할 정도였다. 그러자 이 대통령이 다시 반박하는 논지를 다시 냈다. ” 내가 아프면 타인도 그만큼 아프다. 나의 필요 때문에 누군가 고통받으면 미안한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걸 모르니 슬프다)‘
이 말에 세계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무조건 미국과 이스라엘 편인 줄만 알았던 이란과 중동 국가들이 한국은 고통받는 자기들의 입장도 대변하고 정의와 가치를 말할 줄 아는 중심을 잡을 줄 아는 국가란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되면서, 당사자 이란이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호의를 베풀기 시작한 것이다. 곧 호르무즈 해협에 갇혀 있는 26척의 우리나라 배 한 척의 첫 통과를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모퉁잇돌 예수의 입장을 선택한 결과로 복을 받은 것이다.
오늘은 마침 장애인 주일이며, 4.19혁명 기념주일이다. 장애인은 누구인가? 육체의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쳐 사는 사람들이다. 4.19혁명은 어떤 혁명이었나? 부정과 불의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나라를 장애 국가로 만든 권력자들에게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저항했던 일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결국 육체든, 정신이든 불구로 사는 이 세대와 세상을 향하여, 우리 교회는 저 부활하신 예수의 그 몸짓을 하고, 엄흥도와 이순신의 정신을 구현하며 건강한 세상을 이루어 가는 예수의 증인(행동하는 자들)이 되자는 주일이다.
이를 위해 복음서의 말씀은 그런 삶을 누리기 위하여서는 어떤 무엇이 필요한지를 찾아와 전한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 안겨 주실 성령(聖靈)을 받는 일이다. 그래서 그의 권능에 힘입어 사람들 속에 있는 죄를 용서하며 살고 평안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믿는 자가 되어 생명을 얻어야 한다.
구약과 서신서의 말씀은 죄성에 포로 되어 사는 사람들의 실상을 전한다. 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산다. 그러기에 성령 받은 자들이어야 할 일이 있다. 곧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나님과 그 아들의 증인이 되어 그들 영육간의 장애인들을 이끌어내는 일을 감당하는 일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통하여 알고 배운 것들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행하신 말씀과 권능을 전하기에 훈련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1. 복음서 / 요20:19-31 / “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믿으라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를 아직 보지 못하고, 여전히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공포와 두려움에 잠겨 있었던 제자들의 현장으로 부활의 주께서 친히 찾아가 만나 주신 장면이다. 그곳에서 주님은 당신은 진짜 죽었다가 살아나온 이심을 확인해 주시면서 그들을 기쁘게 하신다. 그러면서 환호하는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특별 주문하신다. 바로 “성령(聖靈)을 받으라”는 분부였다. 그래야 제자들은 비로소 참 믿는 자들이 되면서, 모든 인간관계를 주도적으로 열어가는 선교인(宣敎人)과 증인(證人)이 될 것이라 하셨다,
이때에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곳에 불참했던 제자 도마가 자기는 주의 상처를 직접 손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라 호언하였는데(25절), 바로 주님이 8일 후에, 그곳에 다시 나타나, 바로 그 도마에게 그의 손가락으로 당신의 상처에 넣어 보라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는 강력한 말씀을 전해주셨다. 이에 충격받은 도마가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8절). 그러자 주님이 한마디 추가하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福)되도다”(29절).
이는 앞으로 있게 될, ’또 다른 수많은 후대의 도마들‘을 배려하신 주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로 인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보지 않고도 오직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에 따라 품게 되는 부활 신앙이, 모든 기독교 신앙의 메뉴들 속에서 가장 유력하고 중심을 이루게 되는 주류(主流)신앙으로 자리매김하는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이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본다.
1) 그런 점에서 본문은 믿는 자들도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보게 한다. 곧 눈으로 보아야만 믿고, 만져야만 알게 되는 소위 육적(肉的) 기독교인(?)과 그에 대조적으로 보지 않고도 그 약속과 말씀만으로도 믿고 알게 되는 영적(靈的) 신자라는 두 대조적인 유형이 있음을 확인시켜 준 곳이다.
2) 그 차이와 갈림길이 있음을 지시하며 일깨워 준 주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이었다(22절). 이 부분은 평소 주께서 제자들에게 숱하게 강조하신 보혜사(保惠師) 성령의 강림과 역할, 그리고 그 필요성과 유익성에서 확인된 바 있던 내용을 다시금 압축해서 지시(指示)하신 내용이다(요14:16-24, 16:5-15 참조). 후에 있을 예수님의 최후 유훈(遺訓)이기도 한 내용이기도 했다(행1:8참조).
3) 그러기에, 예수의 사람에게 성령 받는 일은 제1 조건이다. 곧 성령은 사람이 예수의 사람이 되고 살아가는 데에는 절대 필요조건인 것이다.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괜찮은 식의 상대적인 조건이 아니다! 곧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비로소 참믿음을 보유하게 되면서(27절), 그 믿음에서 나오는 놀라운 하늘의 능력을 행사하게 된다(23절). 그래서 자신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로 살아가기가 가능해진다.
4) 요한은 이렇게 정리한다(31절). 이것을 기록함은 우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다. 그러기에 이제 분명히 점검해야 한다. 나는 지금 육적 인간인가, 영적 인간으로 거듭났는가?
2. 구약 / 사43:8-13 /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이전 일들을 들려주겠느냐 ---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
분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려는 보다 큰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일깨워 주시는 내용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는 진짜보다는 가짜가, 진실보다는 위선이, 본질보다는 비본질이 앞장서서 모든 백성들을 현혹하여 사망과 어둠과 저주의 길로 인도하는 현상을 보시면서, 그 오류와 잘못된 흐름을 바로 잡고자 하심이다. 그런 일에 필요한 인물들, 곧 당신의 증인으로 종으로 일하게 될 사람들이 바로 성령 받은 당신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를 통하여 이미 그 은혜와 능력을 받아 알았고 보기도 한 적이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1) 하나님께서 보신 당시의 세상은 육체적 영적 기능을 상실한 맹인과 장애인들이 가득한 세상이었다(8절). 그러기에 그들을 이끌어 내어서 그들에게 회복과 구원을 안겨 줄 당신의 대리자(증인,종,제자,성도)들이 절대 필요하셨다(8절).
2) 이런 상황에서 더욱 심각한 일은 그런 장애인들을 거짓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이 그들을 맡아서 구원하겠다며 큰소리치고 현혹하면서, 결국은 그들을 자기들의 노예로 살다 죽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9절). 즉 제대로 된 지도자의 부재(不在)로 세상은 길잃은 양들만이 가득한 저주받은 곳이 된 것이다.
3) 그러기에 하나님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귀향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온몸으로 체험한 이스라엘을 들어서, 여호와가 만군의 주이심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고자 하셨다. 예수 이후에는 제자들과 성령 받은 이들을 적합자도 보시고, 그들을 당신의 대행자인 증인과 종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예수를 통하여 제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살아야만 되는 지를 배우고 익힌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10-12절).
4) 여호와의 지명사의 내용이다.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이인 줄 깨닫게 하여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
3. 서신서 / 행10:34-43 / “ 베드로가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
본문은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 가족이 베드로를 초청하여 오순절 체험을 하게 되는 모습을 본 사도 베드로가, 성령 하나님의 시대가 비로소 유대교의 혈육과 종족 중심주의의 높은 장벽을 넘어서 온 세계 백성들에게 활짝 열렸음을 선포한 내용이다. 그 대상은 분명하다.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그가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구제하는 등의 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면(행10:22), 그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음을 해명해 주었다.
1) 사도 베드로의 이런 선언을 완전 파격이었다. 율법주의와 유대교란 철의 장벽을 뛰어넘게 한 구원의 일성이었다(36절). 세계 만민에게 열린 선교의 문이 예수의 증인과 종들을 통하여 활짝 열리었음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바로 베드로와 함께 하신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인한 것이었다. 비로소 예수가 온 세상의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게 된 첫 관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전하는 예수의 복음은 모두를 하나로 묶어낼 화평(和平)의 복음이었다.
2) 베드로는 이 일이 자기들에게서 시작된 일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로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었으며, 그의 십자가와 사흘 후에 일어난 부활하신 주가 그의 제자들에게 식탁을 나누시면서 분부하신 명령에 따라 온 세상에 전하게 해서 된 일임을 규명해 주었다(37-42절). 동시에 이런 일은 이미 구약 모든 선지자의 증언한 바대로 된 일이라는 점에 밑받침해 주었다. 곧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예언이 예수로 성취되었음을 밝혀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온 세계 만민의 구원자가 곧 부활하신 예수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o 오늘은 우리 교회가 장애인과 4.19혁명기념주일로 지키는 때이다. 여전히 지금의 세상은 거짓과 어둠과 불의와 폭력이 기세를 부리고 있다. 거짓 세력이 힘으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그 부활 주님의 분부를 받는다. ”너희는 나의 택한 증인이요 종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내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먼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한다. 내 힘, 내 지식, 내 역량이 아닌 거룩한 힘과 지혜와 능력인 보혜사 성령의 도움을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으로 선한 일을 이루려는 의의 전사로 나아가야 한다. 에수처럼 온전하고도 화평한 복음을 가지고 세상의 균형을 잡아주는 복음의 회복자가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