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부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교회교육주일, 어린이-청소년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부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교회교육주일, 어린이-청소년주일

관리자 2026-04-26 (일) 15:51 3시간전 2  

본문) 요 21:15~19, 렘23:1-4, 벧전5:1-11


오늘은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다. 꽃의 계절 오월도 활짝 열렸다. 가정과 가족, 그리고 스승을 위한 주일도 이때 몰려있다. 이런 중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 본향에 오르시기 전에 지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을 당신의 사역자들로 일하도록 준비시키는 일에 전념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당신이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전에, 이 땅의 백성들은 그날과 그때를 잘 맞이하며 살도록 해야만 하기에 더욱 그러하셨다. 특히 사랑이 축인 가정과 가족, 의와 진리가 축인 교회 현장과 삶의 현장 살리기가 우선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오늘 복음서 내용을 보면, 지난 주일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연결된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주일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 교회 시대를 열고, 그곳에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는 목회도 시작하게 하시고자 그들과의 관계 회복부터 도모하는 일이 있었다. 곧 낙심하여 디베랴(갈릴리) 호수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가신 일이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예전의 당신을 맛보게 하셨고, 식탁을 통하여 그들은 주님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하나임을 절감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어떤 내용인가? 이제 그들이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 자들인지를 알리면서, 그러기에 거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전달하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주님은 기독교 최대의 윤리요 생명이며,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삶의 과제인 사랑(愛)을 화두(話頭)로 던지신다. 그 사랑도 대상과 상대가 중요한데, 그게 바로 예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신다. 그것도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비교급을 사용하시면서, 예수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물으셨다. 


이는 교회나 목회, 그 어떤 것도 예수 사랑이 밑받침되고 선행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모든 목회자들에게 경고하심이 아니겠는가? 곧 예수 사랑 없이 목회하려고 하는 일은 결코 허사임을 단호히 선포하신 것이다. 교회 공동체 역시 예수 사랑을 기반해서 존재하고 있음도 밝혀주셨다. 매우 긴장되는 부분이다! 반면에, 예수 향한 진정한 사랑을 기반해서 나온 목회라면, 그 목회자는 어떤 경우에도 그곳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오늘은 마침 교회교육주일과 어린이-청소년 주일로도 지킨다. 요즈음은 세상 모든 교육이 기능인 양성 중심으로 치닫고 있어서 매우 유감인데, 그럴수록 교회와 가정의 교육의 방향은 기능 중심이 아닌 사랑 중심의 교육에 집중하여야 하겠다. 그럴 때라야, 우리 아이들의 마음의 중심을 욕망 충족이 아닌 상호 유익 중심으로 잡아줄 수 있을 것이다. 


기능과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고 잘 개발되어서 자신의 미래 직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반드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기조가 든든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기능과 능력이 아름답고 열매도 풍성할 것이다. 만일 사랑이 밑받침을 못 해주면, 그는 그 보유한 기능과 재물이 그에게는 흉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더욱 유해(有害)한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처음부터 가난하거나 무력한 존재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교회의 목회는 이런 점을 잘 일깨워 주어서, 중심이 올바른 인간을 생산되게 해야만 한다. 


요즈음 이재명 대통령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하는 중에, 양국의 신뢰와 번영을 아우를 수 있는 표현으로, 그곳 국부(國父)인 호치민이 남긴 말을 인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말은 바로, ‘이불변(以不變) 응만변(應萬變)’이란 말이었다. 무슨 뜻인가?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모든) 변화에 대응한다’는 뜻이다. 곧 ‘모든 변화에 대한 대응은 불변의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매우 뜻이 깊은 말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변화의 세상과 인간들에게 예수께서 주신 불변의 원칙이 있어서, 그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게 무엇일까? 바로 사랑(love)하는 일이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 계명이 바로 우리 교회와 목회가 언제 어디서든 꼭 붙잡고 지켜 행해야 할 불변의 원칙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변화무쌍한 세상과 인간들을 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질 것 같으나 이기게 되고, 망할 것 같으나 흥하게 되며, 미움받을 것 같으나 사랑받는 존재가 될 것이다. 까닭은 진정한 불변의 원칙은 그것 자체가 그 어떤 임기응변적(臨機應變的)인 것들보다도 힘이 있고, 우선권이 있으며, 영원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 구약 예례미야서의 말씀은 우리의 목자에 대한 시야를 보다 넓혀 준다. 양무리를 돌보는 목자는 교회 울타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국정을 책임 맡은 대통령과 왕들도 목자란 점이다. 백성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하는 왕은 선한 목자이지만. 자기 배와 욕망만을 챙기려 드는 왕은 나쁜 목자란 말이다. 이스라엘은 나쁜 목자들 때문에 망했다. 요즈음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이 두 목자의 모델들을 찾기 쉽다. 국민주권 의식을 가슴에 품은 곳은 흥왕하지만, 자기 욕망과 교만한 자에게는 어둠의 망조만 보이기 때문이다. 


서신서에서는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인 장로도 목자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임을 알게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도 잘 지적해 준다. 동시에 그의 지도를 받게 된 평신도들(젊은이)이 유의할 부분이 무엇인지도 함께 알게 해준다. 결국 모든 하나님의 사역자나 평신도는 항상 깨어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 주변에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으며 우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큰 틀에서 오늘의 말씀 내용에 담긴 핵심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복음서 / 요21:15-19 / “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르되 주님 그러하니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루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부활하신 예수께서 수(首)제자인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며, 모든 제자들 앞에서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서, 그로부터 ‘주님 그러하나이다 주께서 잘 아십니다’라며 대답을 이끌어낸 일은 여러모로 깊은 뜻이 있었다(15-17절). 


첫째는 그의 교회 목회 사역의 미래의 장애(障礙)를 완전히 제거해 주고자 하심이었다. 그는 얼마 전, 체포당한 예수를 뒤쫓다가, 예수와의 관계를 추궁당하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에서, 자신은 ‘예수를 모른다’고 순식간에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이 있었고, 닭 소리가 들릴 때는 그런 자신에 대한 한심하고 부끄러운 처지 때문에 통곡(慟哭)하기까지 하는 쓰라린 아픔이 있었다(요13:37-38, 18:15-18, 25-27 참조). 이는 추후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주님은 이점을 충분히 아셨다. 그때 베드로가 당신을 배신하려는 마음에서 그렇게 부인했다 전혀 생각하지 아니하셨다. 그 대신 삶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순간적인 위선적이고 비겁한 답변을 쏟아낸 것으로 아셨다. 또한 주님은 베드로가 그의 본심에서 분명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도 잘 알고 계셨다. 그러기에, 이 잘못된 어긋남의 흔적을 덮어두고 지나가기보다는, 오히려 공개적으로 씻어내는(회개하는)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그래서 세 번 부인을 씻어낼 세 번의 공개적인 주님 사랑의 고백을 천명하게 하게 하셨다. 그래서 이후로는 전혀 부끄러움 없이 최고 지도자요 목회자의 품격과 지도력을 과감하게 발휘해 가도록 앞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그런 절차를 밟게 하셨다. 그러기에 보라! 베드로의 부끄러운 이 예수 부정 사건이 그 후에 그의 앞길에 어떤 장애가 된 적이 있던가? 전혀 없었다!!! 완전히 씻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로 후유증 없는 주님의 치유 때문이었다. 


둘째는 모든 제자와 후대의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절대 필요한 덕목이 바로 ‘주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시려 함이었다. 아니 주님 사랑하는 마음 없이 주의 일을 하려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하게 하시고자 함이었다. ‘내가 주님을 이 모든 자들보다 더 사랑합니다’라는 것을, 절대 불변의 원칙으로 삼아서, 이 변화무쌍한 세상과 인간들을 대응하겠다고 다짐하게 하시려 함이었다! 여기에는 동료들은 물론, 심지어 처자식을 비롯한 혈육까지도 포함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여야 했다(마10:35-38). 


셋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일관된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소명을 일깨우신 까닭은, 그의 답변에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조상 아비인 요한의 인격까지도 연대하고 책임을 함께 하는 정도의 무게를 안고 나온 것이어야 됨을 일깨우셨다고 보인다. 이는 소명의 무게가 그의 혼 혈족의 자존심을 걸고 감당해야만 할 만큼의 큰 것인지를 일깨우신 내용이다. 


이런 의미를 담은 바를 인식하면서 거기에 아멘 할 수 있는 자에게, 예수께서는 비로소 당신의 목자 직임(職任)을 위임하신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15-17절). 이 대목을 대하면서, 필자는 목사로 안수받았던 1975년11월4일 새벽기도의 순간을 기억한다. 기도회 직후, 개인 기도할 때,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동안 목 놓아 울었다. 그때의 내 마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지금까지의 나는 죽었구나 -!’ 


주님의 선택을 받아 목회의 위임을 받은 사람은 죽음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분의 뜻을 받들다가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위임받은 베드로는 그의 노년에 어떠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친히 예고 받는다(18-19절). 곧 스승 예수님처럼, 십자가형(刑)의 순교를 암시받았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면,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할 잔이다. 이 엄중한 삶을 새롭게 부여받은 베드로에게, 주님은 최후의 말씀을 주셨다. ‘나를 따르라 - !!!’


2. 예언서 / 렘23:1-4 / “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본문은 목자가 다 똑같지 아니하여, 악(惡)한 목자도 있고 의(義)로운 목자도 있음을 밝혀준다. 그 실례로 이스라엘 역사(목장)에는 이런 두 종류의 목자인 왕들이 존재했다. 그래서 악한 목자가 양(백성)들을 이끌 때는 양무리가 멸하게 되고 흩어지게 되어 그 목장이 처참해졌다. 반면에 의로운 목자가 목양할 때는 그 양무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도 했다. 


1) 이스라엘 역사에서 악한 왕의 표본은 시드기야였는데, 그는 각가지 악행을 행하므로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면서(렘5:7 참조),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하게 만든 인물이었다(왕하24:17-25:21 참조). 그 바람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의 속국이 되면서 성전은 파괴당하고 많은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오랜 세월을 비애(悲哀)에 찬 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적잖은 사람들은 주변 나라들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교포)로 살게 되었다. 실로 슬픈 백성이 된 것이다. 


2)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절망만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도 함께 주셨다. 그것은 그 언젠가 때가 되면, 당신의 백성들을 기르고 돌볼 목자들을 세워서, 그 백성들이 다시는 두려움이나 놀라움이나 버림당하지 않도록 살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3-4절). 그때의 모습은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돌아오게 하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 것을 예고하셨다. 


이렇다면 이런 회복의 예언 성취(成就)는 언제였나?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인류의 영원하신 목자로 오신 예수님과 그가 불러 세우신 제자들과 그들과 함께 시작된 성령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사역으로, 시작되고 번성한 새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본다. 실로 지극히 당연한 증언들이다.


3. 서신서 / 벧전5:1-11 /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自願)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本)이 되라 ”


본문은 번성해가는 교회들과 성도들을 돌보는 목회가 전문적 목자의 수량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형편에 따라서는 지역 교회의 목회를 그곳 현장에서 안수받은 장로들에게 위임하여, 양 무리를 치도록 하게 한 경우가 많아졌다. 우리도 예전엔 이런 경우가 많았었다. 그러기에 그들을 위한 공동 전범(典範)이 될 목회지침이 꼭 필요했다. 베드로가 그 지도서를 발송했다. 아울러, 그곳 현장에 있는 성도들도 그런 목회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도 지침을 주었다. 


1) 이들의 정체성은 그들 역시 예수 십자가 고난의 증인이요, 장차 나타날 영광의 참여할 자이다(1절). 그러기에, 사역은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이익과 손익 중심의 목회가 되면 안 된다(2절). 주장하는 자세보다는 본을 보여 주는 모습으로 해야 한다(3절). 그래야 목자장 예수께서 오실 때, 시들지 아니할 영광(榮光)의 관(冠)을 얻는다(4절). 


2) 그러면 성도들(젊은 자)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나? 장로의 가르침과 지도에 순종(順從)하고 겸손(謙遜)하게 응해야 한다(5-6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그런 사람을 높이신다. 혹 염려할 일이 생기거든 다 주님께 맡겨라(7절). 대적자 마귀가 결코 틈 못 타게 하라.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라(8-9절). 그러면 은혜의 하나님께서 잠깐의 고난에 있을 너희를 더욱 온전하고 견고하게 하신다(10절).


o 오늘은 교회교육주일이고 어린이-청소년주일이다. 교회 교육과 미래 세대의 신앙교육의 대원칙은 분명하다. 몸과 마음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며 살도록 교육하는 일이다. 동시에 내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도록 훈련하는 일이다. 이런 대원칙을 쫓아 살게 되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에게 임하면서, 그의 일생을 복되게 하여 주신다. 고난이 와도, 더욱 빛을 발하게 해주신다. 


이런 점에서 목회자는 모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성도들은 순종과 겸손으로 목회자의 가르침을 쫓아야 한다. 그럴 때, 마귀 권세를 물리칠 수 있게 되고, 의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 부디 이런 선한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자.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