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강림 후(1-4) - " 땅의 사람에서 하늘 사람으로 " / 최부옥 목사 > 성령강림절

본문 바로가기

성령강림절 HOME > 설교올리기 > 성령강림절

[둘째해] 강림 후(1-4) - " 땅의 사람에서 하늘 사람으로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19-06-17 (월) 08:05 4년전 3224  

본문) 갈 5:16-26, 신 30:15-20, 막 4:1-20 

 

오늘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첫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일에 하나님께서 육체가 아닌 영(靈)으로 강림하신 일이, 지구촌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는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친 날이었는지를 놀랍게 경청(傾聽)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인류는 사실상 두 종류의 존재로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점도 확인하였습니다. 소위 기존의 인류와는 다른, ‘새 인류의 탄생’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강림하신 ‘성령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여부로, 판가름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런 갈라짐은 인간의 외형적 변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거듭남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를 닮은 존재들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존재들이 생겨났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하늘 사람’과 ‘땅의 사람’으로 구별 지어 부르려고 합니다. 바울 식으로 정리하면, ‘영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런 차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의 행동과 관심사를 주목하면, 금방 식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사람은 하늘의 일과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땅의 사람은 땅의 일과 육신의 일만을 생각합니다. 오늘의 세 본문의 주인공들은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이렇게 세분해 말합니다 :

 

1)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과 육체의 소욕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으로 세분(細分)합니다. 

2) 모세는 생명과 복을 택하는 사람과, 사망과 화(저주)를 택하는 사람으로 세분합니다. 

3) 예수님은 열매 맺는 ‘옥토 인생’과, 열매 없는 실패 인생인 ‘거라지 인생’으로 세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늘 사람과 땅의 사람,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상호관계(相互關係)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대략 다음의 세 가지 부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이 서로 상극인 두 사람은 먼저 내 안에서 모두 경험되어 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때는 하늘사람으로, 어느 때는 땅의 사람으로 경험됩니다. 자칫 한 사람 안에서, 낮에는 천사가 되고, 밤에는 악마가 되는 내용을 소개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공존(共存)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어느 때 하늘 사람입니까? 성령을 따를 때입니다. 어느 때에 땅의 사람입니까? 육체의 욕망을 쫓을 때입니다. 언제 온전한 한 사람으로 평정이 됩니까?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입니다. 그래야만, 내가 선과 악의 널뛰기를 면할 수 있게 됩니다. 

 

2) 저 둘은 마치 물과 기름과 같아서 서로 어울리지 못합니다. 일종의 원수이며 상극(相剋)관계입니다. 서로가 추구하는 것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 있을 수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거스르고 대적하면서, 서로의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입니다(갈5:17절 참조). 그러기에 이 둘 사이에는 평화가 없으며, 전쟁도 피할 수 없습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구원이냐 버림이냐, 생명이냐 사망이냐, 알곡이냐 쓰레기이냐?’만 있을 뿐입니다. 

 

3) 이 둘은 의지(意志-노력.교육.훈련)를 좇느냐, 본능(本能)를 쫓느냐에 따라서 서로 갈라집니다. 즉 하늘의 열매는 의지를 좇는 자의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열매는 인간 본능의 몫입니다. 의지는 얻고자하여 노력하고 교육받으며 끊임없이 훈련하는 마음입니다. 특히 성령을 따르고, 생명을 선택하고, 옥토의 열매를 얻고자 할 때는 그만큼 고귀한 것들이기에 노력이 요청됩니다. 가만히 먹고 놀면 얻을 수 없고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얻기 위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르리라’고 요구하셨습니다(눅11:9참조).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제대로 얻어 내 것으로 누리려면, 자기가 먼저 십자가에 죽는 체험이 없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즉 하늘의 사람 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수고가 있어야 되고, 냉철히 분별하고 과감히 선택을 잘해야만 됩니다. 

 

하지만, 본능(本能)을 쫓아 사는 삶은, 힘쓰고 애씀이 없어도 자동적으로 됩니다. 아담부부를 보십시오. 교육비를 안 내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미워하고 시기하고 음행하고 이웃과 담쌓고 당 짓고 분열하고 타락하며 잘 삽니다. 그저 가만있으면, 본능을 따르는 생존법칙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그런 삶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갈5:21참조). 땅의 사람의 길은 노력이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아무 수고 없이 살아도 됩니다.

 

먼저, 서신서를 봅시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성령 공동체이기에, 거기에 편입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성령을 따라 살아야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16절).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교회 안에는 아직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해서, 성령이 아닌 육체를 따라 행하는 무리들이 있음을 보면서, 그들을 경고하였습니다. 한 교회 안에도,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과(19-21절).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로(22-23절) 나누어져서 각각 그 행실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 실상을 봅시다. 

 

1)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영적(靈的) 싸움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내가 성령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안에 있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소원을 거스리면서, 서로 대적하는 일이 순간순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만일 내 안에서 성령의 소원이 승리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만, 혹 육체의 소욕에 승리하게 되면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과 세상에 부끄러운 짓을 행하게 됩니다. 요즈음의 한기총의 전광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퇴행(退行)에도 빠지게 됩니다! 

 

2) 바울은 그 육체의 욕구가 내 안에서 기승(氣勝)할 때, 어떤 현상들이 발생하는지를 보다 상세히 전합니다. 그 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다음과 같은 타락상을 보여 줍니다(19-21절). 

-음행(淫行)에 빠집니다. 더러운 짓을 합니다. 호색(好色)에 빠집니다, 우상 숭배합니다. 주술(呪術)에도 관심합니다. 원수를 맺습니다. 분쟁(紛爭)합니다. 시기(猜忌)합니다, 분(憤)냅니다. 당(黨)지면서(한기총의 전광훈처럼) 분열(分裂)을 조장합니다. 이단(異端)에 빠집니다. 투기(妬忌)합니다. 술 취합니다, 방탕(放蕩)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불행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절대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1절.하)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부정적인 행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표출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교회 공동체에다 크고 작은 신앙적인 위기들을 안겨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로서, 앞에서 언급한 그런 모든 정욕과 탐심들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죽었던 옛 것들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경계해야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24-26절참조).

 

4) 성령 받은 이들을 주목하십시오. 그 아름다운 열매들이 그의 삶과 인격에서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그 소중한 열매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22-23절 참조). 여러분 자신의 삶의 내용과 비교하며 확인해 보십시오!  

-사랑합니다, 기뻐합니다, 평화롭습니다, 참습니다, 친절합니다, 선합니다, 신실합니다, 젊잖습니다, 자기통제(self-control)를 잘 합니다.  총 9가지 열매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특징(特徵)이라면, 이 같은 것을 금지(禁止)할 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세상의 그 어떤 법으로 통제 받지 않아도, 그 법으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점입니다.  

 

구약을 봅시다

모세는 하나님의 참 소원은 당신의 백성들이, 생명과 복을 택하여 누리고 사는 것에 있음을 밝힙니다. 어느 누구도 사망과 화(저주)를 택하여, 불행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구원을 위한 분명한 지침(指針)까지도 확실히 제시하셨습니다. 당신이 모든 인간들 앞에 생명과 복-사망과 화를 두었으니(15,19절), ‘너희는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그 말씀 청종하고, 그를 의지하라’(16,19-20절,하)고 요구하셨습니다.

 

그 지침의 틀은 마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엔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제1 의 에덴동산’의 지침과 비슷합니다(창2:15-17절 참조). 즉 구체적인 구원과 축복의 길은 밝히 알려주시되, 그것을 택하고 취하여 먹느냐의 여부는 듣는 자들 스스로가 결정하라는 취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감스러운 것은, 이 지침 앞에서도 여전히 사망과 저주의 길을 선택하며 사는 이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일깨워주시는 경고와 교훈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 본능과 욕망의 욕구에 복종하며 사는 행태를 취하므로서, 여호와의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 다른 문화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맡겨두면서 하나님을 배신(背信)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에게 부여된 1%의 소중한 선택권을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넘겼기 때문입니다. 마치 에덴의 하와처럼, 본능과 호기심의 노예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기껏 쏟아낸 변명도, ‘왜 하나님은 내 앞에 생명과 축복만 두시지, 사망과 저주까지 두어서 나로 그것들을 취하여 이렇게 먹고 죽게 버려두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안되지요. 그들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불순종만 하다가, 그렇게 저주에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제시하신 최소한도의 요구들을 소중히 받아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손발을 주셨고, 일할 기능과 능력을 주실 때에는, 우리를 더 이상 로버트와 같은 기계 인간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나에게 삶의 방향 제시를 하신 것도, 나를 인격적이며 자율적으로 반응하는 인간, 응답하는 인간으로 상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최소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줄 알고, 찾아먹을 줄 아는 인간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선물들을 헤아려보시고 그 받은 은혜에 오직 감사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우리가 이세상에 온 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살아오기까지 도대체 내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이루어 놓은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거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모두가 주어진 것들뿐이잖습니까! 

 

내 존재와 삶도 받았습니다. 부모와 형제자매도 받았습니다. 학교와 이웃들도 받았습니다. 나라와 동족과 삶의 터전도 받았습니다. 더불어 살 자연과 환경도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도 받았고 교회도 받았습니다. 생존을 위한 각종 재능(才能)들도 부여 받았습니다. 게다가 받은 그것들을 의미 있고 복되게 누리고 사용할 지침서인 성경(聖經)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주어진 것에 대한, 올바른 사용 매뉴얼을 잘 경청하고 따라 살면, 복받지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내 생존을 위하여, 조물주이신 하나님과 내가 각각 몇 %의 역할 분담을 한다고 보십니까? 나는, ‘99%는 하나님이 맡으셨고, 단 1%가 내 몫이다’라고 보입니다. 내가 맡은 그 1%는 무엇일까요? 그 분이 지시하시고 말씀하시는 내용에, 내가 다만 ‘예’와 ‘아니요’로 응답하는 일 뿐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치 배의 돛이나 닻 같아서, 내 존재의 운명의 방향을 ‘천국이냐 지옥이냐’, ‘복이냐 저주냐’로 결정 짖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운명은 그런 아주 적은 것에서 결정됨을 명심합시다. 따라서 부디 내 선택은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되게 하십시오. 하늘사람은 바로 그 선택으로 살아갑니다!

 

복음서도 봅시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하늘 사람은 그 심령이 옥토(沃土)와 같은 존재로서, 번성(繁盛)하는 생애로 복을 누리며, 세상을 풍요롭게 하면서 살아가는 자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땅에 뿌려지는 씨앗을 당신의 비유의 자료(資料)로 삼으셨습니다(14절). 그 이유는 당신의 선포되는 말씀과 계명이 듣는 사람들의 마음 밭에 떨어질 때, 마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파생되는 다양한 현상과 결과물과도 흡사하게 작용한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요. 씨앗은 정말 기이(奇異)하고 신비(神祕)롭습니다. 씨알 1개가 대략 100개의 낟알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줄기들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자기를 먹는 이들을 살립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이, 그 씨알처럼, 그만큼 놀랍고 신비하게, 듣는 자들의 생명들을 살리고 번성하게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내 안에 씨앗처럼 떨어지는 주님의 말씀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과 함께 내 안에서 자라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는 내 마음 밭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혹 사탄(새)에게 내어 준 것 아닌가요, 말씀을 전혀 받지 못하게 하는 바위 같은 돌밭이나, 자라는 모든 것들을 질식시키는 세상 염려 근심들로 내 심령이 지배당하고 있지는 아니한가요? 그렇다면 큰 위기입니다. 반드시 성령의 도움을 뜨겁게 간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 내 영혼의 밭에 떨어진 말씀은, 내 안에서 자라서 30배, 60배, 100배로 풍성하게 수확하게 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강림하신 성령은 새 인류를 생산하고 인생의 새 질서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질서를 따라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과 땅의 본능을 쫓아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구별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 성령을 따라 살고, 생명과 복을 택하며 사는 존재이며, 말씀에 순종하며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들로 선택 받았습니다. 땅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의 자리로 넘어와 살고 있습니다. 육의 사람에게서 영의 사람에게로 넘어와 살고 있습니다. 더욱 깨어 삽시다. 그래서 옛 사람, 옛 문화, 옛 낡은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도록, 사단에게 우리가 맺은 열매들을 빼앗기지 않도록,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며 살아갑시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