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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부활절(6-1) - " 무엇이 유익할까요? " / 어버이주일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6-05-08 (금) 16:04 10일전 117  

본문) 신명기 34장 1-8절, 사도행전 1장 1-11절, 요한복음 16장 1-15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요한복음 16장 7절)


미국 콜로라도 협곡에 사는 독수리는 가시나무로 둥지를 짓는답니다.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고, 그 위에 깃털로 보금자리를 틀고, 거기에 알을 낳고 품어서 새끼를 기릅니다. 그런데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독수리는 둥지의 깃털을 풀어서 바깥으로 내다 버립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새끼가 가시에 찔려 울어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깃털을 모두 없애버립니다. 참 차갑고 모진 어미지요. 이 어미 독수리는 왜 이러는 걸까요? 지독한 육아 스트레스로 폭발한 걸까요? 아닙니다. 어미는 새끼를 둥지 바깥으로 쫓아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새끼를 밖으로 쫓아낼까요?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을까요? 아닙니다. 어미는 새끼가 스스로 일어서서 날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직은 아슬아슬하고 불안하지만,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날갯짓을 계속해야, 그래야 푸른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둥지에 주저앉아 뭉개기만 하면, 새끼는 덩치 큰 병아리밖에 될 게 없지요. 스스로 일어서서 날갯짓을 멈추지 말아야 진짜 독수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떠나가시는데, 그것이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참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지요.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무슨 전쟁 같은 사랑의 이별가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사실 이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도 이게 무슨 말씀인지 잘 몰라서, 너무 불안하고 당혹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무서운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오늘은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함께 생각을 나누어보려 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선 먼저, 요한복음 본문의 맥락부터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복음서가 넷 있지요. 네 복음서는 같은 복음서지만, 각각 개성이 뚜렷한 다른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마다 특별히 주목하고 강조하는 ‘관점/초점’이 있지요. 예를 들면, 마가복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주시합니다. 십자가 이야기의 분량도 상당히 길지요. 그래서 마가복음을 ‘확대된 수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은 무엇을 주목할까요?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집대성한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많은 ‘말씀/어록’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 ‘이방인’에 관심하지요. 따라서 가난한 자와 이방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특별하게 주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여러 면에서 공관복음서와 다릅니다. 그런데 그 내용과 분량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진 부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의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만찬을 베푸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곧바로 체포되어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야기 전개가 긴박하고 빠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식사를 마치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기도’를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14장에서 17장까지, 전체 4장에 117절이나 되는, 정말 상당히 긴 분량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단 한 절이지요.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아주 짧은 기도입니다. 이에 반해 요한복음의 기도는 17장 한 장으로, 26절이나 되는 긴 기도입니다.

여기서 궁금합니다. 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를 이토록 길고 자세하게 소개했을까요? 왜 그랬겠습니까? 예전에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다가 ‘가슴에 품은 칼을 버려야 한다’고 외쳤답니다.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그런데 느닷없이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가슴에서 칼을 꺼내놓고 통곡하며 참회했답니다. ‘말씀’과 자신의 ‘상황’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것이었지요. 똑같은 말씀도 어떤 때는 귓등을 스치는 자장가가 되고, 어떤 때는 내 정수리를 내리치는 죽비가 됩니다. 요한복음이 이렇게 긴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를 소개하며 특별히 주목하는 까닭은, 이 ‘말씀과 기도’가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당시 교회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요한복음 16장 1-4절을 보면, 당시 교회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어떤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왔을 때 제자들이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일까요? 2절을 보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내쫓는 때’입니다. 교회는 처음에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도 고치셨지요. 바울도 회당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차츰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쫓겨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었지요. 할례받은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원후 90년에, 율법학자들이 주도하는 유대교가 로마의 합법 종교로 인정받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 축출당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박해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지요. 생각해 보면, 예나 지금이나, 모든 종교 전쟁과 박해는, 가해자들이 자기 신을 섬기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자행되었습니다. 

때가 왔습니다. 교회가 혹독한 박해를 받고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당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의 때에 누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이지요. 이런 암담한 절망의 때에는. 그 어떤 때보다 ‘그리스도’가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계셔서 든든하게 지켜주셔야지요. 그런데 정작 가장 필요한 때에, 예수님은 그들 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한은 바로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과 기도’를 기억(재해석)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겠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낙담하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내가 진실을 말하겠다!’ 하십니다. ‘진실’(αληθεια, 진리, 요한복음에서 25번이나 쓰인 중요한 말)입니다. 입에 발린 달콤한 사탕발림이 아닙니다. 만사 다 잊게 하고 나른한 평안을 주는 프로포폴이 결코 아닙니다. 죽비처럼 정신을 퍼뜩 차리게 깨워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 진실한 말씀, 진리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면, 그것이 진실이요 그것이 진리라면, 무엇이 어떻게 유익하다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것이 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말일까요?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셔야 ‘보혜사’가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떠나시고 ‘보혜사’가 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 ‘보혜사’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 정말 놀라운 말입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표현한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보혜사란 무엇입니까? 위로해 주고, 조언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앞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뒤에 서주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助演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조연이라면, 여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진짜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요, 바로 우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판단도 없는 좀비가 결코 아닙니다. 생명과 역사의 당당한 主體입니다.

예수님은 보혜사가 무엇을 조언해 주시고 어떻게 도와주시는지도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의 잘못을 깨우쳐 주신다고 했지요. 죄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누구를 신이라고 믿었을까요? 당시 세상은 로마 황제를 신이라고 믿었고 탐욕과 권력을 따랐습니다. 보혜사는 이 탐욕의 우상숭배야말로 세상의 죄라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또 의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서 볼 수 없기 때문이라 하셨지요. 예수님을 볼 수 없으니 어디서 길을 찾고 누구에게 진리를 배우며 어떻게 생명을 살 수 있을까요? 이제는 보혜사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살아내셨던 그 의의 길을 깨우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보혜사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지금 스스로 신이라도 된 듯 기고만장하는 저 세상의 통치자는, 심판자가 아니라, 이미 심판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까지 다시 읽어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遺言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이 절절히 배여 있지요. 이 말씀과 기도에서, 예수님이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14장 1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αμην αμην)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한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참 감당하기 두려운 말씀이지요. 예수님이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어디에 좀비의 맹신이 있습니까? 또 15장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예수의 종이 아니라 친구랍니다. 그리고 17장 21절에 가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정말 놀랍고 두려운 기도 아닙니까?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신 이 놀라운 신비, 이 삼위일체의 거룩한 비밀에 그리스도인들도, 우리도 참여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함께 나누고(19절),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영광,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에게 주신 그 영광을 함께 누리는(22절),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명기에서 모세가 떠나는 이야기도 읽었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한평생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너고 광야 40년 동안 헤매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토록 바라던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보여주시면서도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하셨고, 모세는 거기서 멈추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모세가 떠났을 때 히브리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세상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유일한 사람, 광야 40년을 이끈 영도자(?), 율법을 받은 지도자를 잃는 것은 얼마나 불안하고 막막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이제부터 그들은 파라오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어른이 된 여호수아의 새 세대가 말씀의 빛을 따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주 금요일은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떠나신 그날에도,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은 망연자실하여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때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사도행전 1장 11절) 예수님이 떠나셨다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셨던 그 일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실행해야 한다, 그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교회가, 우리가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는 말씀의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너무도 잘 압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리스도의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깜냥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요한복음 16장 12절)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할 것도, 베드로가 부인할 것도, 제자들이 오합지졸로 흩어져 도망할 것도, 이미 아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깨우쳐 주시며,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도록”(에베소서 4장 13절), 우리를 지켜주시고, 진리 가운데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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