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23:1-4, 벧전 5:1-11, 요 21:15-19
1) 어린이 없는 어린이주일
어린이주일을 맞았습니다만 어린이들이 없는 어린이주일을 맞게 되어서 착잡한 마음입니다. 우리 사회의 결혼 기피 현상과 출산 기피 풍조가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지금 우리는 단순한 인구 감소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미래 희망이 사라져 가고 있는 위기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았는데도 어린이들의 뛰어노는 소리가 사라져가는 현실 앞에서 가슴이 먹먹합니다.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인데도 ‘산아제한’이라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지 못한 우리의 무지가 이런 현상을 가져오게 일조(一助)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출산을 조절하고, 심지어 태아의 생명을 살해하는 낙태를 아무런 죄의식이 없이 자행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다시 아이들의 울음소리, 뛰노는 소리가 들리는 마을을 만드는 데 우리 교회들이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어린이들을 믿음으로 잘 키워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어른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교회의 구조도 바꿔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내 어린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말씀은 지난 주일 복음서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갈릴리 호수로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이 물고기를 굽고, 빵을 나눠주시며 함께 아침 식사를 하신 말씀들을 보았습니다.
이어 조반(朝飯)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반복하기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왜 똑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가야바의 집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반복적으로 물으신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예수님이 세 번이나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신 말씀을 주신 의도를 우리가 잘 아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사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갈릴리는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주류사회로부터 밀려난 주변부 인생들이 서러운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그 지역에는 우선 가난한 사람들,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장애인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 곧 ‘땅의 사람들(Am Haaretz)’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시면서 이들의 고통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고쳐주시며, 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내 어린 양’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바로 그 가난하고, 병들고, 힘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짓밟히고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을 지칭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바로 그 ‘어린 양’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극진히 사랑하셨던 ‘어린 양’들을 볼보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주님이 ‘내 양’, ‘내 어린 양’이라고 소중하게 생각하셨던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이 교회의 책임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돌보라고 맡겨주실 때 먼저 주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라고 하는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후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 양들을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바로 그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품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폴란드의 소설가 센케비치의 소설 <쿼바디스>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당시 로마의 지하교회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를 아끼는 사람 둘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로마를 탈출하라고 간청합니다. 베드로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로마를 빠져나와 카파니아라는 들판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환한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옵니다.
그 빛이 예수님이신 것을 안 베드로가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쿼바디스 도미네” 곧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그 빛 속에서 예수님은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며 로마로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그 이후 로마로 다시 들어가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데 생명을 바쳤습니다. 18절, 19절은 훗날 요한이 베드로가 순교를 당한 후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베드로 순교를 주님이 이미 예고하신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베드로에게 주신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이 위임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쿼바디스>에 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 교회를 보고 다시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실까 두렵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주님이 그렇게도 끔찍하게 사랑하신 ‘어린 양’을 제대로 돌보고 있는가를 지금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3) 양무리의 본이 되라
서신서 말씀 베드로전서 5장은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양을 돌보도록 위임받은 그 베드로가 어떤 마음으로 어린 양들을 섬겼는가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한 권면입니다만 그의 이 말을 보면 그의 목자로서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교회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인 것을 밝힙니다.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라고 하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합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2절에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헌신(獻身)’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양 떼를 돌볼 때 이득을 생각하며 하는 ‘사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3절) 그래서 삼가고, 조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성실함으로 양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4절의 말씀처럼 목자장(牧者長) 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영광의 관’을 주실 것입니다.
4)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구약 본문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망하기 직전에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질책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정치권력, 종교권력을 가진 자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짓밟고 등쳐 먹으면서 호사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를 본 예레미야는 양 떼 곧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지도자들을 여지없이 질타합니다.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돌보지 아니하였도다”(1-2절)
어느 시대나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 힘을 이용해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면서 힘없는 사람들의 것을 탈취했습니다. 지도자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만 실제는 그런 악덕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지도자들은 약한 백성들을 위해 희생과 헌신으로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목민심서>를 저술했습니다. 그는 지도자들을 ‘목민관(牧民官)’이라고 부르면서 “목민관들은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구분해야 하고, 아랫사람들이 자신 모르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힘을 가진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의 무서운 책망의 말씀을 새겨듣고 바른 지도자들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6.3 지방선거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희생과 헌신을 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세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들의 사익(私益)을 위해 주민들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골라낼 수 있는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5) 맺음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셨습니다.(요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가르치시고 실제로 주님의 양인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게 양들을 돌볼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의 분부를 받들어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희생과 헌신으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중에서 살아가는 ‘어린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어린 양’들의 고통하며, 신음하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잘 돌보아주는 목양(牧羊)의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사회의 ‘어린 양’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주님이 우리 교회에게 약속하신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