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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2-1) - " 구원의 신비 " / 한성수 목사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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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대림절(2-1) - " 구원의 신비 " / 한성수 목사

관리자 2025-12-05 (금) 20:28 2일전 55  

본문) 2:1-13, 11:25-32, 19:28-40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1:7)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먼저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은 신비라고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11:25) 세계의 시민이라고 불리웠던 로마의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있는 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지혜로서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신비인 것은, 이스라엘의 우둔함으로 인해 저들이 멸시하였던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불순종의 백성이었던 이방인이 거꾸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선택은 후회하심이 없는 신실한 것이기에(11:29)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은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이스라엘)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이방인)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이스라엘)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1:31)고 하면서 구원의 대상에 있어서 주객이 전도되었지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는마지막 때에는 이방인과 함께 불순종의 이스라엘도 구원의 행렬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강해에서 바르트는 이렇게 예전에 순종하지 않았던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여시고, 때가 이르러 이스라엘에게도 긍휼을 얻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종말적 가능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버려진 자로 구원을 받았고, 의롭게 될 수 없는 자가 의롭게 되고, 죽은 자들로부터 깨어 일으킴을 받게 되는 가능성이라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의 본질은 불가능에서 가능을 바라보게 하는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그 가능성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적 가능성이라는 이 구원의 신비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누구를 무론하고 예수를 나의 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는 불가능의 올무에서 해방되어 가능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구원의 신비를 몸소 경험한 자였습니다.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자신의 과거를 밝혔던 바울은, 교회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박해자였습니다. 옛사람 사울은 예수 믿는 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가던 중 길 위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하늘에서 내리 치는 섬광을 맞고 땅바닥에 고꾸라진 사울이 나를 친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로부터 사울은 회심하여 전도자 바울이 되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생을 바치게 됩니다. 바르트가 언급한 종말적 가능성속에 바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버려진 자로 구원을 받았고, 의롭게 될 수 없는 자로 의롭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31절처럼, 이방인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말미암아 이제 불순종한 유대인도 긍휼을 얻게 되리라는 그 말씀이, 바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만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몸소 경험하였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들만의 특권으로 여겼던 독선적 기득권을 타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특정한 사람에 매이지 않으니,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3:29)

 

스가랴는 예루살렘의 재건이 중단된 상황 속에서 특별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이 측량줄을 손에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그는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재건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의 염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재건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응답으로 여겼습니다. 측량은 도시의 경계를 정하고, 권리와 소속을 정하는 행위입니다. 측량줄로 예루살렘의 경계를 정하고 그 성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구원받은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 측량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장차 예루살렘은 사람과 가축이 많아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며, 하나님이 친히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어 그 가운에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측량을 멈추게 하고 성곽 없는 성읍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무엇보다 성곽은 고대 도시의 핵심적인 생존 장치이기에, 보호막인 성곽이 없다는 것은 무방비와 취약성으로 인해 극한의 위험에 노출된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스가랴에게 주어진 환상은 하나님께서 친히 새롭고도 완전한 안전장치가 되어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셔서 성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2:4-5) 장차 사람과 가축의 수효가 많아져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성곽을 제거하여 성곽 없는 성이 되게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공간이 넓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성읍의 문턱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2:11)이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 날에, 즉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그때 많은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기에 예루살렘 성의 성곽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성곽이라는 민족의 경계를 허물고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시대를 열겠다는 것입니다. 측량줄로 너비와 길이를 재어 유대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살겠다는 배타적 선민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곽이 없는 성읍은 무방비로 노출된 불안하고 위험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불로 둘러싼 울타리가 되어 주시는 안전한 처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누구든지 거할 수 있는 구원의 자리입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함께 긍휼을 얻는 구원의 신비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성읍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11:25) 많은 사람들이 채워질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벗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은 이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포로된 나라와 억눌린 백성에게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20:16)는 주님의 말씀은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11:30)는 사도바울의 말씀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신비를 깨닫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영접하는 제자들을 못마땅히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평소 예수님의 행적을 비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죄사함을 선포하니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수군거렸습니다.(5:18-21)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 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2:16)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종려주일,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19:38)라고 외치는 무리의 함성을 듣고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19:40)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구원의 신비를 이루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며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기심의 성곽을 허물기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이상 측량줄을 손에 잡고 나의 구역, 우리만의 영역을 재단하는 일이 없는 세상, 다시말해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왕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돌들이 소리 지르기 전에 믿음의 백성들이 먼저 외쳐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우리는 포용과 관용과 열린 생각으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땅에 아기 예수의 오심으로 분열과 갈등이 치유되고, 용서와 화해로 하나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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