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32:7-14, 행 14:8-18, 막 8:1-9
창조절 여섯째 주 주일 낮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모든 여건과 환경, 그리고 건강을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애착인형이 무엇인지 아시죠? 애착이라는 뜻은 "몹시 사랑하거나 끌리어서 떨어지지 아니함. 또는 그런 마음."입니다. 애착인형은 어린아이가 몹시 좋아하여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인형입니다. 모든 아이가 다 그렇진 않지만, 애착인형이 생긴 아이들은 언제나 가지고 다니고, 잠잘 때도 안고 자야 잠을 잡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마음이 마치 어린아이가 너무 좋아하는 애착인형을 향한 마음과 비슷합니다. 인형이 아이를 즐겁게 하려고 재롱을 떱니까? 아니면 부모님처럼 아이를 돌봐줍니까? 아니죠. 그냥 좋아합니다. 어느 순간 아이의 눈에 들어와서 몹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를 창조하신 다음,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어왔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얼마나 우리를 좋아하셨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인형은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좋아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끝까지 따라가면 그 사랑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신명기 32:7-14 - 배반해도 놓지 않으시는 몫
구약 본문인 신명기 말씀은 모세의 노래 중 일부분입니다. 이 노래에서도 그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면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실 뿐 아니라, 더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지조도 없고 속이 삐뚤어져 배배 꼬여버렸습니다. 모세도 얼마나 답답했는지 "미련하여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아" 하고 노래합니다.
그런데도 모세의 노래는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먼저 노래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 옛날을 기억해 봐라. 대대로 내려온 시대를 더듬어 봐라. 본래 너희가 어떤 족속이었는지 너희 부모에게 물어봐라. ~ 너희 자손이 광야에서 맹수들에게 포위되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셨다.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보호하듯이 하나님이 가르치고 보호해 주셨다. 그다음에 기름진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모든 양식을 먹게 하셨다."
여기 나오는 독수리를 잠깐 보겠습니다. 이 독수리는 보금자리를 흔들어 새끼를 깨우는 독수리입니다. 편안한 둥지에만 머물게 두지 않고 날도록 이끄는 독수리입니다. 그러나 이 독수리는 무엇보다 새끼 위를 떠나지 않고 맴도는 독수리입니다.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아 올리는 독수리입니다. 광야는 편안한 곳이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은 단 하루도 하나님의 날개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왜 이러한 노래를 불렀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데 그것을 잊어버리니까, 잊지 말라고 노래로 만든 것입니다. 노래로 불러서라도 기억하라고!
우리말을 보면 참 성경적이라는 것을 가끔 깨닫게 됩니다. "우리"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나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우리나라"라고 하죠? "나의 가족"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나"만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제목도 그렇습니다. 제목이 "주님의 몫"입니다. "몫"이라는 말은 여럿이 나누어 가질 때 "내게 돌아온 내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나누어 놓고 하나님께서 "이것은 내 몫이다" 하고 가장 소중하게 품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신명기 32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의 몫은 그의 백성이니."
세상 모든 것 가운데서 주님이 자기 몫으로 택하신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인지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보면 압니다. 이 몫은 신실하고 착해서 얻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광야에서 배반하고 배배 꼬였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배반해도 주님의 몫은 주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주님의 몫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택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몫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8:1-9 - 불쌍히 여기사 자기 몫으로 삼으신 주님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꾸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자주자주 보고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복음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이방인 무리와 3일간 함께 지내셨습니다. 함께 모인 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3일간 굶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더 굶은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걱정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이 4,000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떡이 몇 덩이 있느냐?" "일곱 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앉게 하신 다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무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자 물고기 몇 마리가 나왔고, 이것도 축사하신 후에 나누어 주십니다.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가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는 5,000명이 나누어 먹은 이야기가, 8장에는 4,000명이 나누어 먹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여러 번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듣고 음식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에는 이방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눈여겨봐야 할 단어는 2절입니다.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여기에 모인 이들을 "자기의 몫"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일곱 바구니가 남았다는 사실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몫으로 삼으신 사람들에게 주님은 겨우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넘치도록 채우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이렇게 넘치게 흘러갑니다.
사도행전 14:8-18 - 몫을 알고 돌아오게 한 사람들
모세가 이 마음을 기억하고자 노래를 만들었듯이, 이러한 마음을 품은 이들은 항상 있어 왔습니다. 사도행전 14장 8절부터 18절 말씀에도 이러한 사람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바나바와 바울입니다. 이 둘은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사도행전 14장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바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알고는."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라." 그 사람은 걷게 됩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여깁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여겼다는 것은 이 사건의 진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목적이 아니라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4,000명을 먹이신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적을 일으킨 마음, 곧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기 몫으로 여기신 마음입니다. 모세가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것도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4장 15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 노래로 기억하게 했던 모세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삶을 바나바와 바울이 산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모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장정만 60만 명이 넘는 백성을 먹여 살린 모세, 4,000명을 먹이신 예수님,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바울. 우리에게 이런 능력은 없습니다. 사실 저는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는 주님의 몫이다"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 가운데서 주님이 가장 소중하게 자기 몫으로 택하신 것이 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를 택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위협에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몫으로 삼으신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애착인형은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몫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몫이라는 말의 무게입니다. 이 기억은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바꿉니다. 내가 주님의 몫이라면, 내 곁의 이웃도 주님이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몫입니다. 내게 불편하고 배배 꼬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주님은 목숨을 걸고 자기 몫으로 삼으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랬고, 굶주린 이방인 무리가 그랬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함부로 대할 수 없듯,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 하신 이 세계를 우리가 함부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몫인 나는 주님의 몫인 이웃과, 주님이 지으신 세계를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