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26:4~15, 마 25:31~46, 약 2:14~26
1. 반갑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행복합니다.
2. 바쁘고 분주하게, 맡겨진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오신 여러분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축복합니다.
3. 한 주간 손에 쥔 것도 있고 내려놓은 것도 있습니다.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4. 하나님께서는 바쁘고 분주하게 수고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하시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5. "우리는 누구인가?"
6.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이끕니다.
7.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 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8.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우리 중에 성경 말씀의 이 물음과 답변에서 예외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9.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0. 따라서 오늘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는 "내가 얼마를 드렸는가"를 자랑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누가 나를 붙들고 여기까지 데려오셨는가"**를 재확인하고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11. 그중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구약의 본문인 신명기 26장은 예배자로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단계를 제시합니다.
12. 먼저, 나는 받은 자라는 고백입니다.
13. 둘째, 받은 자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4. 셋째, 고백과 기억은 급기야 나누는 자로 완성되는 단계입니다.
15. 그렇다면 먼저, 가장 기초적인 예배자의 자세로서 ‘받는 자’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6. 첫 열매를 가지고 나온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첫 고백은 이것입니다.
17.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8.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써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19. 이스라엘의 시작은 풍요가 아니라 결핍이었습니다. 출발은 자립이 아니라 의존이었습니다.
20.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이기도 합니다.
21.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합니다. 조금도 포장하지 않습니다.
22. 하나님 앞에 가장 낮은 곳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23. 이 고백은 가식이 아닙니다. 참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큰 존재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서 있는 가장 초라한 자의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탄성입니다.
24. 그렇기에 이 고백은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주어로 시작하는 진술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25. 7절에서 “우리가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들으시고, 보셨다.”
26. 8절에서 “여호와께서 인도하여 내셨다.”
27. 9절에서 “여호와께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
28.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신 것을 받기만 했을 뿐입니다.
29. 참 신앙인만이 외칠 수 있는 참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30. 그러므로 정착과 첫 열매는 “우리가 해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31. 농사를 지어 뭔가를 얻었는데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됩니다.
32. 무엇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까?
33. 우리는 안정되어 보일 수 있으나 본질은 끝까지 ‘받는 자’라는 고백입니다.
34. 오늘 우리의 호흡, 가족, 일터, 신앙도 같습니다. 주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35.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36. 예배는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받은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신앙의 첫 단추입니다.
37. 받았음을 고백할 때 우리는 소유의 교만에서 벗어나 은혜의 질서로 들어갑니다.
38. 그리고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받은 자에서 기억하는 자로 자라가라고 부르십니다.
39. 하나님은 예물의 양보다 기억의 정확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40. 바구니를 들고 제사장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리 내어 역사를 복기하게 하셨습니다.
41. 떠돌던 때, 밤마다 부르짖던 순간, 도우심이 없었다면 끝났을 그 시간을 고백하며 기억 속에서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42. 왜 이렇게까지 기억하게 하실까요?
43. 첫째, 기억은 교만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44. 정착은 쉽게 특권 의식으로 변합니다.
45. 기억은 “내가 했다”는 착시를 꺾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진실로 우리를 다시 세웁니다.
46. 이처럼 기억은 자랑을 낮추고 감사의 뿌리를 깊게 합니다.
47. 둘째, 기억은 눈을 열어 보다 넓은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48. 한때 나그네였음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오늘의 나그네를 사람으로 봅니다.
49.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상처를 받습니다. 남들은 경험하지 못할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50. 많은 경우 그런 인생을 원망하고 타인과 비교하며 불평하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51. 그런데 자신이 겪은 그 상처가 오히려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공감하게 하고 서로 의지가 되며 버팀목이 되어주는 힘이 되어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를 치유하는 통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52.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53. 자신의 모든 삶은 절대자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가능한 힘입니다.
54. 그 과정을 겪은 후에 비로소 주변의 상처 입은 자들이 보입니다.
55.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하루를 버티는 이들, 돌봄의 공백 속에 놓인 가정, 이주와 주거의 취약으로 떠밀린 이웃, 사회적 안전망 밖에 선 작은 자들이 비로소 얼굴로 보입니다.
56. 이처럼 기억은 시선을 넓히고 타인의 결핍을 나의 기도로 끌어들입니다.
57. 그래서 기억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8. 사랑하는 여러분,
59.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은 오늘의 선택을 바꾸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진짜라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이어집니다. 바로 나눌 수밖에 없는 삶입니다.
60. 누구와 나눌 수밖에 없을까요?
61.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6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63. 12절도 읽어보겠습니다.
64.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65. 감사의 완성은 혼자 감격이 아니라 함께 기쁨입니다.
66. 하나님은 셋째 해의 십일조를 레위인·나그네·고아·과부에게 돌리라 하셨습니다.
67. 이는 기분 내킬 때 하는 선행이 아니라 제도화된 나눔입니다.
68.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더 큰 공동체로 확장입니다.
69. 받은 것도 확장, 기억도 확장, 나눔도 확장입니다.
70. 왜 그래야 할까요? 너희도 한때 그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었고, 그것을 기억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71. 따라서, 크든 작든 지금의 수확 그 자체가 은혜라면 그 은혜는 옛날의 너, 우리였던 오늘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72. 그러므로 “나는 받은 자입니다”가 진짜라면, “나누는 자”로 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73. 여기까지가 신명기 26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74. 그런데 이 질서가 구약에만 머물러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75. 신약은 이 질서를 더욱 선명하게, 더욱 절박하게 우리 앞에 펼쳐 놓습니다.
76. 주님은 마지막 날의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77. 34절입니다.
78.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79. 먼저 은혜를 선포하십니다.
80.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라를 받으라"(34절).
81. 상속과 예비됨은 은혜의 언어입니다.
82. 그리고 곧바로 그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근거를 말씀하십니다.
83.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 나그네 영접, 헐벗은 자를 입힘, 병든 자와 갇힌 자를 찾아갔느냐?(35-36절). 찾아갔느냐?
84. 반대편은 이 목록의 부재로 심판을 받습니다(42-43절).
85. 그리고 결정적 선언이 이어집니다.
86. "찾아갔든 안 찾아갔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다."
87. 주님은 “가난의 낭만”을 말하지 않으시며 구체적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88. 작은 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곧 주님을 대한 증거가 됩니다.
89. "받았다지? 기억한다지? 그렇다면 작은 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보여라."
90. 의인과 악인이 똑같이 "언제 우리가…?"라고 묻는 대목은, 나눔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 아니라 늘 해 오던 대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체화된 습관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91. 종말의 법정은 감정의 고양을 묻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의 삶의 결을 확인하는 자리 아닐까요?
92. 그리고 또 한 사람, 야고보가 같은 묵직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93. 1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구원하겠느냐"
94. 추위와 배고픔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말만 하고 필요를 채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95. 그리고 야고보는 선언합니다.
9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17, 26절).
97. 이어 요구합니다.
98. "행함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여라"(18절). 말이 아니라 증거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99. 아브라함의 믿음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행함과 함께 일했고, 그 행함으로 온전해졌습니다(22절).
100. 라합의 환대는 믿음으로 위험을 감수한 실제 행동이었습니다(25절).
101. 야고보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102. "믿음은 보인다."
103. 어디에 보입니까? 마음과 뜻과 생각과 표정에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 물질의 흐름에 보입니다.
104. 오늘 구약의 본문인 신명기 26장 14절은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습니다"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검증 가능한 순종의 언어입니다.
105. 정리하면, 신명기 26장의 흐름은 이렇게 번역됩니다.
106. "믿습니다" → 첫 열매 봉헌(고백의 표시) → "받았습니다" → 분배·영접(기억의 증거)
107. 그때 비로소 신명기 26장 15절에서처럼 정직하고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108.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09. "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110. 믿음은 감탄사가 아니라, 보여 줄 수 있는 삶의 질서입니다.
111. 말씀을 한 문장으로 다시 묶습니다.
112. "받는 자 → 기억하는 자 → 나누는 자."
113. 이 길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주님이 심판의 언어로 요구하신 복음의 질서입니다(마 25).
114. 그리고 이 길은 말이 아니라 보이는 구조로 증명되어야 합니다(약 2).
115. 오늘 나의 삶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점검해 보십시오.
116. 나의 예배 시간은? 나의 헌금과 헌신은? 나의 생각은? 나의 관심은? 나의 방향은?
117. 한 해를 마감하는 연말이 다가옵니다. 다시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118. 아니, 매 예배 시간마다 점검하고 또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119.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받는 자로 부르시고 기억하는 자로 세우시며 나누는 자로 보내십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소망합니다.
121. "너희가 받은 땅에 이제 감사의 질서가 자랐구나."
122. 그 은혜가 각 가정과 이 교회 위에 굳게 서기를 축원합니다.
123. 주신 말씀 생각하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