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명기 26:4-15; 야고보서 2:14-26
야고보서는 믿음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을 권유하는 초대교회의 귀중한 교훈서입니다. 공동서신의 하나인 본서신은 기독교 교리를 집대성한 바울 서신들과는 달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 사상에 기초하여 구원받은 자의 행위(삶) 곧, 믿음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서신입니다. 그래서 일면으로 산상수훈의 교훈이 자주 소개되고 일면으로 구약성경 중 지혜문학의 대표격인 잠언의 여러 교훈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또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자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와 질책도 자주 눈에 띱니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서는 로마서의 핵심인 믿음의 본질을 행위라는 또 다른 측면에서 강조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독자들(유대계 그리스도 공동체) 사이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가 하면(2:1-4) 진실을 거스르는 말과 논쟁(3:1,13-18), 시세움과 교만 등 세속적인 욕심으로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생활을 하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또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로마 3:28)을 잘못 받아들여, 선행은 필요없다고 하면서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신자들에게 진정 하느님의 자녀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일깨워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의로운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많은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동족들로부터 많은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해를 피하여 이방 땅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성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방 지역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방 땅은 항시 로마 황제숭배가 성행하는 곳으로 늘 배교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이신칭의 사상은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켜 믿음만 강조될 뿐 믿음에 걸맞는 삶은 외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는 서신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은 행위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과 행위의 상관관계를 보여 주는 서신은 행함 없는 거짓 믿음이 범람하는 이 세대의 성도들이 다시 한 번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는 훌륭한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보다는 행동을 강조한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을 행동하라고 합니다. 결코 믿음과 행동을 분리하거나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로마서 1:17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칭의 개념을 이해한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아마 루터는 야고보서를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유대 랍비들은 신앙과 행위, 신앙과 순종, 율법과 행위, 순종과 공로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나의 통일체였습니다. 따라서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출신 기독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칭의)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행위 문제에 있어 설명이 달라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출신 기독인들을 유대전통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분명하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롬 1:17; 4:2-3). 유대출신 기독인들에게 행위는 유대 율법(특별히 할례 의식)을 지키는 것이므로 행위와 믿음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인간은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롬 4:2).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롬 4:2).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빚진 자로 만드는 일입니다(롬 4:4).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으며(롬 1:5) 근본적으로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진 바로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행위를 강조하나 이것이 야고보가 믿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행위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는 아브라함처럼(약 2:21) 당연히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는(약 2:14) 점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형제자매의 궁핍을 보고 반응하는 믿음입니다(약 2:15-17). 즉 ‘신앙 없는 행위’(행위 구원)가 아니라 ‘신앙 있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즉 야고보는 신앙과 행위를 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앙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 기독인이라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함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일시적 회심이나 죽은 믿음이 아님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믿음(실은 ‘아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의미에 더 맞음)은 귀신들조차 가진 것이라고 말합니다(약 2:19). 귀신들조차 알고 믿고 떠는 그런 믿음은 참 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귀신들조차 잘 아는 그런 믿음조차 없는 자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고 예수님 동생 사도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야고보 두 사도 사이의 진정한 입장 차이는 없습니다. 따라서 의롭게 되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부터 온다는 사도 바울의 입장과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과 순종과 신뢰의 행함(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믿음의 행함)이 따라온다고 본 야고보, 이 두 사도가 이해한 믿음과 행함의 문제에 있어 사실 본질적 차이나 모순은 없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감정적 차원이나 소유할 수 있는 실체로 이해한 사람들에게 믿음의 진정한 모습을 강조한 것입니다.
성격은 얼굴에서 나타나고, 생활은 체형에서 나타나고, 본심은 행동에서 나타나고, 감정은 은성에서 나타납니다. 배려는 먹는 방법에서 나타나고, 센스는 옷차림에서 나타나고, 스트레스는 피부에서 나타나고, 인간성은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신명기 26장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가진 것 없는 떠돌이 무리였으며, 뿌리 없는 방랑객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선조들은 본래 떠돌아다니는 소수의 아람 사람이었는데, 초원의 먹이를 찾아서 이집트 땅으로 내려갔다가 말할 수 없는 학대와 괴롭힘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강제노동이라는 그 고난의 현장 한 가운데서 야훼를 향해서 부르짖었더니, 야훼 하느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써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내시고,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다고 합니다. 수 없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어떻게 그들의 삶을 이어갔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자기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를 계속해서 낭독하면서 기억하고, 반복하여 재현하면서 후손들에게 전달한 데에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는 신조가 지배자나 백성들로부터 망각되었을 때에 다시 노예와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신앙이나 생각이 몸과 행동으로 표현될 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이솝우화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해와 바람이 서로 자기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 존경을 받는다고 말다툼을 하다가, 해가 말다툼을 끝낼 요량으로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의 겉옷을 벗겨낼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자.’ / 바람은 이 제안에 동의하고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얼음처럼 차갑고 매운바람을 농부에게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을 강하게 보내면 보낼수록 농부는 옷깃을 바짝 끌어당겨 더욱더 꽉 여미는 것이었습니다. / 다음은 해가 자기가 가진 가장 따스한 햇살을 농부에게 흠뻑 쏟아 부었습니다. 농부는 땀을 흘리다가 마침내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 승리는 당연히 해에게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와 바람”이라는 우화는 이렇게 끝나지만, 이야기를 조금 더 연장시켜 봅시다. 해는 결과에 신이 나서 웃었지만 바람은 완전히 승복하지 못하고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네가 이긴 것은 인정하겠어, 이번엔 누가 저 농부의 옷을 다시 입힐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자.’ 자신감에 넘친 해가 더욱 많은 햇살을 농부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땀을 뻘뻘 흘리게 되니까 오히려 입고 있던 속옷도 벗어부치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기회는 이때다 싶어 약간 쌀쌀한 돌풍을 날려 보냈습니다. 농부는 몸을 움츠리면서 얼른 속옷과 겉옷을 주워 입었습니다. 이번에는 바람이 이겼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솝우화를 비롯한 많은 동화나 이야기들에 의해서 우리는 커다란 고정관념을 배우게 됩니다. 해는 따뜻하고, 바람은 차갑기 때문에 해가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따뜻한 햇살이 있는 것처럼 따뜻한 바람도 있고, 스산한 바람이 있는 것처럼 스산한 햇살도 있습니다. 봄날에 내리 쐬는 따사로운 햇살은 기분을 상쾌하게 하지만, 한여름 뜨거운 햇볕은 불쾌지수를 높이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눈보라를 몰고 오는 바람이나 비를 불러 쏟아 붇는 태풍은 무섭지만, 산마루턱에 앉아 있을 때 다가오는 바람은 반갑습니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이 세상에는 해와 바람이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만합니다.
위의 우화에서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해와 바람의 시험의 대상이었던 농부입니다. 해와 바람은 자기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농부를 그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농부는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옷을 입을 줄 아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人之常情입니다. 그것은 어떤 신념이나 믿음과 무관합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이지만 해와 바람을 원망하지 않고, 내 일을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입습니다.
우리는 해와 바람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농부를 대상으로 삼았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신앙이나 생각을 강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교인들이 강요하고 싶어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해와 바람이 만든 경기 규칙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고 싶어 하는 신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핸디캡이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내용은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옷을 입는 당연한 가르침일 수도 있고, 반대로 더운 대도 옷을 입으라 하고 추운대로 옷을 벗으라 하는 억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행동의 문제에서 신앙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신앙도 날마다 변화하고 있으며 그 신앙이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가는 방향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에서 축적해 놓은 믿음의 규정 하나하나를 행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전통에 의해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자기가 직접 경험하면서 人之常情을 몸으로 익힐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뿐만 아니라 지혜와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행동으로 그것을 나타내야 한다고 합니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지식이든 명철이든 지혜이든 그것의 지향이 어느 방향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어떻게 활용하고 적용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지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우리의 삶이 믿음을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지혜로운 삶이 되기를 빕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1: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