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하 17:6-23; 롬 2:1-11; 막 12:1-12
사울 왕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왕국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어 역사를 이어 오다가, 기원전 8세기말 앗수르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갑니다. 두 왕국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앗수르에 대처했는데, 다메섹 아람 왕국과 가까웠던 북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도시 국가들과 군사동맹을 맺어 앗수르에 맞서려 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그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선택합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 동맹 세력은 당시 남유다의 왕이었던 아하스의 축출을 시도했는데(사 7:6 참고), 남유다가 앗수르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입니다. 공격은 바로 시작됐습니다. 이 전쟁을 가까스로 막아낸 아하스 왕은 곧장 앗수르의 임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앗수르 임금에게 사신을 보내 신하를 자임하고, 많은 양의 조공을 바친 것입니다(왕하 16:7-8) 아하스의 조치는 앗수르가 북이스라엘 동맹을 침공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왕하 16:9). 앗수르 왕은 곧장 군대를 움직여, 아람 왕국을 무너뜨립니다. 북이스라엘에게도 철저하게 보복하여 큰 피해를 입히고, 북이스라엘 영토의 많은 부분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곳곳에서 무력 저항을 일으켰지만, 무참히 진압됩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호세아 왕 제9년(기원전 722년) 사마리아까지 정복당하고, 영토와 주권을 모두 상실하게 됩니다. 남유다 왕국은 앗수르의 지배 하에 얼마간 존속했지만, 새롭게 일어난 바벨론 제국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당하고 맙니다(기원전 586년).
오늘 읽은 열왕기하 본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이 멸망하게 된 이유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그 핵심 내용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다른 신들을 따랐고, 이스라엘의 왕들이 만든 종교혼합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멸망의 원인으로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 열거된 이스라엘 자손의 행위들은 전부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소유했고, 해와 달 같은 천체를 숭배했고, 자신의 자녀를 제물로 삼아 의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온갖 사술과 주술을 탐닉했습니다(왕하 17:16-17). 특히 “[그들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지적도 있는데요(왕 17:17). 이는 하나님의 계명이 명하고 있는 사회적 행위, 곧 가난한 이웃과 힘없는 여성들, 그 땅에 몸붙여 사는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은 탐욕과 악행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우상 숭배와 주술로 범벅이 되어 이스라엘 자손의 신앙과 제의가 심각하게 타락하였고, 그 결과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일이 만연한 까닭에 이들의 왕국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삼상 8:7-8)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선택한 이스라엘이, 바로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이 불러올 결말을 모두 내다 보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버리는 이스라엘의 행태는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지와 선견자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을 돌이키게 하려 하셨으나, 그들이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말씀에서입니다(왕하 17:13-14). 그런데, 이 주제는 내용적으로 볼 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와 맞물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을 배신하고 포도원을 차지하려 한 농부들의 행태입니다. ― 한 사람이 포도원을 잘 만들었습니다. 울타리도 두르고, 즙틀도 구비하고, 망대까지 갖췄습니다. 그는 자신의 포도원을 어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나갔습니다. 포도를 딸 무렵 그간의 세를 받고자 종 한 사람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농부들은 세를 주기는커녕 그 종을 폭행하고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역시 때리고 능욕했습니다. 그 후에도 종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 종들을 죽이고, 폭행하고, 내쫓기를 반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보내자, 그 농부들은 포도원을 다 차지하자며, 상속자인 그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져 버렸습니다(막 12:1-8). 이렇게 주인과의 약속을 배반한 이 농부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생각대로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포도원 주인이 와서 그들을 다 쫓아내고, 자기의 종들과 아들을 죽인 책임을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막 12:9). ― 이스라엘 자손의 왕국이 멸망하게 된 경위가 꼭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따르는 왕들 편에 서서,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과 맞섰습니다. 많은 역사서와 예언서가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유다가 멸망하던 당시에 활동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설교가 아래와 같은 하나님의 예고(豫告)로 마무리된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의 모든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렘 7:15)
성서를 주의깊게 읽는 분들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의문이 드실 겁니다. 왜냐하면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초래된 일은, 그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에서 ‘멸망’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서 이방 땅으로 ‘쫓겨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오늘 열왕기하 본문도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왕하 17:23) 이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이 완전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배’를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앗수르의 낯선 땅에 내던져지긴 했지만, 여전히 귀환과 회복에 대한 소망이 남아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이런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멸시를 당하셨으나, 끝내 그들을 버리지 못하셨고, 그들의 조상과 맺으신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주인의 신의를 저버린 농부들에게 어떤 결말이 있었습니까? 살인을 저지른 농부들은 죽음의 판결을 받았습니다(막 12:9). 그 판결대로 그 농부들은 진멸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교훈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시편 기자의 말씀으로 이어가셨습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건축자가 버린 돌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멸시와 폭력에 희생된 그 아들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그 머릿돌에서 시작될 거란 말씀입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남겨두시는 하나님, 버려진 돌을 새로운 역사를 위한 머릿돌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사람의 죄악이 역사의 결론이 되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숙고해야 할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멸망할 자들을 살아남게 하셔서 재생의 계기를 갖게 하시는 하나님, 살인자들의 죄악 가운데서 구원자가 일어서게 하시는 하나님, 이처럼 인자하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아는 데에서 뜻밖의 문제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잘 아는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순적인 일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더라.’ ‘당장은 죄인들을 멀리 내쫓으셔도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더라.’ 사도 바울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인간의 죄악과 그의 비참함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롬 2:4). 우상을 따라가도, 계명을 저버려도, 약자를 괴롭히고, 탐욕을 채워도, 자신은 멸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 그 참되고 올바른 진리를 틈타고 들어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죄악의 뿌리는 아직도 우리 영혼 한켠에 깊숙이 박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죄의 간계를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힘있는 자들의 잘못을 제대로 벌해야 목소리가 높습니다. 중대한 범죄에도 면죄부를 주는 일이 많고, 소위 법기술을 부리는 자들이 제멋대로 법을 왜곡하고, 오용하는 일이 만연해 있다는 위기감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노력에 반드시 결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해소되는 데에는 법제도의 정비를 넘어서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남에게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생기고, 통회하고 뉘우치며 잘못된 것을 회복시키려는 의지가 생겨날 때에라야,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과 제도가 제 역할을 다 한 뒤에도, 인간의 양심의 문제와 영혼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영혼에서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는 세상에서 죄벌을 받고 보속을 치룬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있을 진노를 피하지 못합니다(롬 2:5). 그것은 지금 세상의 법정에 세워진 이들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며(고후 5:10),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은 우리를 가리켜 하신 말씀도 되기 때문입니다(막 12:12; 롬 2:6). 혹시 우리는 하나님 자비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느슨해지는 모순적 상황에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잘못과 죄악에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경험이 도리어 우리를 태만하게 만든 부분은 없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받은 로마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가르치는 까닭을 곰곰이 되새겨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올해 교회력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는 저와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지고, 우리를 구하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로 맑게 깨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