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12:1-14, 요6:48-59,고전5:6-8
오늘은 세계 성만찬주일이며 한가위 감사주 주일, 군선교주일입니다. 또 이번 주는 추석을 비롯해 길게는 열흘간의 연휴가 있습니다.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추석이 풍성한 음식과 풍성한 이야기가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세 본문의 말씀과 함께 이야기가 있는 식탁에 참여하자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가족과 교회가 모이는 일이 줄어드니 이야기도 줄어드는 씁쓸한 풍경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얼굴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작가 정혜윤은 이야기의 힘에 대해 의미있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친구가 어느 날 코스타리카에서 장수거북의 알을 지키다가 납치 살해된 이십대의 환경운동가 자이로 모라 산도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13년 5월의 일이다. 눈부신 해안이 있는 코스타리카에는 많은 거북이가 알을 낳으러 온다, 그러나 그 거북이 알은 음식 재료로 불법으로 거래된다. 거북이 알이 정력에 좋다는 속성 때문이다.
자이로는 납치되던 날도 거북이 알을 보호하기 위해 순찰을 돌다가 밤 열한 시가 넘어서 네 명의 여성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적어도 다섯 명의 총을 들고 마스크를 쓴 남자들에게 납치되었다. 자이로는 다음 날 해변에서 손이 묶인 채 벌거벗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87년생인 그는 사망 당시 스물여섯이었다. 곱슬머리와 커다란 눈망울과 미소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코스타리카 정부는 이 사건을 단순 강도 사건으로 처리하고 밀렵군들을 풀어주었다....
그의 장례식 영상을 찾을 수 있었다. 장례식 때 그의 부모는 말했다. 자이로는 어려서부터 열정적으로 바다 생물을 사랑햇다고. 그의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몇 번이나 경찰에게 거북이 알 밀렵꾼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인원을 보강해달라고 했지만 경찰들은 우리 말을 듣지 않았다. 앞으로 경찰이 우리를 보호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내일부터 모리가 하던 일을 이어서 할 것이다. 우리는 거북이 알을 지킬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모리의 죽음이 헛되게 된다. 이렇게 자이로의 삶은 거북이의 삶속에, 친구들의 삶 속에 녹아들었다, 혹시 어쩌면 나의 삶에도 그렇다. 전에는 거북이 알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았지만 거북이 알 이야기가 삶에 들어오면서 세계가 또 달라 보였고 거북이 알과 연결되기 시작했고 거북이 알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정체성을 주는 것이야 말로 이야기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이제 성경이 들려주는 주의 만찬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그 만찬에 참여합시다. 우리를 새롭게 하고 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이야기 - 여호와의 유월절(출12:1-14)
출애굽기 12장 1-14절은 유월절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애굽에 내릴 마지막 재앙을 앞두고 하나님은 이 사건의 의미를 이야기해주고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합니다.
애굽의 장자에게 내리는 죽음은 재앙은 애굽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재앙으로부터의 구원이요,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만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유월절 규례를 주시고, 무교절 절기를 지키게 하시며, 초태생을 구별해 하나님께 드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기억은 의무이자 정체성의 뿌리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 누룩 없는 빵
고대 이집트에서 빵은 곧 삶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어에서 ‘빵’을 뜻하는 ‘아이쉬(Aish)’는 ‘생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발효를 통해 부풀어 오른 이집트의 빵은 풍요와 문명의 상징이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이집트 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스라엘관광청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부풀지 은 단순한 납작빵을 직접 불에 구워 먹었습니다. 이러한 무교병 요리법은 자유롭고 이동이 잦은 그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토라에는 “이집트인들은 히브리인들과 함께 빵을 먹을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통해하여 이집트 문명과 발효 문화를 떠나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무교병, 즉 마차를 먹게 된 역사적 배경을 보여줍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마차의 전통은 단순한 음식 문화를 넘어서 억압과 통제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적 유산이 되었습니.
세 번째 이야기 - 유월절 어린양 예수(고전5:6-8)
유월절 규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피는 유월절의 핵심 요소입니다. 그 피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집을 넘어가도록 하는 표식이었습니다. 피는 죽음과 재앙이 지나가는 상징이자 구원의 증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유월절 양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곧 그리스도의 보혈이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표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게 하는 도구입니다. 양의 피는 단순한 제물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을 담은 상징적 요소였습니다.
초대교회는 ‘기억의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며 그 기억에 따라 삶의 모든 영역이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은 단지 믿음(Belief)만이 아니라 삶의 행위(Behavior)와 소속(Belonging)까지도 함께 바뀌는 삶의 총체적 변화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권면하였습니다.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음행)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5:6-8)
네 번째 이야기 –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생명(요6:48-59)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을 죽음의 재앙을 넘어갔습니다. 어린양의 고기는 자유와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힘이 되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3-57)
주님의 만찬은 우리에게 이 생명을 주시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마지막 이야기 - 기념하라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기념하라’는 ‘아남네시스(anamnesis)’라는 헬라어의 번역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기억’이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단지 정신적인 회상이 아닙니다. 아남네시스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그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로 연결되며 그리스도께서 그때 하셨던 일과 지금도 계속해서 하고 계신 일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찬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던 그 사건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 안에서 말씀과 행동으로 재현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사건이며 단순한 회상이 아닌 참여하는 기억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므로 주님의 일을 기억하고 새생명의 힘과 기운을 얻어 주의 일에 더욱 힘쓰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