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롬1:8~17, 마8:1-13, 사1:1-8
오늘은 강림 후 아홉 번째 주일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세상의 판도를 크게 뒤바꾸어 놓고 계신 때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성령께서 유대를 거쳐 사마리아를 넘어, 이제는 땅끝에까지 당신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신 까닭이다. 물론 성령이 아직은 광범위하게 날개를 펼치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한 곳에서는 먼저 사람들부터 여태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새 인생을 살기 시작하게 된 일만은 분명하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면서 인간 세상부터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변화의 핵심은 서로 다른 종족과 국경의 철벽같은 장벽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런 놀라운 힘은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의(義)로우신 능력 때문인데, 이는 전통적 유대 사회에서는 기대하기가 쉽지 아니한 현상이었다. 요나서를 보더라도, 유대인의 이방 민족을 향한 오만함과 배타성은 그들 종교에서 얼마나 강고하였는지 모른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께서는 세상 만민을 향한 자비와 긍휼하심이 높고 크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전혀 다른 폐쇄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욘4:1-4 참조). 이런 현상은 바벨론 포로기 체험을 통하여, 그들이 이방인과의 공존과 공생의 메시지를 충분히 몸으로 체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유대인들은 율법 종교란 굴레에서 자기 성벽 쌓기에만 매몰되어 있던 모습과 같다. 이는 조상인 아브라함이 받았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적 사랑의 틀을, 후손인 그들이 완전히 거부하며 살았음을 보여준 모습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제대로 된 하나님 백성의 본모습을 보여주시고자 결단하신다. 그게 바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세상의 구세주로 보내 주신 성탄(聖誕)이었다. 오실 때부터 그는 총체적이고 입체적이셨다. 이 세상과 인간의 규율이나 멍에의 틀에서 아주 자유한 주체로 오셨다. 지극히 높은 하늘과 철저히 낮은 땅 생명체의 축하 속에서 오셨다. 총각과 처녀의 아들의 몸을 빌려서 오셨다. 헤롯이란 유대 권세자의 살해 음모 속에서도 동방박사란 이방 종교(조로아스터교) 지도자의 경배와 이웃인 애굽의 돌봄을 받으며 오셨다. 시므온과 안나란 경건한 노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오셨다. 오셔서 참 자유인, 참 해방자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여주시며 사셨다.
이런 메시아 예수이셨기에, 그의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삶 역시 자유롭고 풍요로우셨다. 율법에서도 자유하셨고, 만나는 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거침이 없으셨다. 상대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죄인이냐 의인이냐, 노인이나 어린이나 모두가 그의 교제와 사랑의 대상이었다. 동족 유대인들이 기피하던 사마리아인들도 사랑하셨다. 그러면서 그런 편협한 굴레에 매여 사는 동족들과는 달리 살도록,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적극 독려하셨다. 의와 사랑과 믿음에서 앞선 부분이 이방인에게 보일 때에는 거침없이 그들을 공개적으로 칭찬하셨고, 그것 때문에 고향 사람들로부터 큰 봉변을 당할 뻔하기도 하셨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런 동족의 반발과 폐쇄적 행태에 개의치 않고, 모두의 공의와 정의와 사랑에 부합할 수 있는 행보를 일관되게 견지하셨다. 바로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불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주님은 그런 행보를 끝까지 고수하셨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 모두를 살려낼 수 있는 생명과 진리의 길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바로 그 잔을 마시게 독려하기까지 하셨다. 그게 바로 십자가(十字架)였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그 길을 목숨 걸고 고수하신 아들 예수의 죽음을,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만드신 하늘 아버지의 능력이다. 그 시작은 죽은 당신의 아들 예수를 다시 살게 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그 부활체(復活體)를 제자들에게 보여주게 하시면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그 예수의 길과 삶을 쫓는 자들에게 구원이 있고, 또 믿고 선택하는 자들은 누구나 예수처럼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살게 된다는 점을 온 세상에 전파하게 하셨다. 이를 위해 성령을 보내셔서 그런 증언을 믿고 따라 살겠다고 모인 공동체인 교회들을 온 지구촌에 세우기까지 하셨다.
이런 연고로 부활의 예수가 전한 복음이 들어와 전파되기 시작된 곳에서는, 나와 다른 종족이나 계층이나 성별이나 신분이란 높은 장벽들이 아주 쉽게 무너져 내렸다. 곧 예수를 구세주로 믿은 그 믿음 안에서와 그의 이름을 의지하고 사는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하늘 백성이 되고 영원한 가족이 되어, 서로 다름보다는 같음을 선택하면서, 어려움이 없이 서로 하나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거룩한 모임에서 서로는 하늘나라를 맛보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기에, 예수와 함께 진정한 새 인간, 새 인류, 영원한 나라 백성의 삶을 공유하고 싶은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먼저 믿고 받아들여서 사는 삶이다. 곧 믿음이 결정적인 통로요 매체라는 말이다. 이 믿음의 통로 없이는 예수와 나는 아무런 관계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은 그 예수의 백성으로 살려는 모든 이들에게, 그를 향한 온전한 믿음 위에 설 것을 뜨겁게 강조한다.
먼저 복음서는 그런 열린 삶을 친히 펼쳐 보여주신 메시아 예수의 본모습을 제대로 소개한다. 예수께서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배척당하고 살아온 자들을 왜 그토록 영접하고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생생히 알려준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그들의 믿음 때문에, 가장 더러운 질병인 나병환자와 당시의 배척 대상인 이방인 로마 장교인 백부장의 간구를 모두 예수님이 용납하면서, 그들에게 치유의 능력을 베풀어 주셨음을 전해준다.
서신서의 주인공 사도 바울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해외 성도들인 로마교회 가족들을 만나게 될 일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득한 마음을 전한다. 그는 이미 예수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하여, 자신이 온 세계인을 향한 복음의 빚진 자임을 고백한다. 상대가 누군지 상관없이, 오직(from first to last)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음만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 바람에, 그의 입에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롬1;17)라는 불별의 칭의론(稱義論)이 뛰어나오기까지 하였다. 후에 이 선언은 종교개혁의 모토가 되었고, 개혁교회의 구원론의 핵심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구약 이사야서는 배경이 전혀 다르다. 당시의 유다 왕들을 비롯하여 거의 전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망각하고, 여호와가 보시기에 범죄의 왕국을 만들어 놓았다. 각종 범죄로 배신과 패역과 부패로 여호와를 버렸다. 하나같이 온 백성이 몸과 마음이 병들어 패역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완전히 버림당할 상황에 부닥쳤음을 보여준다.
1. 서신서 / 롬1:8-17 / “ 먼저 내가 —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기 56년경에 보낸 편지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매우 보고 싶어 하며(8,13-15절), 만나서 그들과의 선교 협력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을 가득히 전한다. 그곳엔 이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유대 출신 성도들은 물론, 이방인 출신 성도들도 많았다. 그것은 49년에 있었던 로마로부터 추방되었던 유대인들이 그곳 지중해 해변에 흩어져 지냈다가, 54년의 해제령을 받고 다시 돌아올 때, 이미 예수의 복음까지 받아서 돌아오게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 바울은 이미 로마 정부의 추방령을 받아 고린도에 와 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하여, 로마교회와 성도들의 사정을 상당히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행18:1-4 참조). 이들 부부는 추후에도 바울 일행의 로마교회 접촉과 바울 영접에도 상당히 이바지했으리라고 본다.
2) 바울은 그런 로마 성도와의 만남을 소망하며, 그를 위해 늘 기도해 왔다(9-10절). 그의 마음에는 이미 부활의 예수께로부터 받은 <세계인을 품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인이 모인 국제도시 로마는 바울에게는 매우 가슴 설레게 하는 곳이었다(14절). 그들에게 당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전달하고, 그들과 세계 선교의 협력의 장을 펼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모두에게 빚진 자’라고 규정한 표현은 그 증표이다.
3) 여기서 바울은 거침없이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복음의 실체와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펼쳐 보인다(15-17절). 그가 전하고 싶은 복음은 세계 사람 그 누구에게나 구별이나 차별 없이 들려주고 싶고, 안겨주고 싶은 것이다(16, 상). 그 까닭은 그 복음은 믿는 자라면 그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16,하).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 등의 차별 없이-, 믿음으로 나오는 자라면 그 누구나 그 빛을 받게 되고 은혜를 입게 되며 새 생명의 물결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참 하나님의 의(義)를 맛보기 때문이다!
4) 바울은 선포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절). 이 선언의 기반은 일찍이 선지자 하박국이 선포한 내용에서 기인한 것이지만(합2:4 참조), 바울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예언에 나타난 믿음의 주가 바로 예수이심을 확인한 후에 더욱 강하게 선포했다. 곧 오직 예수를 향한 믿음만 가지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는 세상, 믿음만으로 처음과 나중이 일관성 있게 하나가 되는 세상이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2. 복음서 / 마8:1-13 /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
복음서의 내용은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이 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을 그렇게 외쳤는지를 입증하는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는 곳이다. 곧 그 믿음의 주체가 나사렛 예수라는 점만을 부가(附加)한다면, 바울의 그 선언은 진정으로 참되다고 확언해 줄 수 있는 곳이란 말이다. 두 사례들이 나오는데, 둘 모두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죽게 될 그런 병자들인데, 놀랍게도 그들 모두는 예수를 향한 확실한 믿음을 보여주면서, 그 절망적인 질병의 질곡에서 해방을 받았기 때문이다.
1) 예수의 은혜를 입은 첫 사람은 나병환자였다(1-4절). 그는 수많은 무리가 따라오는 중에 계신 예수 앞에, 전격적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하며 고하였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자기는 주님의 선하심과 그의 능력을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차원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에 감동하신 주님이 그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그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언하셨다. 그러자 그 즉시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았다! 그의 믿음대로 된 것이다. 주님은 추가 서비스까지 해주셨다. 곧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레14:2). 그의 공민권 회복으로 인한 인생의 완전한 새출발까지도 이루어지도록 이끌어 주셨다.
2) 예수의 은혜를 입은 또 한 사람은 가버나움에 주둔 중인 로마의 백부장이었다(5-10절). 그의 요청은 자신의 문제가 아닌, 자기 집 하인의 문제 때문이었다.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데, 주께서 고쳐 달라는 요청이었다. 실로 이 모든 게 파격(破格)이었다. 주둔군의 장교가 피지배층 랍비인 예수께 찾아와 간구하는 일이나, 그것도 대상이 자기가 아닌 하인의 고통을 해결해달라는 것 모두가 파격이었다. 게다가 ’가서 고쳐 주겠다‘고 나서는 예수님에게, ’다만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라면서, 그가 예수의 오심을 애써 말리고 나왔기에-, 이것 또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놀라운 믿음의 행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예수님은 그런 백부장의 믿음의 언행에 커다란 충격과 함께 깊이 감동하시면서, 이렇게 고백하셨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이삭-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선언하셨다. 이방인 장교의 믿음에 놀라신 주님이 동족 유대인들의 천박한 믿음 없음에는 깊이 탄식하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어느 족속이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여부로 결정될 것을 밝히셨다. 그러면서 그 백부장에서 선포하셨다. ’가라 네 믿는 대로 될지어다‘(13절). 그 즉시 하인이 중풍병이란 치명적 질병에서 나음을 받아,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다.
3. 구약 / 사1:1-8 / ”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을 나를 거역하였도다 —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 “
본문의 배경은 앗수르 임금 산헤립에 의해서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대의 전 영역이 정복되어 만신창이가 된, 기원전 701년 경의 상황이다. 선지자는 이런 현상이 전적으로 유대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온갖 패역과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심판이었음을 지적한다(7-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식처럼 양육하고 키우셨는데, 그들은 그 어버이의 은혜를 무시하고 온갖 행악에 빠져서, 결국은 거룩하신 여호와로부터 징벌을 받아 그렇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처투성이의 매를 맞게 된 망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신21:18-21 참조).
결국 본문은 하나님은 자식처럼 키우신 백성에 대한 의무는 이행하시지만(2절), 그럼에도 그 관계를 악용하고 무시하며 거룩하신 이를 모독하는 자들에게는 중죄로 다스리시는 분이심도 분명히 밝혀주셨다. 감사하지 못하고 믿음을 저버리면, 용납되지 못함을 알리셨다. 이런 모습은 예수 때에 더욱 두드러지면서, 결국 그들은 나라 없는 오랜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o 다시 명심하자. 피조물은 조물주와의 기본적인 철칙(鐵則)이 있다. 바로 조물주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모습이다. 처음도 믿음이고 마지막도 믿음이어야 한다. 그런 기본 관계만 확고히 보전하고 유지되면, 그는 다소의 부족과 실패나 흔들림도 그리 큰 문제가 못 된다. 오히려 그런 일로 인하여 조물주의 돌보심과 도와주시는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더욱 두텁게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