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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6-07-15 (수) 07:47 1시간전 4  

본문) 계11:15-19, 사32:1-4,16-18, 눅22:24-30


오늘은 강림 후 여덟째 주일이다. 날씨는 한여름 무더위의 절정에 이른 느낌을 줄 정도로 덥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저 먼 유럽과 미국의 형편에 비하면, 그래도 훨씬 양호한 편이다. 그들은 여름 무더위에 익숙지 않아서, 오랫동안 에어컨 시설도 갖추지 않고 살아왔던 터라, 이번의 근 40도 이상의 계속되는 폭염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야 그들은 에어컨 설치에 목을 맬 정도라는 데, 그런 점에서는 사계절 변화가 뚜렷하여 오래전부터 에어컨 문화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그들보다 크게 여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유사한 일도 또 있었다. 이 대통령의 몽골 국빈 방문에서 보여준 놀라운 모습 때문이다. 몽골은 지정학적으로 북으로는 러시아와 남으로는 중국이란 대륙에 휩싸여 있는 나라이며, 바다와도 전혀 입접한 곳이 없는 나라이다. 인구는 대략 300만명 대에 불과한 곳인데, 그 크기는 우리나라의 13배 이상으로 크단다. 그러면서도 각종 지하자원은 무진장하다. 특히 일찍부터 남북한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지내고 있어서, 그 점 또한 관심할 상황이다.


우선 외국인에 대한 몽골인들의 호감도가 놀랍다. 최인접국인 중국의 8% 정도에 비하여, 우리 한국에 대하여서는 국민의 80% 이상이란다. 자기 나라의 미래를 우리 대한민국에 의존할 정도라고 한다. 제1외국어가 한글이고, 그것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한글 배우는 수준이어서, 그들의 한국어 구사 수준은 매우 우수하다고 한다. 현재 약 5만명의 몽골인들이 한국에 체류 중이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한국화된 곳도 현재의 몽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두 나라의 좋은 관계가 형성의 이면에는, 이미 70여년 전에 이태준이란 독립운동가이면서 의사였던 우리 선조가 그곳 몽골에서의 헌신적인 삶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다. 그의 기념관이 수도 울란바토르에 크게 세워져 있을 정도여서, 이번 우리 대롱령도 그곳을 찾아 헌화하기까지 했다. 실로 한.몽 두 나라의 황금시대를 열어가는데, 그런 훌륭한 한 알의 밀알이 되셨던 그런 어르신의 씨 뿌림이 있었음을 우리는 깊이 주목해야겠다. 


마침 오늘 우리가 받게 된 세 본문에는 서로 차원이 다른 두 나라, 두 세계가 대조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세상 나라이며, 다른 하나는 머잖아 우리가 대면하게 될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이다(계11:15). 또 하나는, ‘서로 누가 크냐’라는 주제를 놓고서, 앉아서 대접받고 먹고 즐기며 사는 사람들의 세계와 그런 사람들을 섬기고 대접하며 사는 사람들의 서로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자들의 세계이다(눅22:27). 


그러면서, 구약 이사야 예언서는 놀라운 새 지평이 펼쳐지는 세상이 도래할 것을 예견한 내용을 전한다. 그것은 당시의 모든 왕들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한 왕이 오셔서 지배할 새 나라이다(사32장 참조). 그는 자신의 나라와 백성을 오로지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로 다스리셔서, 그 나라에는 평화와 안전이 자리한 세상이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그러면 그가 누구일까? 나사렛 예수, 곧 모퉁잇 머릿돌로 오신 그리스도가 분명하다(엡2:20-22,욥38:6,시118:22,사28:16,마21:42,막12:10,눅20:17,행4:11,벧전2:6-8,계1:17,21:6 등). 


왕이시되, 섬기러 오신 왕으로서, 강자와 약자, 이곳과 저곳을 갈라치기 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모두를 하나 되게 하셔서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돌보게 하는 그런 통치자이셨기 때문이다. 자신은 창조주와 아들로서 만민의 통치자이신데에도 불구하고, 바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시면서, 모든 죄인을 하나로 묶어 구원의 세계를 열어 주려 하신 분이 바로 그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를 접하게 되는 순간, 저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처럼(행9장), 차원이 다른 존재와 세계를 맛보게 되면서 변화를 받아,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교회와 제자들은 그런 그를 만난 자들의 신령한 경험 공동체요, 그 체험을 전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섬기는 까닭도 결국엔 그분이 계신 곳에 나도 그의 백성으로 영접받게 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최대한 통제하고 분별하면서, 머잖아 그의 나라와 세계를 상속받게 될 것에 대한 대비를 잘하고 살아야 할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말씀들은 그날 그때 그의 영광스런 백성의 일원으로 들어갈 요인이 무엇인지 전하고 있음을 주목하며, 잘 배우고 익혀야 하겠다. 


가장 두드러지게 우리의 시선을 모으는 대목은 계시록의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18절)라는 대목이며, 복음서에서의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7절)라는 예수님의 자기 증언이고, 에언서에서의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16-17절)는 선지자의 외침이다. 그 까닭은 이런 내용들 없이는, 우리가 그의 나라의 영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이 세상의 삶의 지평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 곳들이다. 


1. 서신서 / 계11:15-19 / ”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


하늘에 초대받은 요한이 본 마지막 장면은 인간 세상이 주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대 변화가 발생한 모습을 목격한 것이었다. 이는 질량(質量) 면에서의 완전한 변혁체(變革體)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거듭난(?) 상황에 들어갔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때 드러난 놀라운 모습들 세 가지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본다 : 


1) 주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왕 노릇하신다(15절). 그 바람에 보좌에 앉아 있던 24장로가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친히 큰 권능으로 왕권을 행사하시는 일에 감사를 드린다(16-17절). 


2) 이때 주 하나님은 심판을 행사하시는 데,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당신의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크고 작은 자들 가운데에서 주의 이름을 경외(敬畏)하는 자들에게 상(賞-보상)을 베풀어 주신다. 동시에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땅을 망치고 파괴한 자들에게는 완전히 멸절하신다(18절). 


3) 그러면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는데, 그 성전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시하는 언약궤(the ark of his coverant)가 보이고, 그의 권능을 행사하는 도구인 번개, 음성, 우레, 지진, 우박 등이 있었다(19절).


이런 모습은 머잖아 우리가 맞게 될 그 나라의 모습이기에 크게 주목해야 한다. 먼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부터 철저히 나의 왕으로 섬기며 살고, 나는 그의 백성으로 사는 인생이어야 한다. 동시에 주의 이름을 경외하며, 그의 창조하신 세계의 보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주의 성전 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그의 임재를 계속 경험하고 그의 능력을 누리고 맛보며 살아가도록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꾸준히 살아가야 한다.


2. 복음서 / 눅22:24-30 / ”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예수를 모신 제자 생활 삼 년에 들어선 제자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하고 지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범상치 않은 스승 예수님의 미래의 위상에 걸맞을 제자인 자신들의 지위 문제가 포함된 생각들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과연 우리 가운데 누가 큰 자가 될까’라는 점은 제자 공동체의 내분(內分)을 격화시킬 수 있는 매우 휘발성을 가진 내적 주제였다. 그런데, 바로 그 우려했던 일이 발생해서 다툼까지 일어났다(24절).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의 영광의 때가 오면, 자기들을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특청을 예수께 드리는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마10:35-37 참조). 


그러자 상황을 즉각 파악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의 다툼에 바로 개입해 들어오셨다(25-27절). 그때가 바로 ‘하늘 백성의 진정한 리더십 교육이 필요한 때’로 보셨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힘겨누기는 자기들 자율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임도 잘 아셨다. 사실 남자들은 두 사람만 모여도 ‘누가 세냐’라는 힘의 질서에 답이 나와야 평화가 오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1) 이때 주님의 교육은 세상 일반의 교육방식 소개와 제자 공동체 안에서 당신이 취하시는 교육의 모델을 잇달아 소개하시면서, 그 차이와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그 중에서 보다 좋은 것을 취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셨다(25-26절). 

 

세상은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주관하는 것을 당연시하거나 그들의 은혜로 백성들이 살아간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25절-곧 은인(恩人사상이다). 하지만 제자 공동체에서는 큰 자에 대한 인식이나 다스리는 자에 대한 세상의 것과는 크게 다르다. 큰 자는 젊은이처럼 많이 일하고 봉사하는 자이며, 다스리는 자는 그만큼 섬기며 일하는 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의 민주주의에서의 리더십에 버금할 수준의 내용이랄 수 있다. 


2) 결국 예수께서는 자신의 리더십 실체를 소개하셨다(27절). 그것은 앉아서 가져다주는 것을 먹는 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먹도록 그들을 제공하고 섬기는 형의 리더십이었다. 곧 모두의 노예(slave of all)요 종(servant)의 형태를 보여주진 리더십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의 생활에서 자주 식탁 봉사를 떠맡으신 것으로 알려졌다(막10:42-25, 요6장 참조). 십자가에서의 모든 죄인을 위한 제물(as a ransom for many)로 고난당하신 모습은 그의 리더십의 절정이며 핵심이기도 하다. 


3) 승천(昇天)을 앞둔 예수님은 당신의 리더십이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어, 세상을 섬기며 살리는 주역들이 되기를 원하셨다(28-30절 참조). 그래서 제자들이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까지도 함께 살게 될 가족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려면, 그들 역시 스승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의 양태의 변화도 무릎 쓰려는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하고, 온갖 모욕과 고난도 통과해야만 했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수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며, 동시에 다스림의 권세까지도 행세하는 존재가 될 것으로 보셨다. 


3. 예언서 / 사32:1-4, 16-18 / ”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 


유대가 앗수르 제국의 침략 앞에, 애굽과에 동맹을 맺어서라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려고 하자, 에언자는 그런 강대국 의존의 행태를 절대 중지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담대히 의지하라고 외치며 고군분투(孤軍奮鬪)를 하는 때(사30장 참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이사야에게 매우 놀랍고도 황홀한 미래에 나타날 평화의 비전 하나를 보여주시면서, 외치게 하신다. 


그 내용은 ‘장차 한 왕(王)이 공의(公義)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은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 이 공의의 열매는 화평(평화)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平安)과 안전(安全)이라’는 내용이었다(1, 16-17절). 이는 지상 나라의 통치 방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기법으로서, 인간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지만, 그게 쉽지 않기에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방식이다. 공의란 본래 선악을 공평하게 제재(制裁)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성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공의와 정의가 통치 기법으로 자리 잡으려면,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통치자인 왕 자신이 자신에게 집중될 수 있는 모든 이익과 힘에 대한 포기와 희생이다. 그래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공의와 정의를 펼치는 정치가 가능하다. 그런 올곧고 정직한 지도자의 자기 포기를 확인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의 지시를 추종하며 따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런 완벽한 왕을 만나게 하리라고 하나님이 예고하셨는데, 그가 과연 누구일까?


바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저 마구간에 탄생해서 아기로 오신 나사렛 예수이시다. 가난한 목수인 다윗의 혈통인 요셉의 아들로 오셔서 당신도 목수로 가난한 자로 사신 예수이시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물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에서 내려주신 비둘기 같은 성령의 세례도 받으셨던 예수이셨다. 그의 전 공생애를 모퉁잇돌의 사역을 펼치시면서, 이 세상의 죄인들과 원수들이 서로 화해하고 하나님과도 화해하고 지내도록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놓으신 바로 예수이셨다. 진리의 왕이요 사랑의 주시오 평화와 용서의 주이신 예수이셨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원한 구세주가 되신 그 그리스도이셨다! 


그러기에 그를 주님으로 믿게 된 이들에게는 그가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고, 폭우를 가리는 곳 같으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을 것이다(2절). 눈을 뜨게 해 주는 자요, 귀를 기울이게 하시는 자이며, 마음에 지식을 깨닫게 해주는 자요, 어눌한 자의 혀가 분명하게 말하게 하는 이가 되게 하신다(3-4절). 진정한 하늘 생명이 되게 된다. 


o 지금의 우리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인 이 세상을 살고 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해서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조물주 하나님으로 인하여 뜻을 갖고 주어진 생이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기에 어느 누구 예외 없이, 우리는 머잖아 그가 다스리시는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생을 결산(決算)하게 될 그 순간을 맞게 된다. 새 하늘과 새 땅에로의 이주할 그날과 그때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러기에 결코 함부로 살아도 될 우리의 생이 전혀 아니다. 


우릴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외하는 삶이어야 한다. 창조 질서 보전에 힘쓰는 그의 신실한 종들이어야만 한다. 허황된 욕망을 버리고, 종과 머슴의 미음으로 모두를 섬기는 신실한 주의 일꾼의 삶이어야만 한다. 그게 예수의 삶이었기에, 더욱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머릿돌 예수의 마음으로, 모두를 품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어야 한다. 미움과 다툼이 아닌 평화와 화해의 일꾼으로 살아야 한다. 그에게 그 문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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