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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성서주일-인권주일

관리자 2025-12-10 (수) 09:49 8시간전 6  

본문) 사62:10~12, 요1:19-28, 히11:32-12:2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겨울다운 날씨가 연속되면서, 감기와 코로나 등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모두들 몸과 마음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겠다. 지난 주간은 작년 12.3 내란 1주년을 보내면서, 국내에서는 그때의 흔적과 그로 인해 남긴 의미를 다양하게 새겨보는 시간들이 있었다. 크게 보면, 모두가 우리나라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보우하심의 결과물이었지만, 동시에 그 순간순간마다 깨어 있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저항(抵抗)의 결과물이었음도 분명했다. 


역사란 어느 개인만의 독점이나 영웅적 행동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들여다보면, 그런 특출(特出)한 인물이 등장하기까지 그 앞선 이면(裏面)에서는 이미 그를 위해 씨가 되고 밀알이 되며, 땀과 피가 되어 거름과 토양을 제공한 인물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바로

그런 면 때문에, 작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 한강이 이렇게 증언하지 않았던가! 곧 ‘과거가 현재를 살리고 구원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깨우고 살린다’라는 등등의 증언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역사와 인권을 말할 때는, 그 겉으로 드러난 면모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런 놀라운 역사의 등장을 견인게 한 배후의 주역들과 요인들을 함께 주목하며 평가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 이유는 그런 시각에서 본 역사라야, 우리는 비로소 매우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관을 갖게 되고 현재도 볼 수 있게 되며, 또 그 바탕에서 다가올 미래까지도 적절하고도 적확(的確)하게 예측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침, 금년의 성서주일과 인권 주일을 함께 지키는 때이다. 성서와 인권을 함께 지키는 일은 매우 의미가 크다. 왜 그런가? 사실 인권(人權)은 천부(天賦)의 것이다. 곧 인권은 조물주 하나님이 부모를 통하여 한 인간을 이 세상에 살도록 지어 내보내실 때부터,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리며 살도록 필요한 제반 권리로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인간에게 부여된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그게 성서의 본질적 가르침이기도 하다. 


문제는 인간이 그렇게 보유한 인권을 제대로 존중하고 지켜내는 방법이 무엇이냐에 있다. 그를 위하여 어느 특정 인간을 모델로 선정하면서 그를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거나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그런 방법은 그가 속한 개별 공동체 안에서는 통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전혀 다른 환경과 전통과 가치관을 가진 공동체에게는 전혀 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진리로 간주 될 수 있는 경우는 더더욱 힘들다. 


그런 점에서 인간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내려주신 말씀과 계명이 절대 필요하다. 그 까닭은 그의 말씀은 시공(施空)을 초월해서 우리 인간(인류)들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서든 공감(共感)하며 의지할 수 있는 진리(眞理)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의 가르침은 특정 종족에만 매이지 않았고,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지도 아니하며, 온 세계 만민이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면서 의지할 수 있어서, 누구든 믿음으로 수용하기만 하면 그의 생애가 온전한 인권과 생명을 보장받게 되고 종국에는 구원과 영생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올바른 신학이 전제(前提)되어 있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말씀들이 제대로 전달될 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구약과 복음서와 신약으로 형성된 성서를 편파적이 아니라 균형 있게 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한 부분만 붙잡고, 그 내용이 성경 전체를 대변하는 양 외치는 한, 우리는 언제든 몸의 한 부분 지체만을 붙잡고 그게 그 사람의 전체라고 외치는 사례와 같이, 나락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의 한국교회 전반이 바로 이 함정 속에 깊이 빠져 들어 있잖은가? 


반면에, 건강한 삼위일체론적 신학을 좇아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게 되면,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삼위(三位)를 제대로 만나게 되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구원할 수 있는 지름길을 만난다. 그리고 성경을 제대로 된 삶의 길잡이로 활용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

간에게 부여하신 인권의 실상도 제대로 찾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에 지금이라도 한국교회 강단은 한 본문의 함정에서 빨리 벗어나서 세 본문 설교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여건 속에서 오늘 우리는 세 본문 말씀을 받게 된다. 결코 소화하기 쉽지 않은 내용의 말씀들이다. 하지만 본문의 핵심 부분만 제대로 붙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큰 은혜와 각성을 받게 될 내용이기도 하다. 


말씀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에 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미 오셨던 분이었지만, 그러나 머잖아 우리에게 다시 오실 분이시다. 그는 우리가 앞으로 꼭 도달하고자 목표로 삼고 있는 곳에 이미 도달해 계신 분이시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사람들을 온전케 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시고, 매우 특별한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곧 아직 지상에 머물면서 연약한 믿음으로 그 나라 상속자가 되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우리를 다양하게 돕고자 하신다. 


사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뵐 수 있는 지금의 우리는 이전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에 비하면, 정말 큰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예전의 그들은 정말 약속의 말씀 이외에는 증거될 것이 없을 정도로 깜깜한 미래를 상대하여 치열하게 산 분들이었고, 그 약속을 현실로 받기 위하여 정말 숱하게 고생과 외로움과 억압들과 씨름하며 지내왔던 분들이었는데-, 지금은 우리는 예수라는 구체적인 믿음의 실체와 완성된 모습과 미래에 부여될 구원과 영광에 대하여, 미리 보고 믿으며 뒤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점을 우리는 지극히 감사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을 성찰한다. 구약 이사야서에서는 바벨론에서의 포로기를 마감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맞이하고자 온 백성들이 길을 닦으며 영접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받은 내용이다. 그때 그 지시에 따르면, 

그들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영광과 명예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세례 요한을 통한 물세례 운동을 보면서, 이해가 부족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도 아닌 자가 물세례 운동을 펼치는 일을 공격하지만, 정작 당사자 요한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예수님이 이 땅에 전해 주실 성령 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기대감에 충만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서신서의 히브리 기자는 그동안의 신구약 전반의 신앙사에서 보여왔던 믿음의 위인들이 보여준 신앙의 다양한 면모(面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이룬 것과 미치지 못한 부분도 짚어 주고, 그러기에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지금 이 땅에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대비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방향 제시해 준다. 


1. 구약 / 사62:10-12 / “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修築)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旗幟)를 들라 ”


새 역사를 맞이하고 이루려면, 그만큼 수고와 헌신이 필요함을 말한다. 떠나간 이들이 대거 돌아오고, 무너진 역사와 세상을 새롭게 구축하게 되는 순간인데, 어찌 그를 밑받침할 대가(代價)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특히 그 대역사를 주도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거기에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고, 거기에 걸맞은 보상과 상급이 따르게 된다. 동시에 신분상에도 새로운 상승이 이루어지면서, 정체성 수립에도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제3)를 통하여, 하나님의 그러한 놀라운 계획이 본국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통보된 내용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마치 버림당한 족속처럼, 기운을 잃고 나락에 빠져 지내온 자들이었는데, 지금 선지자의 통보를 통하여 매우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과 통보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 통보를 확실히 믿기만 하면, 그들 모두는 그 순간부터 전혀 새로운 존재들로 거듭날 수 있게 될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자. 


1) 그들에게 하달된 명령은 먼저 성문(城門)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10절). 특별한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로 되어 떠나간 동족들이 이제 큰 기쁨 속에 귀환하여 돌아올 터인데,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우선 길부터 정비해야만 했다. 잡초로 무성해진 길목과 걷기에 불편해진 자갈밭부터 평평하게 해야만 했다. 그 길은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큰길(하이웨이)과 대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무너진 길을 수축(build up)해야 했다. 동시에 안내판인 기치(banner)도 내 걸어야만 했다. 


☞ 이런 안내자와 봉사자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사는 신앙인의 자세이다. 그런 명령을 듣고 믿음을 갖고 나아가, 길을 내고 열며 맞이하려 할 때, 새 역사는 그들 것이 된다. 자신의 소중한 땀과 피와 눈물의 씨앗을 뿌리러 나아간 그들이다. 자기들에게 열릴 축복의 대로를 깨어 준비하는 자들이다. 이런 신앙인의 진지한 헌신으로 그 나라는 열린다.


2) 그런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은 하나님과 그가 베푸신 다양한 선물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11절). 첫째는 구원(救援)이다. 앞선 이이신 왕이시고 목자이신 여호와를 영접하기 때문이다(슥9:9). 그리고 영육 간의 다양한 상급(reward)과 보상(recompense)도 제공받는다. 


3) 그뿐 아니다. 존재를 위한 신분 상승(上昇)의 복도 주어진다(12절).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란 구별된 신분이 부여되고, 여호와께서 ‘구속(救贖)하신 자’란 구별된 존재로 인정도 받는다. 또한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받지 아니한 성읍’이란 성별 받은 존재도 된다. 


2. 복음서 / 요1:19-28 / “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분문은 당시 국민적 관심을 모은 세례 요한의 역할을 놓고, ‘그가 과연 누구냐’, 특히 혹 ‘온 백성 모두가 고대하던 메시아냐 아니냐’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요한 당사자 사이에 벌어진 토론의 내용이다. 당시 요한의 행동들은 온 백성의 시선을 끌

어 모을 만큼의 강력한 영성을 가진 메시아적 사역의 면모를 폭넓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요한은 광야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죄의 회개와 다가온 천국 맞이를 주제로 강력한 예언을 발하고 있었다(마3장). 아울러 죄 회개한 징표로서 요단강에서 대규모 물세례도 베풀었다(막1장). 거기에는 예수께서도 오셔서 세례를 받기도 하셨다(막1:9). 회개한 자들의 청빈과 나눔의 삶도 제시하였다(눅3:12-19). 특히 집권자 헤롯왕이 제수(弟嫂) 헤로디아를 차지한 일을 책망하기도 하는 일(마14장)들이 백성들에게 메시아 고대에 대한 기대감을 깊이 품게 했다.


하지만 당사자 요한의 답변은 명확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20절). ‘엘리야나 선지자도 아니다’(21절). 다만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다’(23절).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물세례는 회개의 징표(徵表)일 뿐이며 진짜 세례는 자기 뒤에 오실 분이 

베푸실 성령과 불세례임을 전하며, 자기는 그분의 그 세례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다’는 심정을 드러냈다(25-27절).


☞ 세례 요한은 우리가 어떻게 오실 주님을 기다릴 건가에 대한 표본적 답변을 제공한 자이다. 죄의 회개 운동을 통하여 주님 맞이의 장벽을 헐어내고, 그런 거룩한 행위를 취한 징표로서의 물세례 예식을 정착시켰다. 그로 인해 지구촌엔 수많은 물세례자들이 등장했다. 그런 자들에게 결국 주님은 인간 내면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실 성령과 불세례를 주신다. 


3. 서신서 / 히11:32-12:2/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히브리서 기자는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증거가 될 만한 믿음의 선진(先進)들의 모습을 열거한다. 그들은 예전에 당대에 매우 놀랍고도 당찬 믿음의 모습들을 다 보여준 인물들이었다.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였고, 의를 행하기도 했으며, 약속을 받기도 하였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했고, 칼날을 피하기도 했으며, 전쟁에서 이방 침략자들을 물리치기도 했다(33-34절).


여자들은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기도 했고,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들도 의연히 받아 드렸다. 조롱과 채찍질, 결박과 투옥되는 시련, 돌 맞는 일이나 톱으로 절단당하는 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나 가축의 가죽옷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는 

일도 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광야, 산, 동굴, 토굴에서 유리하기도 했다.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는 모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인의 표본들이었다(35-38절). 


이들 신앙의 양상들은 모두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것을 받게 될 증거(증표)들이다(40절). 이 증표를 가진 자들은 이제 어떻게 앞날을 대처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들은 아직 자신들이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 상태임을 알고, 최후의 약속된 것을 받기까지 묵묵히 감내해야할 일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나아가면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인 예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히12:1-2).


왜 그래야 하나? 오직 그만이 믿음의 창시자요, 인도자이며, 완성자임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 누구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으나 오직 그만이 이미 목표에 도달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보좌에 앉으셔서,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사람들을 온전케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시고, 그에게 오려는 자들을 돕는 분이기 때문에, 그게 우리가 오직 그만 바라볼 이유이다. 


o 주의 오심이 가까웠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내 신앙의 현재가 구원과 명예를 얻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을 각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동시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그 지점에 이미 가 계심을 알아야 한다. 주 계신 곳인 그곳에 도달할 길도 보인다. 이것이 그 나라의 길과 문과 생명의 열쇠 되신 유일한 분 예수를 사모하고 갈망할 이유이다. 부디 그의 문을 열고 길을 닦으며, 기치와 나팔을 불며 그를 맞이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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