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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종교개혁기념주일, 이단경계주일

관리자 2025-10-22 (수) 10:15 8시간전 4  

본문) 삼상 8:1~22, 마11:16-24, 롬7:7-13 


오늘은 창조절 여덟째 주일이다. 연일 계속되는 비에 우리의 산천초목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잊은 듯하다. 제주에서 들리는 소식을 보면, 벚꽃이 피거나 여름에 피는 꽃들이 피기도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곳 서울도 단풍 계절이 본격화되어야 할 때이지만, 길가의 초목들은 쑥갓을 비롯한 여름철에 번성하는 식물들이 가득할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이미 찾아온 가을 날씨의 영향을 받아 수명을 다한 낙엽들로 거리가 어지럽기도 하다. 어찌 날씨만 그런가? 우리의 삶 자체도 중심 잡기가 난감한 현상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의 삶에 관련된 모든 영역에 얽힌 제반 현상들도 이런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취할 것이나 보는 것이 오직 하나뿐이거나 한 길뿐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만, 선택할 여지가 넓거나 많다 보니, 분별력(分別力)이 절대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택하고 취하느냐에 따라서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담 부부의 불행도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냐, 뱀의 유혹이냐’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뜻을 반하는 입장을 취했기에 그렇게 비참해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더욱 그렇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창조주요 조물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고, 그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 된 축복을 받은 무리들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일차 기본은 승리한 인생들이다. 이 낙원과 같은 구원과 은혜의 켐프 생활 영역에서 들어와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보호를 위해 주신, 딱 하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도 함께 받았다. 그게 무엇이었나? 


바로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5-17)는 말씀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이 말씀을 호기심 차원에서 받는 경향이 있다. ‘대체 어떻게 생긴 열매인데, 따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는가’라는 상상을 갖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 열매의 모양새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엄중한 경고의 말씀만 올려놓았다. 그 이유는 무얼까? 바로 그 주의(注意)로 주신 말씀 자체가 선악과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하지 않으면 되고, 그 외 자유를 주신 것은 마음껏 즐기며 살면 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예’와 ‘아니요’를 제대로 하며 살라고 명하신 말씀과도 상통한다(마5:37 참조). 곧 말씀에 순종하고 순복하는 모습 그 자체가 바로 에덴의 삶을 누리며 살게 되는 일이고, 동시에 주변에서 엿보는 뱀의 유혹으로부터 시험을 이겨내는 일이다. 그렇다.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흔들림 없이 지켜 사는 일이 승리의 열쇠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대응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뜻과 의지를 선택한 행동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세 본문의 내용 모두도 그런 아담의 후손들의 그런 어두운 그늘에 있는 모습을 투영해 준 내용들이다. 곧 모두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뜻과 욕망에 빠져들면서 발생한 가슴 아픈 현실들에 대한 아픔과 슬픔을 전한 내용들이다. 


마침 오늘은 한국교회가 전 세계 개혁교회와 함께 종교개혁 제508주년 기념 주일로 지키고 있고, 또한 본 교단은 이단 경계(警戒) 주일로도 지키고 있다. 그런데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내용은 그런 문제 제기와 함께 그 위기에 빠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 모순과 어리석음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날 출구가 무엇이어야 되는 지를 제대로 짚어줄 수 있는 메시지를 담아내기에, 매우 적절한 내용들이다. 내용 전체의 공통점은 있다. 하나님을 보는 시야가 흐려지면서, 그들이 길 잃은 양들이 된 것이다. 그러기에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구약 사무엘상의 내용을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흔들리는 모습에 가슴 아파하신다.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들의 끈질긴 요구 때문이었다. 복잡한 원인들이 있었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제일주의에서 인간 중심주의로 백성들의 신앙이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었다. 그 큰 부작용을 알리며 설득해도 안 듣는 백성들을 보시면서, 결국 하나님 자신이 허용하시면서, 그들을 상대하실 방향 전환을 취하시게 된다. 


복음서에서는 성자 예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디어진 영적 무감각과 냉소주의에 깊은 슬픔을 표하셨다. 그런 배경에는 당시의 유대교가 아브라함의 자손답지 못한 영적 지도력으로, 백성들의 구원의 희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와 책망 중심의 군림하는 세력으로 전락하여, 백성으로부터 아예 신앙을 외면하게 된 분위기가 깊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바탕에서 세례 요한의 순교에다 예수님의 놀라운 천국 사역에까지도 백성들의 공감력과 흐응을 얻기에 쉽지 않게 된 현실을 무척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서신서인 로마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증언도 교회와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향한 탄식과 안타까움을 강하게 담고 있다. 교회 발전과 성장에 가장 강력히 저항하는 세력들은 바로 율법주의를 내세워 구원의 의를 주장하고 관철하려는 거짓 영적 세력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본래 유대교도들이면서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자들인데, 바로 그들이 예수를 향한 믿음이 구원한다는 논리를 가볍게 여기면서, 인간적 육체의 수고와 노력을 통한 구원을 지향한 율법 준수까지 감당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로, 이방인 성도들을 흔들어 댄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요구가 바로 유대인 남자 모두가 생후 8일 만에 받게 되는 할례(割禮-circumcision)였다. 


여기에는 믿음을 가볍게 보는 인식이 깔려 있고, 율법이 주는 육체적 멍에와 수고에 대한 비중을 믿음보다도 훨씬 더 무겁게 보는 인식이 자리한 까닭이 있다. 동시에 전 그리스도인의 유대화 작업에 대한 의식도 가미(加米)되었다고도 본다. 그 점에서 본래 율법주의자였으나, 지금은 그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전 세계에다 외치는 바울은 정반대의 시각은 확실히 새로웠다(롬3:22). 율법은 육체의 수고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믿음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역사로 나온 것이기에, 성령에서 나온 믿음이 본질적으로 더 크고 확실한 무게를 갖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미 예수 안에서의 성령의 법이 인간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함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롬8:1-2). 게다가 그들 조상 아브라함도 율법이 없을 때 이미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이다(롬4:3). 


1. 구약 / 삼상 8:1-22 /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


이스라엘의 늙은 지도자 사무엘에게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다. 사연은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그를 찾아와서 ‘자기들을 다스릴 왕(王)을 세워달라’고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가지였다. 사사(士師)인 당신은 늙었는데, 상속할 당신의 아들들이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으며 판결을 굽게 하는 불의한 행위를 하고 있으니, 자기들에게는 이제 그들이 아니라 새로운 왕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5절). 


사태를 심상치 않게 본 사무엘은 여호와께 기도했다. 그러자 여호와는 ‘이 일이 너를 버림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정리하시면서, 그들의 오래전부터 당신을 다른 신들 섬김 같이 상대해 왔던 실망스러운 그들 모습에 유감을 표시하시면서,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 명하셨다(6-9절). 단, 들어주되 왕정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도 충분히 숙지시키고, 그래도 좋다면 그 책임을 떠맡을 것을 전제로 하여 요구를 들어주라 하셨다. 


결국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왕정이 안겨 줄 온갖 폐해와 모순을 샅샅이 설명했다. ‘너희는 너희가 선택한 그 왕의 종이 될 것이며, 그 왕의 횡포로 여호와께 부르짖게 될 터이지만, 여호와는 그 일로는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실 것’임도 알리면서 설득했다(10-18절). 하지만 백성은 이미 귀도 막고 마음을 닫은 체, 더 강력히 왕을 세워달라 고집했다. 그 바람에 백성은 결국 이방 나라와 마찬가지로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열었다. 진정한 왕 여호와가 나약한 인간 왕으로 대체되는 때가 열린 것이다. 인간의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하는 나라가 됐다. 


지도자의 부실한 자식 교육의 책임도 컸다. 그때부터 여호와는 대중을 직접적으로 상대하기보다는, 선택된 소수의 지도자를 상대하는 간접적인 지도의 길을 취하게 되셨다. 전능자인 하나님보다 나약하고 편협한 인간의 지도력을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진 미래가 몹시 불투명해졌다. 


2. 복음서 / 마11:16-24 /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할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예수님의 선교가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서 어떤 반응을 받았는지를 엿보게 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그 시대는 율법 종교에 대한 실망 때문에 냉소주의만 가득했고, 공감력을 상실한 시대였다. 세례자 요한의 방식과 예수의 방식이 현격하고도 대조적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당시는 금식과 절제에 힘썼던 세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공격했고, 그와는 달리 모든 죄인과 허허실실(虛虛實實) 어울리며 삶에 애환을 나누며 천국 복음을 전한 예수를 향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며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하며 비판만 했다. 


예수께서 신령한 권능을 많이 행사하면, 사람들은 그 은혜를 누리면서도 회개하지는 않았다. 예수와 그의 행함이 주는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유독 예수의 능력을 크게 경험한 지역들인 고라신, 벳새다와 거버나움 등의 사정이 더욱 심했다(21-24절). 사랑을 사랑으로 은혜를 은혜로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마냥 뒷담화만 풍성하게 남기는 그들의 완고하고 이기적이며 교만한 모습에, 주님의 탄식과 분노가 컸다. 그러기에 예수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보여준 하늘의 능력들을 주변의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에 보여주었더라면, 그들은 즉각 신(神)의 임재를 느끼면서 크게 두려워하며, 옛적의 요나 시대의 니느웨 성의 모습처럼(욘3:5-9참조),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이고(21절), 그 보다 훨씬 오래전 죄악으로 멸망을 받았던 소돔 성도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들 역시 신의 임재에 두려움을 느끼며 회개하여, 멸망 받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하였을 것이라고까지 하셨다(23-24절). 


지금 우리의 믿음의 감각은 어떤가?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각성과 말씀에 민감히 반응하는가, 아니면 저 유대 지역들처럼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가? 이런 예수님의 지적은 우리가 은혜와 축복에만 매달린 체, 제대로 된 반응도 못 하며 사는 믿음 생활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17절). 그렇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는 영적 무감각은 죽은 신앙으로써, 우리가 자신의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할 제목이다. 


3. 서신서 / 롬7:5-13 /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예수의 영인 성령을 받아 세계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의 전적인 관심은, 모세의 율법이 아닌 성령이 안겨 주신 복음이었다. 그에게서 율법은 육체로 구원을 이루려는 도구였다면, 복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신 도구였다. 요즈음 시대로 말하면, 율법은 구원을 위한 문자 시대의 아날로그 형(型)이라면, 성령은 정보 시대의 디지털(Digital)형(型)이랄 수 있다. 진리 말씀의 내용은 같지만, 그것을 전하고 소화 시키며 적용하게 하는 데에는 문자에 의한 율법과 영에 의한 복음은 그 효과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남은 제자들을 향하여 강하게 전하신 말씀이 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이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16:7).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요14:12), ‘오직 성령(세례)을 받으라’(요20:22,행1:5-8). 따라서 부활 이후의 예수는 성령이 전담하셔서 그를 드러내셨다. 곧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롬8:9). 


당연히 교회의 시작도 성령의 역사로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도 성령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셔서, 성령이 내주하시면 그때부터 그는 변하게 되었다. 그 안에서 일하시는 보혜사 성령이 그에게 예수를 알려주시고 드러내 주시며 말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억지로 죄와 싸우지 않아도 이길 수 있게 하였고, 엄한 훈련과 교육을 하지 않아도,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게 하신 것이다. 


주변엔 오래된 말이 하나 있다. 목사가 듣기에 아주 불편한 욕이 있단다. 그게 무엇이었나? 곧 ‘성령 충만 받지 않고, 목회하려고 한다’는 말이었다. 생각해 볼만한 말이다. 예수를 마음에 모시지도 못한 체,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를 힐난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o 이런 조건이 어찌 목사만의 일이겠는가?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성령 받지 못한 신자는 신자가 아니다. 그는 아직 그의 마음에 예수가 없고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만 있는 신자들, 하나님의 백성들, 교인들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 자들이다. 성령으로 내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확실히 갖추지 못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에덴의 부부와 같고, 세상과 육정을 쫓는 낭인(浪人)일 뿐이다. 다시 옷깃을 여미자. 성령이 주신 주의 자녀의 유니품을 확실히 입자. 이런 모습이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는 나 자신을 살리는 것은 물론, 내 가정과 교회와 민족과 세상을 살리는 첩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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