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문) 신 30:1~5, 눅12:22-34, 골1:3-14
오늘은 창조절 넷째 주일이다. 요즈음은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서늘한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되찾은 느낌을 준다. 옷 가짐도 짧은 팔거리와 긴 팔거리로 왕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이다. 다행히 극심한 가뭄으로 온 국민에게 걱정을 안겨주었던 강능 지역도, 최근 집중적인 비가 와서 어느 덧 50%를 넘는 저수량을 채워주는 바람에, 고비를 넘긴 듯하다. 창조주의 은혜와 배려가 너무 감사하다. 주변 나라들은 여전히 기온 재앙으로, 시달리는 모양새라서 더욱 그러하다.
이번 제110회 총회는 여러모로, 우리가 대처해야 할 걱정거리들이 많은 총회였다. 무엇보다도 줄어든 교세로 인한 재정 자립의 문제와 늘어나는 은퇴 교역자 지원 대책의 건은 긴장도를 높이고 있다. 우리 총회가 규모에 비하여 재산은 많은 편인데, 운용이 묘가 매우 중요해졌다. 그리고 교역자 수급 문제도 심각하다. 옛날처럼, 목회 소명자들도 크게 줄었고, 그를 지원하는 교회 현장의 열기도 크게 식었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 성소수자 문제와 퀴어 신학에 대한 과도한 일부의 걱정과 공격 때문에, 교단 전체의 분위기가 위기를 느낄 정도가 되어 큰 걱정이다. 제발 우리 교단이 옛적의 바리새 집단처럼,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를 정죄하는 집단이 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대신 오직 ‘사랑으로 서로 헌신하는 교회’ 공동체였던 처음 교회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결국 교단과 교회는 이웃 사랑의 힘을 키우는 일에 집중해야만 하겠다.
이런 중에 오늘 우리는 넷째 주일의 세 본문 말씀을 받는다. 어떤 성격의 말씀들인가? 놀랍게도, 이번 교단의 총회 주제인 ‘살아계신 하나님,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소서’와도 흡사하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공동체가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으려는 내용들이다.
구약 신명기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무리들이 제 길을 잃고, 하나님의 잠시의 징벌을 받아 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져 나갔을 때, 그래서 그 아픔과 고통 속에서 깨우침이 와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반성하는 마음이 들거든(1절), 그때는 지체없이 그 현장에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요구를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들을 흩어진 곳에서 다시 모으셔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그 땅과 번영기를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재약속하신 내용이다.
예수께서 주신 복음서의 내용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믿음을 소유할 것을 요구하신 내용이다. 의식주에 대한 우선적인 해결 대신에 그 앞서서 하늘 아버지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실천하라는 명령이다. 그리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이 원했던 모든 것들을 덧붙여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내용이다. 여기에서 주님은 특히 가진 소유를 팔아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사랑을 요구하시면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것도 일깨워 주셨다.
서신서에서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보여 준 믿음의 아름다운 열매들의 모습에 감동한 바울 사도의 서신 내용이 올라와 있다. 그곳은 바울 자신이 개척한 곳이 아니었고 동역자인 에바브라를 통하여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짓 종교의 출현과 유대교와 이방의 혼합 종교의 공세 중에서도 신앙의 삼박자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있어서 흔들림 없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모든 교회 중에 모범을 보여 주고 있음에 감사하게 하였다.
결국 이 세 본문 말씀은 믿음의 자리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깨어있는 참 신앙인의 자세 확립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결정적 원인은 나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일이 우선적(優先的)이다. 그 분을 보고 알게 되면, 결국 안개에 쌓인 내 자신의 어리석음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신명기의 성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곧 여호와는 내가 어떤 난관이나 곤경에 떨어져 살지라도,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욱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시고, 이전보다 더 나은 환경과 형편으로 살 기회를 부여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은 한번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면, 종종 일어나는 우리의 실망스러운 대응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변함없이 기대하시고 되찾으려고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성자는 이런 분이시다. 원천적으로 자립, 자생, 자존이 불가능한 우리는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전능자 여호와가 자기를 사랑하고 돌보시고 있음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속에서 사는 길을 택하여야 함을 명령하신다. 그런 점에서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필요에 따른 육체적 근심과 걱정과 염려도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 그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적절한 때에 우리에게 공급해 주실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하나님 앞에서 내 필요한 것만 챙기려는 마음은, 오히려 나의 불신만을 드러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서신서에서의 성령은 성자 예수와 더불어 우리를 이렇게 일깨우신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31). 아버지의 것을 먼저 구하는 성숙한 자식의 모습을 갖추는 삶이다. 아울러 골로새 교회를 통하여 보여 준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들도 요구한다. 곧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믿음,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을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영생의 소망(所望)으로 자신의 영혼을 채우고 살라고 한다.
1. 구약 / 신30:1-5 / ”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記憶)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께로 돌아와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하면 — 네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너를 이끄실 것이라 —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에 돌아오게 하사 —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어떤 아버지요 보호자이신지를 생생히 알려주신 내용이다. 마치 복음서에 소개된 예수의 탕자(蕩子)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 그 아버지를 향한 둘째 아들의 모습과도 흡사하다(눅15:11-32참조).
1) 모세는 깊은 영감 속에서 그의 백성들이 장차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면서 그 징벌로 온 세계로 흩어져 슬픔 속에서 살아갈 때가 올 것을 예측하면서, 이 말씀을 미리 그들 가슴에 안겨 주었다. 다 잊어버려도, 자비와 용서와 긍휼의 아버지인 여호와 하나님의 너그러운 품만은 반드시 기억하고 살면서, 그때가 왔을 때는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깊은 당부를 한 것이다.
2) 실제로 그들은 남북 분단 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강대국과 우상을 숭배하며 각종 부패와 타락한 생활에 빠져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냉혹한 징벌을 받는다. 제국들인 앗수르와 바벨론에 잇따라 패망하면서, 오랜 세월 70년을 유수(幽囚)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게 되면서,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들도 형성되었다.
3) 그런 그들의 마음의 방향을 되잡아 준 내용이 바로 조상 모세의 이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예언의 말씀이었다! 특히 네가 ‘네가 이 일을 마음에 기억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사, 그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너를 이끄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할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이(4-5절) 그때 그들이 붙잡고 기도하며 의지할 푯대였다.
4) 결국 흩어졌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열어주신 기회에 이 예언의 말씀을 붙잡게 되면서, 3차에 걸쳐서 약속된 조상 땅인 팔레스틴(가나안)으로 귀환하게 된다. 1차는 스룹바벨와 예수아의 인솔로 이루어졌고(B.C537), 2차는 에스라의 인솔로 이루어졌으며(B.C458), 3차는 느혜미야의 인솔로 이루어졌다(B.C440). 이때의 귀환은 몸만이 아니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일‘(신3:20)이었고, ’뉘우치는 일‘(렘8:6)이었으며, 원상태로의 ’회복되는 것‘이었다(삿15:19 참조)
5)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안전 공식(公式)은 바로 여기에 있다. 곧 나와 내 자손이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가 나에게 명령하신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살면 된다(2절). 그 부분만 우리가 신실하게 감당하면, 그다음의 이어갈 모든 상황은 아버지요 보호자 되신 여호와께서 친히 은혜로 주관해 주신다. ’모으시고, 이끄시며, 차지하게 하시고, 앞 세대보다도 더 번성하게 하신다‘(3-5절 참조).
2. 복음서 / 눅12:22-34 / ”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르며 섬기도록 가르친 분이다(마6:9).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전능자 하나님의 친 자식으로 생각하고, 그 의식 속에서 실제 그의 자식같이 처신하도록 훈련받았다. 곧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제자들이 부모-자식과 같은 한 가족 되어 사는 영적 문화(文化) 형성에 주력하셨다. 본문은 바로 그런 훈련 중에 나온 제자들이 취할 마음가짐과 핵심적 관심사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소중한 가르침이다.
1) 자기 목숨과 몸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했다(22절). 아버지 밑에서 자신의 생사와 육체의 보전을 염려하는 자식은 대체 어떤 자식일까? 그것은 아버지 보호와 돌봄의 관계를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자식임을 뜻한다. 그것도 창조주 아버지 상대로는 하기에, 더욱 불경스럽다.
2) 창조주 아버지는 대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했다. 이 아버지는 공중에 나는 새들과 들판에 피는 온갖 들풀을 비롯한 지구촌의 생물들 모두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돌보고 살피시기까지 하시는 은혜와 자비가 무궁무진하신 아버지이시다.
3) 그런 창조주 아버지를 소개하신 후,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육체적 삶을 위해 순간순간 걱정과 염려와 근심을 쏟아냈던 제자들을 향하여,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다. -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믿음의 작은 자들(O you of little faith)아!‘(28절).
대체 제자들의 ’작은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 입술로는 선생의 가르침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그러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삶의 고달픈 문제들과 그들 공동체가 매일의 일용할 양식 문제와 만날 때에는, 여전히 하늘 아버지에 대한 매달림보다는, 자기들 방식의 걱정 근심 염려의 입술의 잔치마당을 늘어놓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보시기에, 제자들은 바로 그 단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래서 새 방안을 내셨다.
4)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衣食住) 문제 자체를 구하거나 근심하는 일 자체를 아예 금하셨다. 그 이유는 하늘 아버지는 그런 것이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임을 미리 아셔서, 그 부분에서도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임을 주지(周知)하셨다(30절). 그 대신, 자식 된 자들로서 그런 아버지를 상대로 반드시 필수적으로 맡아주어야 할 일이 있음을 알려 주셨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그들이 아버지의 나라(His kingdom)를 먼저 구하는 일이다‘(31절).
이는 하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자식인 자들이 최우선적으로 관심하면서 찾아 일하는 일이다(마6:33절 참조). 그의 의(義)를 온 세상에 드러내고자 힘쓰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럴 때, 그런 자들에게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필요한 것 그 이상의 것들을 더하여 주신다. 이는 마치 신명기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는 바로 그 하나님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내려 주신 축복을 누리어야 비로소 우리가 온전한 축복자가 된다. 세상 걱정 없이도, 세상과 하늘에 부요한 자의 삶의 길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32-34절 참조).
3. 서신서 / 골1:3-14 /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 덕목들을 매우 모범적으로 갖춘 이들이었다. 바울은 그의 동역자인 에바브라의 지도 하에서, 온갖 주변의 거짓 종교와 우상 세력과 혼합종교의 영향에서도, 그러한 순전한 믿음의 승리자의 모습을 갖춘 저들을 매우 기뻐하며 칭찬했다.
그들이 보여 준 모습은 믿음(faith)과 사랑(love)과 소망(hope)의 기반 위에 자신을 세워 논 모습이었다(3-8절). 그들의 믿음은 복음의 진리에서 소개된 예수에 대한 굳센 믿음이요, 그들의 사랑은 성도들을 향한 따뜻한 이웃 사랑이었으며,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서 받은 영원한 생명과 영생에 향한 소망이었다. 이 영적 기반 위에서 그들은 아름다운 신앙인의 자태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에게서도 이런 모범 성도들이 많이 생산되어야 한다.
o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신앙의 내용들을 점검받아야 한다. 자칫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한참이나 곁길로 들어선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 깨달음이 있다면, 실로 큰 은혜다. 그때는 주저 없이 돌이켜 주님과 그 말씀 앞에 엎드려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언행에 있어서도 우리의 작은 믿음이 계속 노출되고 있지는 않은지도 점검해야 한다. 있다면 부끄러운 일들이다. 우리의 믿음의 인격이 하나님과 말씀 중심으로 형성되지 못한 까닭이다. 하늘 백성이란 의식의 함양이 시급하다. 믿음 사랑 소망에서 골로새 성도를 본받아야 하겠다. 지금은 신앙의 삶을 위한 확실한 공식을 체질화시킬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