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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6.25민족화해주일

관리자 2025-06-17 (화) 14:31 8일전 49  

본문) 롬 6:15~23, 사54:1-8, 눅19:1-10


오늘은 강림 후 둘째 주일이다. 남쪽에선 장마 소식도 들린다. 적절한 장마는 우리 생태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다만 그 피해와 무더위를 잘 견디어 내는 일이 중요하다. 부디 이 무더운 장마철 잘 극복해 내시길 기원한다. 이런 때 우리는 6.25 제75주년을 맞이한다. 남북의 평화통일을 언제나 뜨겁게 열망하고 있는 우리 기장 교단은 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민족 분단의 원흉이었던 6.25 동족상잔(同族相殘)이 다시 재발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민족 화해의 시대가 항구적으로 열리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예배드린다. 


때마침 우리나라는 새로 들어선 이재명 정부가 이런 민족 평화공동체 실현을 위하여, 그 선제(先制)적 실천의 일환으로써, 휴전선 DMZ 전체에 설치된 대북 비방용 확성기 방송을 과감하게 중단했다. 그리고 북한에 날리던 우리 쪽의 비방용 풍선 날리기도 엄격하게 제재하고 나섰다. 정말 다행이다. 그러다 보니, 북한 측에서도 곧장 남쪽을 향한 비방용 방송도 중단하고 나왔다. 화해로 응답을 한 것이다. 이 얼마나 고무적인 상호 간의 멋진 평화 제스처인가! 


지금 세계는 온통 전쟁과 다툼으로 망가져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은 여전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티나 공세와 파괴도 여전하다. 게다가 최근엔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과 이란의 반격으로 인한 전쟁은 온 세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간다. 뿌리로 보면, 이스라엘과 이란, 저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들인데, 지금 이토록 세상에 없는 원수지간이 되어 죽기 살기 싸우고 있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수상의 내부 저항을 짓밟고 더욱 이런 식의 투쟁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이라면, 이는 큰 비극이다. 공존과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려고 해야지, 군림하고 독점하려고 하면 결국 자신도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 미국은 트럼프의 제왕적 통치 행위에 반발하는 국민적 저항운동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트럼프의 통치 행위는 확실히 민주주의는 아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행보를 보면, 마치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있었던 윤석열의 제왕적 스타일을 능가하는 모양새이다. 어쩌다 미국이 이 모양이 되었는지 안타깝다. 그들 국민 중에는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 과정에서 자기들이 많이 배우고 있다고 고백하는 이들만 아주 많은 모양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기회이다. 이번 카나다에서 개최되는 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이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의 부활을 확실히 보여 주고 오기를 기원한다. 아물러 이 혼란스러운 세계에 우리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대안 세력이 되는 기회가 활짝 열리게 되기를 기도한다. 민주주의와 평화, 세계 이웃들과의 협력과 공존 공생 공영의 진짜 모델이 된 대한민국이 선명하기를 소원한다. 한참 위기에 들어선 우리의 경제적 위기도 더불어 소생되기를 기도한다.  


마침 오늘 세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여리고의 세리장(稅吏長)인 삭개오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이야기는 정말 많은 메시지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아도, 사실은 무너져 있었던 삭개오의 안타까운 삶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자기의 무너진 삶을 극복하고자 예수를 통하여 그 타개책을 찾아보려고 몸부림하는 한 남자의 강렬한 몸짓도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면서 그런 절박함과 간절한 행동을 지켜보시던 예수가 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모습도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받아 주시는 예수에 감격한 삭개오가, 예수로 인해 맛보게 된 은혜의 새 세계를 영구히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하는 모습도 신선하다. 


삭개오 이야기의 압권(壓卷)은 그런 삭개오에게 새로운 존재로서의 출발을 공인해 주시는 예수의 마지막 선포의 말씀이었다. 이는 어느 피고를 향하여 재판장인 판사가 최종 선고를 내리는 성격의 선고(宣告)와 같다. 마치 얼마 전, 저 헌법재판소장의 판결과 같다. 곧 ‘오늘 구원(救援)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a son of Abraham)임이로다’(9절). 


이 이름을 받은 것이 왜 그리 중요한가? 그 이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라는 소속원의 증명서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은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제외당한 세상 마귀의 자녀들을 엄히 구별한다.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을 구별하듯이 말이다. 그러기에 일단 아브라함의 자녀란 선포를 받으면,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사람에 걸맞은 온갖 영육 간의 은혜와 축복을 꾸준히 베풀어 주신다(창12:3, 요삼2절 참조). 


그러기에 삭개오가 예수에게서 새 이름을 받은 선포는 그 즉시 효력을 발생하면서, 하늘의 새로운 꽃과 향기로 이 거친 세상을 비추고 씻어내는 신령한 하늘 존재가 되어 살아가게 된다. 최근 시인 김춘수의 <꽃>이란 시가 유명한데, 예수가 삭개오를 향하여 ‘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그 새 꽃이 된 이름을 부여하는 모습이. 바로 삭개오의 경우를 생각나게 하여 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에게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 복음서 / 눅19:1-10 / “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오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삭개오는 자신 안에 새 주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발생했다. 그동안 그는 죄에게 자신을 내어주었으나 이제는 예수와 그의 의(義)의 세계에 자신을 내어주게 되자, 이토록 큰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죄의 품에 있을 때의 그는, 부자였고 권력자였고 지역의 유지(有志)였다. 그것도 그 지위를 잡고자 탐욕과 오만과 교만을 부리고 살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이웃을 잃은 소외자가 되어 죄의식에 시달리며, 양심과 자존심에 받은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해 방황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가 자기와는 전혀 다른 하늘 예수를 주목하며 찾았을 때, 그것도 그런 자기를 알아본 예수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영접해 주시자. 그는 완전 무장해제(武裝解除)를 당하고 말았다. 이는 자기 같은 죄인 괴수(魁首)의 마음 내면의 깊은 괴로움과 고민을 외면치 않고 헤아리시면서, 또 주변의 날카로운 눈치에도 개의치 않고 스스럼없이 자비와 관대함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로 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체득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 순간이었다. 자기와 영생(永生)을 위하여 무엇을 선택하고 붙잡아야만 하는 것인지가 선명하게 보았던 순간이었다. 자기를 알아주시는 이 예수와 그의 세계가 너무도 크고 소중하게 보였다. 그래서 함께하고 싶었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바람에, 삭개오는 예수의 비유에 나타난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천국)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를 사두게 되는 어느 장사와 같은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마13:45-46절 참조). 


그 바람에 삭개오는 그동안 자기가 꼭 붙들고 살아왔고 자기 인생의 성취감과 자존심을 상징해 왔던 것인 많은 소유(所有-재물)을 포기하는 과감한 선언을 이렇게 주님께 드렸다. -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절). 


정말 놀랍고 충격적인 영적 거래(去來-Deal)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자기의 삶의 주인이 완전 교체(交替) 되는 순간이었다. 육체의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존재가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세상과 육체를 주인 삼고 살았던 한 인간이 이 순간부터는 예수와 그 말씀과 이웃 사랑을 주인으로 삼고 사는 인간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이때 그런 그의 영적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확인하면서, 그와 그의 집이 구원이 임하였음을 주님께서 이렇게 선포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절). 


삭개오의 이 모습을 맞대면하신 주님은 큰 기쁨 속에서 당신의 세상 오신 목적을 밝히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 삭개오는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을 탐하고 소유하며 자랑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이 모든 것으로부터 속박에서 해방을 안겨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며 가진 것을 공유하며 살아가도록 힘쓰는 사람이 되었다. 땅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대변신한 것이다. 


2. 서신서 / 롬6;15-23 / ”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니라 “


삭개오의 이런 삶을 이어서 받았던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바울은 바리새인의 일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오직 법과 원칙을 좇아 살아오다가, 예수와 그의 교회를 크게 오해하고 미워하며 극심하게 박해까지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를 찾아와 그의 이름을 부르신 예수를 만나게 되면서, 그 역시 삭게오식(式)의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되고 새 이름과 소명도 부여받으면서, 일생일대의 대변혁을 경험하게 된 사람이다(행9:1-9장 참조). 


그러면서 자기와 같이 예수를 새 주인으로 만나, 하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자들과 그의 교회들을 복음과 진리로 양육하고 돌보는 대(大)사도가 된다.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성도들의 정체성과 받은 은혜를 보전하게 하고자, 모든 성도에게 ’자신을 누구에게 내주었는가‘ 묻는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罪)의 종이냐, 의(義)에 이르게 하는 순종(順從)의 종이냐‘라고 되물으며, 자신의 위치를 깊이 성찰하도록 일깨운다. 사실 그들은 이미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무리였기에(18절), 그 점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새 삶을 걸머지라고 요구한다. 지체를 불법과 부정에 내어주었던 옛사람에 머물지 말고,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의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절)고 강력히 명령한다. 그러면서 ’의를 모르고 지내온 죄의 종의 시절엔 그 열매가 부끄러움뿐이요 죽음만이 있었음도 상기시켜 주었다(20-21절). 따라서 이제는 자신들이 예수를 만나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새 주인을 영접한 하나님 종(從)의 신분임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서 마지막 선물인 영생(永生)까지 누리게 되라고 강조한다(22-23절 참조).


이런 강력한 권면은 신앙 선배 삭개오의 사례와 그 후배인 사도 바울 자신의 확실한 체험적 입장을 발판으로 나온 것이어서, 더욱 뜨겁고 간절하다. 그러면서 후배 신앙인들 모두도 자신들이 도달한 그 영적 변화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축복을 함께 받아 누리며 살 것을 권고한다. 그러면 구약 이사야 예언의 말씀은 어떤 내용일까? 


3. 예언서 / 사54:1-8 / ”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죄와 반역으로 무너지고 망가진 시절을 보냈던 당신의 백성들을 기억하시면서, 그들이 –마치 저 삭개오와 바울의 경우처럼- 회개하고 반성해서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당신이 어떤 영접과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인지를 예고하신 내용이다. 은혜의 새 시대를 열어주실 약속이다. 궁극적으로는 영생이지만, 땅에서의 생활에서도 보상과 위로와 풍요로 채워진 삶이 복원됨으로써, 예전의 수치와 치욕과 근심을 다시 기억됨이 없이 영원한 자비 속에 살아가게 될 것임을 예고하신 내용이다. 결국은 ‘해피 엔딩’의 약속들이다. 


사실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아, 세계 처처로 버림을 당하여 살게 될 때의 그들의 삶은 매우 비참했다. 잉태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한 여인의 처지였고, 산고를 겪지 못하고 홀로 된 여인의 처지였다(1절). 비좁은 장막터를 면치 못했고 입지도 좁아서, 사람 살 곳답지 못하게 살았다(2-3절). 수치, 부끄러움, 치욕, 버림당함, 외로움 등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여호와를 찾고 돌아와서 여호와의 백성 신분을 회복하게 되면서는, 여호와는 바로 그들의 남편이 되어 주시고, 아버지가 되어 주시며, 구속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시게 되는 바람에, 그들의 삶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해졌다. 많은 자녀를 보게 되고, 생활 지평도 크고 넓어지며, 이방 나라를 차지하는 힘 있는 백성도 되었다(1-3절). 과부의 치욕과 수치에서도 벗어나고 온 땅으로부터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서나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기에, 하나님을 남편(男便)으로 두고 사는 무리라 칭함도 받는다(5-7절).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크셔서, 그의 옛 진노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들임을 보여 주게 될 것이다(8절). 


O 우리 모두는 여러 가지로 힘겨운 나날들을 보낸다. 이럴 때일수록,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처신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내가 누구의 사람이며 나의 주인은 누구인지를 정신 차려 분별하고, 거기에 걸맞게 살아가게 깨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삭개오의 영성이 절실하다. 예수가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여 길가의 돌무화과나무에까지 올라가는 그 간절한 영성 말이다. 그래서 그 예수로부터 내 이름이 불리고, 기억되며,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인정받게 되어야 한다. 자연인 수준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OOO 차원에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그의 평화의 꽃이 되고, 그의 화해의 향기를 발산하는 인물이 되면 된다. 그 후의 나의 나머지는 모두 그분이 아주 멋지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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