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0:22~29, 겔34:25-31, 행20:28-35
오늘은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다. 한낮에는 더위를 느낄 정도의 기후에 도달하기도 했다. 아파트 정원의 수목들도 이제는 무성하여 건너편의 물체를 확인하기조차도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 이런 때 우리나라는 예기치 아니한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된다. 작년 12.3 내란 사건이 빌미가 되어서 치러진 대선이라서 사실상 결론은 이미 끝난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번 선거를 여전히 안갯속 선거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저들 내란 세력들인 국민의 힘 세력들은 후보 선정과 등록에 임하면서, 정말 국민들 보기에 낯 뜨거운 일들을 연일 서슴지 않는다.
그러기에 국민은 윤석열 세력의 준동에 더욱 불안해한다. 가장 우려스러운 일은 야당의 대선 후보의 신변 문제이다. 오죽하면 야당은 후보의 신변 보장을 위한 특위를 결성하고, 투표 당일까지의 후보 안전 지키기에 올인하게 되었을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선은 처음 본다. 그만큼 지금의 정세는 비정상의 극치랄 수 있다. 만에 하나, 제일 야당의 후보가 비게 되면, 그때의 집권은 현 내란 세력에게로 또 되돌아가는 것 아닐까? 그때의 정국은 과연 어떻게 될까?
그런 점에서 지금의 우리나라는 미래의 우리를 위한 커다란 대전환기에 접어들었다. 이재명을 비롯한 개혁 세력의 등장으로 전혀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게 될 것인가, 아니면 오직 자기들만의 안위와 보호를 목표로 한 패역(悖逆) 세력의 재등장으로 인하여, 또다시 미증유의 대한민국으로의 대혼란 상태로 전락하게 될 것인가를 결정짓게 될 선택의 시기에 들어섰다. 그만큼 이번 대선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가 되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국민 모두는 가슴과 입술을 모아야 한다. 각종 테러와 폭력의 준동을 막아내고, 국민의 진정한 마음이 모아진 온전한 선거가 되고, 거기에 걸맞는 올바른 지도자가 선출되어 우리나라를 또다시 세계 중심 국가로 올려 세우도록 뜨거운 기도를 올릴 때이다.
이런 때, 우리는 광주 5.18민주화운동 제45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한다. 5.18은 아직도 그 진범이 누구며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진상 규명이 매듭짓지 못한 일이라서 매우 유감스럽지만, 그럼에도 그 사건이 그 후의 우리나라 민주주의 구축에 크게 기여한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5.18민주화운동의 가치와 무게를 아주 높게 받들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그 5.18사건은 두 번 다시 군부와 그 어떤 반헌법적인 폭력 세력에 의하여, 국권이 찬탈 되거나 인권이 박탈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뚜렷한 각성제를 우리 국민 가슴 속에 투입했던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일은 작년에 작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는 노벨 수상 소설을 통하여, 우리나라는 물론 온 세계인의 가슴속에 각성시킨 주제, <죽은 자가 산자를 구원하고, 과거가 현재를 살린다>다는 메시지를 재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의 12.3계엄 사건은 5.18에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내라>라는 메시지를 통하여 의식과 기억을 흔들어 깨워서, 12.3 계엄과 내란 세력의 그 폭력 행위에 대하여 겁 없이 온몸으로 제지하면서 막아내게 한 너무도 감동적인 세계사적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도 바로 그 열매이다.
마침 오늘 복음서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수전절(修殿節-the Feast of Dedication)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찾으신 모습이 나온다. 수전절은 이번 3대 절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차원보다는, 역사의 승리를 기억하며 지키려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전절은 기득권층에게는 다소 부담될 수 있으나, 백성에게는 메시아를 더욱 찾게 되는 성격이 될 수 있는 때이다. 그런 여건에서 예수의 절기 찾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본래 수전절은 하누카(Hanukah-빛의 축제)라고 불리는 유대 절기인데 그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렇다. 곧 헬라 제국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무자비한 군주가 자기 지배 영역에 있는 나라 중에서 유대인의 민족종교인 유대교를 극도로 미워했다. 자기들의 인본주의와는 아주 상극인 신본주의를 이스라엘의 유대교가 강고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의 통치 행위에 가장 걸림돌이 바로 유대 여호와 신앙이라고 판단해서, 아예 씨를 말려서 율법종교를 말살(抹殺)하고자, 그야말로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다. 저 유명한 바리새인 그룹이 그때에 가장 탄압과 박해를 받으면서 태어난 집단이기도 하다.
그때 유다 안에서는 마카비(마카베오)가 중심이 되어, 치열한 저항운동을 통하여 국권과 신앙 회복과 함께, 빼앗겼던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해서 BC 164년에 무너진 성전을 다시 수리하여 봉헌했던 기념절이었다. 나중에는 다시 로마 제국의 휘하에 들어갔지만, 유대인들은 그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해마다 8일간의 절기를 지켜왔다(1마카4:59, 2마카1:9 참조). 탈무드 전승에 따르면, 성전 재(再)봉헌 시, 하루 첫날의 기름밖에 없었는데, 등잔의 기름이 8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고 탔다고 한다. 이것이 하누카 등잔의 유래가 되었고, 오늘날엔 12월 중순이면 가족들 중심으로 매일 하루씩 불을 밝히면서 그날의 기적을 기념하고 있다.
사실 저들의 수전절 전승 내역을 보면, 우리의 5.18민주화운동 내역과 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다만 그 일을 이루신 분을 바라보는 시각과 기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광주민주화는 저항하던 인간들의 가슴 아픈 희생과 폭압자들에 대한 증오심과 심판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억울한 희생이 한국의 완전한 민주주의의 살려내는 열매로 이어지기를 갈망한다.
유대인의 수전절 전승의 상황도 바로 그 수준이었다. 바카비와 같은 시대의 영웅들의 투철한 모습이 그립고, 그러다 보니 현재의 이 로마 제국의 계속되는 억압의 굴레 속에서 탄식하는 자기들에게 다시 제2의 마카비 같은 해방자가 등장하여 자기들의 메시아로 오시기를 깊이 바라는 일이 고착해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 중에 흥미롭고 놀라운 점은 그런 상황의 한복판에 백성의 새로운 기대감을 안고 등장하신 나사렛 예수께서, 과연 자기들의 기대에 부응할 바로 그 인물이냐 아니냐에 관한 관심사와 그에 관한 논쟁이 아주 높아져 있다는 점이었다.
예수께서 이런 당신을 향한 모든 민족적이요 시대적 관심사를 결코 모르고 계실 리가 없다. 그러면서도 예수께서는 그들의 관심사의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가셨다. 그게 복음서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때의 그들과 2천 년이 지난 우리 대한민국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에도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시려고 그곳 성전을 찾으셨을까? 그것은 그들의 고민과 함께, 그들이 아직 보지 못하는 더 높은 차원의 답을 제시하시고자 하심이 분명하다. 그게 무엇일까?
1. 복음서 / 요10:22-29 /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예수께서는 성전 안의 솔로문 행각에서 유대인들이 제기한 전통적 메시아론 공세를 만나신다. 그것은 자기들이 본 예수의 놀라운 행위에 비하여, 예수는 자신을 드러내는 발언의 수위(?)가 아주 애매모호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고, 일부는 시빗거리를 찾아내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23-24절). 그럼에도 예수님에게서 분명한 것은, 자신은 그들이 찾는 마카비와 같은 영웅호걸적 메시아일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곧 짧고 굵게 살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스타성 메시아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여 살리되, 도래할 영생까지 안겨 주실 진짜 메시아로 자신을 알리고 내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28-29절 참조).
그런 예수님의 의도는 수가성 여인에게 주신 말씀에서 잘 드러나 있다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3-14). 그러면 땅이 주는 물과 예수가 주시는 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땅의 물은 언제나 임기응변식이요 일시적인 해소용이다. 마실 때에만 유효하다. 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하늘 생수는 자체 솟아나게 하는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영속적이요 지속적이며 전인적(全人的)이어서, 결코 목마름이 없다. 따라서 그의 물을 마시면 일시성은 물론, 영구성도 해소할 능력이 생긴다.
그 은혜의 큰 선물을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안겨주고자 하셨다. 바로 이 방식이 하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그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베풀고 싶어 하시는 구원의 방식이다(행1:7-8). 또한 바로 이 점이 왜 우리가 땅과 세상의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위의 것과 하늘의 것을 찾아야 할 이유이다(골3:1-5 참조). 교회는 바로 이런 하나님을 전하고 믿어, 그가 베풀어주시는 축복의 방식을 좇아 훈련하게 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전절이나 5.18운동을 접할 때마다, 그것의 아픔과 교훈을 기억하기는 하되, 그 궁극적인 해소와 해답은 그 역사를 넘어 일하시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식을 더욱 의지하는 영적 노력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사실 그 핵심적인 메시아의 방식은 주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고자, 자기 몸을 대속(代贖)의 제물로 내어주신 모습이었다. 당신을 죽여서 모두를 살리는 방식이요, 의인을 죽여 죄인을 살리는 방식이었다. 증오 대신 용서를, 보복 대신 화해를, 단절 대신 소통을, 정죄 대신 평화를 취하셨다. 그래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모두가 상생하는 평화 공동체를 이루어내려고 하셨다.
2. 구약 / 겔34:25-31 / ” 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
본문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미래에 어떤 구원을 안겨 주실 것인지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을 담고 있다. 그것도 죄의 멍에로 인한 고단함과 외로움의 오랜 세월을 각국에서 보냈던 해외 디아스포라들의 귀환 후의 생활에, 여호와께서 어떤 위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약속하신 내용들이다. 매우 강렬한 구원의 밝은 약속들이다.
1)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를 약속하신다(25절, 시23편 참조). 그의 돌봄 안에서 악한 짐승(강대국들)으로부터의 보호를 받으면서, 평안과 안전을 누리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때를 따라 적절한 비들을 내려 주셔서 땅이 풍성한 소산을 내게 됨으로써 더 이상 굶주리지도 아니하게 된다. 삶이 넉넉해지면서 그들이 여호와의 돌보심을 받고 있음과 그의 사랑을 받는 백성임을 온 세상에 알게 된다(26-27, 30-31절). 하나님의 양무리 됨의 사랑 속에 살게 된다.
2) 강대국의 통치라는 치욕에서도 벗어나고, 옥토에서 생산된 농작물로 인하여 풍요를 누리게 되며, 땅의 사나운 짐승의 위협에서도 벗어나 자기 땅에서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게 된다(28-29절). 그래서 전인적인 구원을 이 땅에서 누리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축복의 내용이다.
3. 서신서 / 행20:28-35 / ”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고 3년간 말할 수 없는 헌신과 수고로 목회하였던 모습을 그 교회 장로들에게 술회하며 밝힌 내용들이다. 바울의 이런 장로들과의 회동은 그가 예루살렘에 모금한 선교비를 전달하고 로마로의 마지막 선교 여행을 앞두고, 그곳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서 이루어졌다. 사도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양무리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지극정성을 쏟아주시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자 :
1) 먼저 사도는 장로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킨다. 곧 장로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당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도록 감독자(監督者)로 세우심을 받은 자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장로들은 자기를 위하여서나 주의 양무리를 위해서라도 깨어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28절).
2) 깨어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하여서도 언급하였다. 양무리에게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 해(害)칠 것이 분명이기 때문이다(29절). 그런데 장로 중에서도 그런 이리의 악역(惡役)을 맡아서, 교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내려고 어그러진 말로 선동하며 교회에 큰 분열과 아픔을 안겨 주는 일도 발생할 것을 경고도 하였다(30절). 마치 제자 중의 가룟 유다와 집사 중의 니골라처럼 말이다. 따라서 당신들이 바로 그 인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사전에 경고하신 것이었다.
3) 그러면서 감독자인 장로들은 깨어 있는 모델로서, 사도가 자기들에게 목회 중에 꾸준히 보여주었던 모범을 기억하며 본받아야만 했다. 사도가 권한 자신의 항상 깨어 있는 모습은 목양하던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31절).
4) 그때 사도는 교우들과의 그 어떠한 물질적 욕심에서 나온 접촉이나 거래는 없었다(33절). 대신,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는 자비량(自備糧) 선교로 자급자족했다. 이는 복음 전파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주변의 비판이나 오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34절). 오히려 남은 돈으로는 약한 사람을 돕는 선교비로 사용하였다. 그것은 주께서 일찍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눅12:38참조)하신 말씀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었다(35절).
O 우리 인생 여정에는 예기치 아니한 숱한 굴곡의 역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유대인의 수전절 사건이나, 우리나라의 5.18광주민주화운동도 그중의 하나이다. 고통과 영광이 얼룩져 있는 사건들이다.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해소할 수 있을까? 정의와 공의와 평화의 시각이 밑받침되어야 마땅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주이신 여호와의 영(靈)의 개입과 도우심이 절실하다.
이 점에서 바벨론에서 귀환 후 무너진 조국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던 선지자 스가랴가 받은 계시는 매우 중요한 지침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3:6). 이런 은혜가 우리의 것이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