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32:1~4,16~18; 계 11:15~19; 눅 22:24~30
관동문화의 핵심인 강릉, 그중에 경포호 주변은 바다와 호수와 소나무 숲, 그리고 비교적 너른 들판 등 갖가지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져 관동 제일경을 자랑합니다. 자연을 감상하기 좋아했던 선조들은 예외 없이 이 아름다운 호수에 많은 누정과 별당을 세웠습니다. 제일 관동팔경이라 하여 옛 시인들이 노래하던 경포대에 오르면 쌩쌩 부는 호수바람에 더운 줄 모릅니다. 일찍이 강릉 사람들은 경포대에서 볼 수 있는 여덟 경치를 일러 경포팔경이라 부르며 풍광을 즐겨왔습니다. 경포대에서 보는 해돋이와 낙조와 달맞이, 고기잡이배의 야경, 노송에 들어앉은 강문동, 그리고 초당마을에서 피워 올리는 저녁연기 등입니다.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경포호(鏡浦湖)에는 달이 다섯 개 뜬다는 풍류가 있었습니다. 하늘 바다 호수 술잔 그리고 그대의 눈동자에.
경포호 주변은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돌아볼 곳도 많습니다.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모자, 그리고 허균과 허난설헌 오누이가 나고 자란 고향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경포해수욕장에 가기 위해서 그곳을 지나다녔는데, 그렇게 의미 있는 곳들이 많은 줄 몰랐었습니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허난설헌 오누이의 생가터가 있는 언덕 같은 야산은 ‘용이 되지 못한 구렁이’인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교산(蛟山)이라 불렸는데,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으로 붙였습니다. 교산은 벼슬을 하였으나 자유분방한 성품 때문에 자주 부침하고,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10년(1618) 역모를 꾸몄다 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마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같은 생애입니다. 많은 파란을 일으키며 적서 차별과 금력으로 정치하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반항심이 깊어진 허균은 서자와 천민과 여자들도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나 <홍길동전>(1612년)을 쓴 것도 광해군의 어두운 정치를 저주하고 불우한 서자들에게 혁명 정신을 고취하여 썩어빠진 사회를 바로잡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은 격식 없는 자유로운 시와 글을 썼던 문인으로 불교의 철학과 유교의 이상을 결합하려고 고심했던 철학자로, 몸과 생명을 중시하는 수련도교를 실천하는 사상가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동정했던 인도주의자로,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전통미를 찬미했던 여행가였습니다. 이 다양한 면모가 한데 어우러져 때로는 고뇌에 찬듯 신음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게 노래하며, 세간의 명리를 벗어나 지팡이 하나, 짚신 한 쌍으로 무심한 구름과 사심 없는 달빛처럼 자적하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시대와 불화했던 지식인이었으나 고결한 인품과 굳센 지조는 후세에 길이 존경받았습니다. 김시습은 사상의 육화를 강조하여, 유교인가 불교인가 도교인가 하는 구별을 중시하지 않고 사상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는 사상으로서만 귄위를 지니고 실생활에서 구현되지 않은 현상을 우려하였으며 스스로 사상을 실천하려고 한 참된 구도자였습니다.
오죽헌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입니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19세에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 금강산에 들어갔습니다. 금강산에서 나와 오죽헌에서 새로운 용기를 낸 그는 장차 걸어갈 인생의 목표를 뚜렷이 하고 스스로 경계한다는 의미의 좌우명(「자경문」[自警文])을 쓰는데, 그 요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그 뜻을 크게 가지자. 마음을 안정시키자. 혼자를 삼가자. 언제나 실제로 할 일을 생각하자. 참된 뜻을 다하도록 하자. 방심하지 말고 서둘지 말자.” 결국 율곡 사상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골자는 모두 여기에 확립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인을 목표로 뜻을 크게 세운다는 것을 뚜렷이 하고 있습니다. 이조판서의 관직에 있었던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유족들은 거처할 만한 집 한 채도 없을 정도로 빈한하여 친구와 제자들이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하여 그 곤경을 면하게 해주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청렴결백한 태도로 대의를 위해 일평생을 살다 갔습니다.
이러한 인물들과는 대조적인 집안의 유적이 선교장입니다. 강원도 내의 개인 주택으로서는 가장 넓은 집인 선교장은 조선 시대 상류 계급이었던 전주 이씨 일가의 호화 주택입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는 배를 타고 건너다닌다 하여 ‘배다리마을’[船橋里]이라고 불렸는데, 선교장(船橋莊)이란 이름은 바로 거기서 유래합니다. 관동 제일의 전통가옥이라는 칭호를 듣는 선교장의 역사 한끝에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선교장은 승지 벼슬을 지내던 이희원이 주인이었는데, 그는 강릉 관아를 점령한 강원도 농민군들이 선교장으로 쳐들어올 계획이라는 것을 알고 돈과 쌀을 보내 농민군을 안심시킵니다. 그 후 민보군을 조직하여 강릉 관아로 쳐들어갔고, 방심하던 농민군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대관령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희원은 그 후 강릉 부사로 임명되었으며 강원도 농민군들을 토벌하는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 본문은 심판과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심판에 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0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딸들아, 일 년이 채 되지 못하여 몸서리 칠 일이 생길 것이다. 포도농사가 망하여 거둘 것이 없을 것이다. 11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아, 몸부림 쳐라.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여인들아, 몸서리 쳐라. 맨몸이 되도록 옷을 다 벗어버리고 베로 허리를 둘러라. 12 밭농사와 포도농사를 망쳤으니, 가슴을 쳐라. 13 나의 백성이 사는 땅에 가시덤불과 찔레나무가 자랄 것이니, 가슴을 쳐라. 기쁨이 넘치던 모든 집과 흥겨운 소리 그치지 않던 성읍을 기억하고, 가슴을 쳐라. 14 요새는 파괴되고, 붐비던 도성은 텅 비고, 망대와 탑이 영원히 돌무더기가 되어서, 들나귀들이 즐거이 뛰노는 곳, 양 떼가 풀을 뜯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회복에 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5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16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17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18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 19 (비록 삼림이 우박에 쓰러지고 성읍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도,) 20 씨를 뿌리는 곳마다 댈 물이 넉넉하고, 어디에서나 안심하고 소와 나귀를 놓아 키울 수 있으니, 너희는 복이 있다.”
심판과 회복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심판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농사가 직접적인 내용인데, 심판과 회복이 모두 땅과 물과 농사에 관한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심판과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둘을 매개하는 것은 주님의 영입니다. 하느님이 다시 자기의 영을 보내주시면 심판으로 가슴을 치던 삶이 평화롭고 평온하게 회복됩니다. 그 과정은 혁명적입니다. 이사야는 그 결과를 하느님의 공의로 통치하는 왕이 나오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1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 2 통치자들마다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우를 막는 곳과 같게 될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과 같을 것이며,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과 같을 것입니다. 3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4 그들은 경솔하지 않을 것이며, 사려 깊게 행동할 것이며, 그들이 의도한 것을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5 아무도 어리석은 사람을 더 이상 고상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며, 간교한 사람을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6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말을 하며, 그 마음으로 악을 좋아하여 불경건한 일을 하며, 주님께 함부로 말을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지 않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을 주지 않습니다. 7 우둔한 사람은 악해서, 간계나 꾸미며, 힘 없는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도, 거짓말로 그 가난한 사람들을 파멸시킵니다. 8 그러나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하느님의 공의로 통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허균, 김시습, 이이처럼 고상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 많은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운 형편입니다. 모두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의 영을 우리 가운데 모심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영이 무엇이기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작용하기에 심판에서 회복할 수 있게 될까요?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기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성서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우리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의 영입니다. 우리에게 역사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선포하게 하는 것, 널리 알리게 하는 말과 행동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랑은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증거이며, 그 사랑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랑은 또한 만물을 소통시키는 성령의 통로이며, 서로 소통하여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게 하고,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하나의 의지로 묶어주는 끈입니다. 머리나 지식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짓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인데, 그 증거는 사랑이고,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함께 아파함”(compassion)입니다. 우리말로 동정(마음을 움직이는)이라고 번역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조금 왜곡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함께 아파함은 영적 변혁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목적 그 자체입니다. 다른 사람들, 모든 생명들과 함께 느끼는 것, 특히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은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성령과 소통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인데, 그 마음은 껍질에 둘러싸인 계란과 같은데, 살아 있다면 껍질은 깨어지고 열릴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 안의 생명은 죽게 되고, 악취가 나게 되며, 독성이 있는 유황으로 변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는 그 역사에 있어서 서로 상반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을 열고 자아의 방향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고, 또한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자기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근원으로써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마음을 더 두꺼운 껍데기로 덮어버릴 수도 있고, 반면 껍데기로 둘러싸인 마음을 열어 더 넓은 공동체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와서 심판을 회복으로 바꾸는 과정은 혁명적입니다. 현실적인 제도와 절차를 바꾸는 일보다 근본적인 것은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제도와 절차를 잘 만들어 놓아도 다시 악하게 돌아가서 심판을 받을 때와 같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한 선거의 결과를 보면 각 사람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생각도 그러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 혁명입니다. 그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영의 역사입니다. 혁명의 대부인 체 게바라는 “새로운 인간”이라는 글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혁명은 인간 내부에 있다. 이웃에게 탐욕을 부리는 늑대 같은 인간은 혁명가가 될 수 없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을 존중하고, 그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제는 ‘새로운 인간’의 시대다. 도덕적인 동기에서 일을 시작하고 끊임없는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자신의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인간이다.”
사람이 바뀌는 일, 하느님의 영으로 내가 변화되고, 변화된 만큼 실천할 때에 인간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 같은 일들이 사라지고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혁명에 대한 시를 첨부합니다. 함께 읽으면서 묵상합시다.
“혁명” - 이재무(<황해문학>, 2014. 봄.)
무릇 혁명을 꿈꾸는 자
꽃나무를 닮아야 한다.
가지가 꺾이고 줄기가 베어져도
뿌리 남아있는 한 악착같이 잎 틔우고
꽃 피워 마침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저마다의 외로움을 나이테로 새기면서
지면을 푸르게 물들이다가
바닥에 쓰러지는 날
이웃한 나무들의 거름이 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혁명”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1885~1930)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짓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