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65:17-25, 계시록 21:1-7, 누가복음 13:22-30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 귀환을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시편의 몇몇 시들은 그 간절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편 137편은, 포로가 된 백성이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고(시 137:1), 126편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 126:1)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포로 귀환은 홍해를 건넜던 출애굽 사건의 재현, 즉 ‘제2의 출애굽’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바사 왕 고레스의 조령으로 마침내 고국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찬란한 영광이 아닌 무너진 성벽과 황폐한 성전, 그리고 여전한 삶의 결핍과 외세의 압제였습니다.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포로에서 놓임 받는 정치적 해방만으로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구원의 참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 고국 땅으로 귀환이라는 지리적, 물리적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하셨던 ‘구원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넘어, 온 우주가 새롭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지평을 통해,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새 창조를 바라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라고 하면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동사 ‘바라’(Bara)를 사용합니다. 폰 라트는 그의 『구약신학』에서, 이사야 65장을 두고서 “선지자들의 예언은 역사적 지평에서 시작되지만, 결코 그 역사 내에서 머물지 않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전적인 새 창조(Bara)로 도약한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65장의 후반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 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자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19-25)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 땅과 새 하늘에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날수가 많지 못해 죽는 어린이가 없고,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없으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니 해함도 상함도 없는 평화가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65:20, 25).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과 나라의 구원을 넘어서서, 인간의 죄로 오염된 피조 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시고, 나아가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소망의 말씀이었습니다.
잠시 이사야의 당시 시대상을 살펴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 왕국 유다마저 바벨론에게 패망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치면서 포로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일은 절체절명의 과제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의 회복에만 집중되어야 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상을 섬기고 불의의 삶을 살았던 지난날의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는 반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포로 귀환 공동체는 율법을 중심으로 뭉치고, 이방 세계에 대하여 더욱 철저하게 울타리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더 크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외연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에게로 확장될 것임을 수차례 언급하였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하나님께서 종, 곧 메시아를 보내시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바벨론의 포로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종에게 주어진 구원의 궁극적인 사명은 이방의 빛이 되어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이방인에게 엄격하게 출입이 제한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개방할 것이라고 합니다. “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6-7)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안식일을 준수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자의 예배를 받을 것이니,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조는 마침내 이사야 65장으로 이어져, 나를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도 응답하시어,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사 65:1) 이는 곧, 이방인과 이방 나라에도 구원의 문을 여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사야 예언의 대미를 장식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뜻이 응집되어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새 하늘 새 땅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구원, 피조 세계를 ‘바라’의 창조수준으로 새롭게 하시는 구원, 다시 말해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아니하는 완전한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말씀이 신약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소환됩니다. 사도 요한은 더욱더 구체적이고 완전한 모습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개합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은 처음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 안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같이 아름다운 성입니다. 그 성에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하시매, 하나님은 백성의 모든 눈물을 닦아줍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거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합니다. 생로병사의 고단하고 유한한 육의 삶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삶은 땅의 삶과 다릅니다. 믿는 자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 나라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은 땅에서도 경험되는 나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결코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죄로 물든 패악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에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유한한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사는 자는, 육의 수를 다하고 부름을 받았을 때, 하늘에서 내려왔던 본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이 천국 복음인 것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마 4:23-25) 천국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은 백성 중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나 있을법한, 아픔이나 고통의 눈물이 없는 세상을 땅에서 실현하셨던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바,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라는 말씀이 주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나의 모든 병과 약함을 아시고 그것들을 고쳐주시니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어 고통과 설움의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도 서럽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더 좋은 세상, 다시는 아픔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 거하기를 바라면서 작은 쪽지에 위로의 글을 남깁니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바다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팽목항에서, 젊음을 앗아간 이태원 좁은 골목길에서, ‘더 좋은 세상’을 염원하는 메아리 없는 아우성은 해마다 울려 퍼집니다. 그런데 더 좋은 세상, 본능적으로 막연히 갈망하는 더 좋은 세상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본문인 누가복음으로 들어갑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냐고 물으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구원받을 숫자의 많고 적음을 말씀하시기 전에, 구원을 향한 길이 좁고 험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구원의 숫자를 물은 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율법을 가졌고, 성전이 있으니 당연히 천국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들은 이미 좁은 문을 통과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을 지나지 못한 그들이, 굳게 닫힌 천국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라고 외칠 때에,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한다”라는 소리를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께서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눅 13:26)라고 항변하지만, 집주인은 다시 한번 차갑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눅 13:27). 이는 율법의 형식과 혈통적 기득권, 혹은 단순히 예수의 주변부에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는 구원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율법적, 혈통적 이스라엘은 밖으로 쫓겨나 울며 이를 갈고 있는데, “동서남북으로부터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눅 13:29)하게 될 것이며,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 13:30)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서 말하는 “목마른 자”요, 그리고 7절에서 말하는 “이기는 자”들입니다. 좁은 문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를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철저한 회개와 믿음의 문입니다. 스스로 ‘첫째’라고 생각하며 기득권에 안주하는 자는 ‘나중’이 될 것이요,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갈급함으로 주님께 나아온 이방인과 세리와 죄인 같은 ‘나중 된 자’들이 ‘먼저’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본문과 연결하여 보면, 나를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도 응답하시어,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하신 그 말씀(사 65:1)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가 살아가는 나라입니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무론 누구든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를 그토록 갈망했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시험과 유혹과 환난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며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포로된 삶이 자유롭게 되는 구원을 갈망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다시는 아픔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나라, 내가 지은 집에 거하며, 내 손이 수고한 열매를 먹는 나라, 그리고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노니는 평화로운 나라가 임하기를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애쓰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 땅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종말의 때에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나라,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