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계 19:1-10, 미 4:1-4, 마 25:31-46
1.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아- 피 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입니다.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이 넘치는’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가사에서 절절히 느껴집니다.
2.
오늘 미가서 말씀은 이러한 선한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듬직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우뚝 설 것이다. 민족들이 구름처럼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
민족마다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새번역 1-4절]
하나님의 통치로 형성된,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태평성대(太平聖代)의 풍경입니다.
3.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통치에 대한 이와 같은 소망이 “헛된 꿈이 아니다”는 것을 확인하여 줍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소망을 짓밟고 가로막는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하나님 역사는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고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통해 완결되는 방식이면서 최종(最終)적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 연속성 못지않게 불연속성(不連續性)이 있듯이 “지금 하늘과 땅”과 “새 하늘과 새 땅”에도 불연속성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21:5). 새로움으로 인한 불연속성이 옛 질서의 완전한 갱신에서 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지만, 인간 역사의 종결을 포함하는 우주적 종말과 같은 재창조에서 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종말 사건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스케일은 광폭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 권세를 송축(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그 보좌로부터 음성이 울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작은 자들과 큰 자들아,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또 나는 큰 무리의 음성과 같기도 하고, 큰 물소리와 같기도 하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같기도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서 왕권을 잡으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새번역 5-8절]
4.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 시한폭탄처럼, 예수님이 켜놓으신 이 특별한 일이 작동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느긋합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고 둔감한 탓입니다. 하기야 당면한 기후 위기조차 도외시되는 실정이지요. 이상 기후를 경험하고도 각성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혹한과 폭염을 피해 해외의 별장을 오갈 수 없는 딱한 처지라는 것을 모른 채 환경보호를 남의 일처럼 대합니다. 이런 태도는 인간 본성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언제든 죽을 수 있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열 처녀의 비유(25:1-13)는 이러한 문제와 그 극복책을 잘 보여 줍니다. 신부를 돕는 처녀의 일부만 졸다가 잠이 든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랬습니다. 이것이 인간 현실입니다. 차이는 기름 준비에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로운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말씀은 종말의 때를 슬기롭게 준비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제시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이기도 합니다. 핵심은 주님의 채점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40절)에 대한 태도입니다. 목자가 저녁에 목초지에서 돌아온 가축을 양과 염소로 나누는 것처럼 주님이 이 기준을 가지고 어리석은 인생인지 슬기로운 인생인지 판단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에서 ‘형제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칭합니다[Hagner: 양용의, 『마태복음』에서 재인용].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12:50)라고 정의하셨고 자신의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28:10). ‘작은 자’라는 표현 역시 제자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10:42). 다른 말씀(18:6, 10, 14)들도 그러합니다.
‘내 형제’는 좁은 의미로는 “성도”를 가리키고,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곧 교회이니, 교회를 어떻게 대하느냐 그리고 넓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영생과 영벌을 나누는 분수령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성도)를 사랑하고 성도에게 주신 임무에 충실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지원하고 그들과 협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개인의 종말은 반드시 옵니다.
지금의 인간 사회가 결정적으로 변화를 겪는 집단적 종말도 반드시 옵니다.
모든 것이 리셋이 되는 재창조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성도는 종말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거하고 교회를 통해 주신 사명에 충실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과도 협력하여
주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고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25:23) 성도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