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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7-1) - " 갑과 을의 종말 " / 이병일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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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후(7-1) - " 갑과 을의 종말 "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5-07-23 (수) 14:11 1개월전 110  

본문) 미 4:1-4; 계 19:1-10; 마 25:31-46


성서에서 종말은 어떤 이들에게는 복음(기쁜 소식)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슬픈 소식입니다. 그날은 폭정을 일삼던 지도자들에게 심판의 날입니다. 그날은 해방과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날입니다. 성서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 혹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어떤 이들은 악마와 그 하수인들을 위해서 준비한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어떤 이들은 창세 때부터 준비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영원한 형벌이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 관계를 어떻게 맺고 행동하였느냐가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는 것이 그 기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개인의 세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약속한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서에서 말하는 종말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변화된 사람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성서적 종말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직 그날이 오지 않았고, 아직 그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현실은 여전히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당하는 사람 사이에 갈등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 “갑과 을”입니다. 갑과 을은 하늘의 변화를 담은 천간(天干) 중의 하나였던 것이 계약서상 주체를 지칭하는데 쓰이다가, 요즘은 주종(主從), 또는 불공정한 관계 등의 의미로 종종 쓰입니다. 갑을관계라는 말은 계약서상에 계약당사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일과 돈을 주는 높은 위치의 계약자를 갑, 낮은 위치의 계약자를 을이라 합니다. 그래서 을은 갑에게 상대적으로 약자가 되고 갑은 또 그렇게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갑과 을이라는 말은 힘의 논리에 따라 우리 사회의 강자와 약자 사이의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관계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약자인 을은 갑의 비위를 혹은 요구를 최대한 맞춰줘야 관계가 유지되니 무한약자가 되버리고 맙니다. 

직장에서 상사에 의한 갑질이 만연화 되어서 ‘직장갑질119’에서 갑질 피해 신고를 받기도 하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제76조의2는 ‘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를 규정한다.)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직장별로 ‘갑질 없는 공정한 직장 만들기’를 선언하기도 하고, 갑질수준을 체계적으로 측정 진단 관리할 수 있는 ‘ex갑질지수’를 개발하여 활용하기도 합니다. 회식강요, 업무불이익, 책임전가, 비인격적 대우들이 대표적인 갑질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지만 공무원인 교사나 사무관에겐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괴롭힘 금지법은 근로자가 대상이고, 국가·지방공무원법의 적용을 받는 공무원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공무원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도 폭행·상해·모욕·명예훼손·협박 등 형사처벌에 해당하는 수준이 아니면 마땅한 구제 방법이 없습니다. SSKK(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면 까라는 대로) 문화가 갑질과 괴롭힘의 근거가 됩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공무원 행동강령에 직무권한 등을 행사한 부당행위를 금지하는 항목을 신설했습니다. 이를 어기면 국민권익위에 신고할 수 있으며 해당 공무원을 징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괴롭힘 방지법과 달리 갑질 금지의 범위가 좁아서 거의 효과가 없습니다. 게다가 공무원 행동강령에는 사법부나 입법부의 공무원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갑을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대학원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와 의과대학에서 선후배의 관계입니다.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어떤 이가 한 말입니다. “석사과정은 자기 실력이 90%, 박사과정은 자기실력이 10%가 학위에 반영이 된다.” 교수와 학생의 입장이 종속적인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연회장(노회장)이 이사하는 날에도 소속 젊은 목사나 전도사들이 동원되어 일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이렇게 갑으로서 행세하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들이 있는데, ‘갑질’, ‘슈퍼갑’, ‘갑의 횡포’, ‘진(상)갑’, ‘막(돼먹은)갑’, ‘꼴갑’ 등입니다. 

강준만은 <갑과 을의 나라>(인물과사상사)라는 책에서 “갑을관계는 이익 차원의 개념일 뿐만 아니라 ‘을 위에 군림하는 맛’이라고 하는 인정욕구를 충족하는, 삶의 기본 문법이다. 관존민비에서 출발한 갑을관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뜯어먹기로 자리 잡았다. 한국 사회에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잣대가 획일화돼 있다는 점이다. 너무 돈 중심이다.”라고 말합니다. 사회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갑을관계의 청산을 위해서는 “나는 ‘을의 반란’이 ‘증오의 이용’을 넘어 ‘증오의 종언’을 향해 나아가는 걸 전제로 한다면 감히 그것을 시대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말한 강준만의 해법이 필요합니다. 꼴갑하는 세력에 맞서는 세력이 커질 때에 비로소 갑의 횡포를 막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어떤 문제를 풀 때에 기득권을 가진 집단에서는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서 논점을 흐리거나 집단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여름에 많이 들리는 ‘블랙아웃’은 에너지 부족을 가정이나 개인의 생활습관의 문제로만 몰아가려는 시도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러한 의도에 잘 넘어갑니다. 물론 개인의 역할이 중요하겠지만 그 영향력은 극히 미미합니다. 그들은 전력거래소에서 협박용으로 산정한 예비전력 수치를 개인을 압박하면서 원전을 더 지을 명분만 찾으려고 합니다. 사회적이고 공적인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문제를 개인이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성서에서 그날에 일어날 일을 묘사할 때에 분명히 극단적인 두 집단을 상정합니다. 심판의 날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고, 해방의 날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을 넘어서 미가서에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그날을 묘사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개인의 수고와 노력의 결실을 빼앗기지 않고 사는 모습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밭에서 난 소출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입니다(이사야 62:9).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을 때에 그날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한자에도 복 福자는 “각 사람이(一) 자기의 밭에서(田) 난 것을 먹는 것을(口) 보는 일(示)”이라고 풀어 쓸 수 있습니다. 각자가 그리고 모두가 자기의 것을 침해당하지 않고, 남에게 강요하거나 빼앗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바로 그날의 종말적 희망입니다. 

집단적이거나 사회적인 공공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윤리와 힘의 균형을 위하여 대립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용서와 나눔과 희생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갑을관계가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그 사회의 문화와 바람에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관계는 대개 공동체 안에서 형성됩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에서 서로 잘 알고 있는 관계에서 형성됩니다. 그러한 영역에서 갑을관계는 이윤이나 권력이 목적이 아니라 가치나 영향력인 경우가 많습니다. 

갑론을박(甲論乙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갑이 견해를 말하면 을이 논박한다는 뜻을 지닌 성어(成語)로, 여러 사람이 서로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 논란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반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고사성어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삼형제가 하늘에 날아가는 새를 보고 제일 큰형은 잡아서 삶아먹자고 하였고, 둘째는 구워 먹자고 하였으며, 막내 동생은 맛있게 먹으려면 끓는 물에 데친 뒤 구워 먹자고 하였습니다. 서로 자기 생각을 주장하며 논란한 형제들의 갑론을박이 계속되자 그 해결책을 얻으려고 고을 수령(守令)에게 갔는데, 수령이 새를 잡아오라고 하였으나 그 사이에 바다의 새는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 고사성어의 내용을 하나씩 생각해 보면 우리네 모습이 보입니다. 삼형제는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가족공동체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일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가톨릭적(보편적, 포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거의 비슷합니다. / 그들이 갑론을박했던 내용은 날아가는 새를 어떻게 먹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잡지도 않은 새가 그들의 논쟁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일단 논의를 하려면 새를 잡아놓고 시작해야 합니다. 새를 어떻게 잡을까하는 방법을 논의했다면 그래도 조금은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 구워먹든 삶아먹든 데쳐먹든 어떻게 하기 전에 먼저 새를 잡자고 누군가가 말했더라면 고을 수령에게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일단 논쟁에 빠지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죠. / 고을 수령에게 가서 고을 수령이 새를 잡아오라고 할 때까지, 삼형제는 의미 없는 말싸움을 했던 것입니다. 삼형제는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이러한 일이 자주 반복된다면 형제간의 의도 상할 수 있겠죠.


공동체 내에서 의견의 대립이 있는 원인은 사람들이 토론과 토의의 방법과 목적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공동체에서 필요한 것은 토론보다는 토의입니다. 공동체라면 같은 목적을 위해서 협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토의가 의논과 협의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내는 시도라면, 토론은 자신의 해결책을 상대편이나 제3자에게 납득시키는 시도입니다. 토의가 여러 사람이 협의해서 좋은 의견을 찾는 공동체적인 사고라면, 토론은 대립을 통해서 자신을 정면으로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동체 내에서 개인 간에 갑을관계와 비슷한 것은 의사결정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생각과 의견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함께 하기 위해서는 토의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갑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합의된 내용이나 조율된 의견을 행함에 있어서 갑처럼 행동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따라서 갑과 을은 치열한 경쟁관계나 적대관계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협조관계로 가야합니다. 본질적으로 인간관계는 갑-을 관계를 초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예절과 신의를 갖고 사람을 대합니다. 그러나 갑-을 관계 속에서 인간관계는 왜곡됩니다. 또한 세상에는 갑과 을뿐만 아니라 병과 정도 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왜곡된 갑을관계가 사라지고, 자기의 포도나무와 자기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 생명들이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대부분은 각자 알아서 살지만 서로 도우며 살기도 합니다. 공생(共生)은 여러 종의 생물이 같은 구역에서 더불어 사는 일인데, 相利공생과 片利공생이 있습니다. 相利공생은 콩과 뿌리 박테리아처럼 서로 이익을 얻으며 공서(共棲)하는 것입니다. 片利공생은 기생과 숙주처럼 일방만 이익을 보는 삶의 관계입니다. 편리공생을 기생이라고도 하는데, 포식도 일종의 기생이라고 합니다. 또한 오행의 목화토금수처럼 상생과 상극(相剋)을 하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이익을 주면서 사는 삶, 서로에게 해를 끼치면서 사는 삶, 한쪽만 해를 끼치거나 이익을 주면서 사는 삶, 다양한 삶의 모습 속에서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 도래라는 천지개벽에 참여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종말사상으로 희망을 삼는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시작이지,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현실은 아직도 하느님의 통치와는 거리가 멉니다. 성서의 종말을 관계의 측면에서 우리 시대의 말로 하면 갑과 을의 종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공동체의 질서나 조직에 대해서 어떤 희망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뚜렷한 것은 그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간에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이며,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희망은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아직도 미래적이지만, 그 나라는 자라고 있습니다. 이같은 확신은 희망을 행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이 행동의 동력은 희망이며, 이 행동은 미래를 앞당겨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낡은 질서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투쟁이 있으며 수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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