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슥 4:1~14, 고전 12:1~11, 눅 17:5~10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스가랴 4장 6절)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이건 무슨 성전 순례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은 지 수백 년이 넘는 거대한 성전들은 정말 압도적으로 웅장하지요. 성전 건물들은 그 자체로 예술이며 역사입니다. 그 대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는 얼마나 장엄할까요? 그런데 어쩌다가 거기서 예배드리는 장면을 보면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성전 맨 앞줄도 못 채우는, 아주 적은 무리가 드리는 예배는 조촐하다 못해 썰렁하지요. 신도들도 사제도 거의 다 노인뿐입니다. 그나마 유명한 성전은 관광객이라도 붐비지요. 많은 성전이 더는 유지조차 할 수 없어서, 심지어 술집으로 팔려 나간답니다. 대성전들의 몰락이 참 안타깝고 씁쓸합니다.
그런데 사실 대성전의 몰락은, 오페라가 아니라 역사에서, 이미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은 충격적인 대성전의 몰락을 겪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 붕괴입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이었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계의 배꼽’이라고 자부했습니다. 배꼽은 中心을 뜻하지요. 생명의 원천입니다. 마치 아기가 그 배꼽을 통해 어머니에게서 생명을 이어받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배꼽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이어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온 힘과 정성을 들여 성전을 지었지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거룩한 성전,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예루살렘 대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참혹하게 무너진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예레미야는 눈물로 탄식했지요. “아, 슬프다. 예전에는 사람들로 그렇게 붐비더니, 이제는 이 도성이 어찌 이리 적막한가! 예전에는 뭇 나라 가운데 으뜸이더니, 이제는 과부의 신세가 되고, 예전에는 모든 나라 가운데 여왕이더니 이제는 종의 신세가 되었구나.”(애 1:1) 무너진 성전의 폐허는 이리와 승냥이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황망하고 참담한 일입니까? 이게 무슨 일일까요?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어떻게, 무엇으로 성전을 다시 세워야 할까요?
“성전은 무엇으로 세워야 할까요?” 오늘 우리 설교의 제목이지요. 그런데 이 질문은 무엇보다 포로귀환 시대에 무너진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질문이었습니다. 특히 예언자들은 이 질문 앞에 오체투지 하듯 엎드렸지요. 예언자 스가랴도 바로 이 질문을 붙잡고 치열하게 씨름했던 예언자입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성전을 바르게 세울 수 있느냐, 하는 성전 재건의 과제입니다.
본문을 보면, 스가랴는 한 가지 환상을 보았습니다. 순금으로 만든 ‘등잔대’ 환상입니다. 그 등잔대 꼭대기에는 그릇이 있는데, 그릇 가장자리에는 일곱 대롱에 연결된 등잔 일곱 개가 있습니다. 위에 있는 그릇으로부터 기름이 대롱을 통해 등잔으로 흘러서, 등잔에 불을 켤 수 있는, 그런 모양새지요. 이른바 일곱 등잔 환상입니다. 그리고 이 등잔대 옆에는 올리브나무 두 그루가 오른쪽과 왼쪽에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환상일까요?
스가랴는 천사에게 이 등잔대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스룹바벨이 머릿돌을 떠내어 그 기초를 놓은 일, 그 시작은 미약하나 마침내 이루고야 말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스룹바벨이 시작했던 그 일이 무엇이지요? 바로 성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입니다. 순금으로 만든 일곱 등잔 대는 ‘성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성서에서 ‘일곱’은 완전한 수입니다. ‘하나님의 수’이지요.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신 것도 7일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촛대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의미하듯이, 일곱 등잔 대는 ‘하나님의 성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잔대가 성전이라면, 그 양쪽에 있는 나무는 무엇일까요? 이 올리브나무 두 그루를 두고, 수많은 해석이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과거, 계 11:4 참조)라고 보기도 하고,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현재, 라 5:2)라고 하기도 하고, 장차 올 메시아(미래)라고 해석하기도 했지요. 심지어 그 올리브나무가 자기를 가리킨다는 황당한 사이비들(박태선, 문선명, 이만희 등등)도 줄줄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섣부르게 올리브나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특정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천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그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올리브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올리브 열매를 맺는 나무지요. 그 열매로 올리브 기름을 짭니다. 그 올리브 기름을 그릇에 담고, 기름이 대롱으로 등잔에 흘러가면,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계속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리브나무는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는 나무입니다. 여기서 일곱 등잔이 성전을 뜻하니까, 올리브나무는 ‘성전을 섬기는 사람’이지요. 그렇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군림하고 지배하는 권력자나 교주가 아닙니다.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천사는, 올리브나무 두 그루와 가지 두 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기름 부어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두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슥 4:14)
이렇게 스가랴가 본 ‘일곱 등잔 대와 올리브나무’ 환상은 ‘성전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가랴 환상 이야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에 성전을 짓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했고 먹고 살기도 버거웠지요. 그런데 성전을 지으려면 뭐가 있어야 할까요? 뭐부터 해야 할까요? 우선 자금부터 확보해야 하겠지요? 기술자들도 필요하겠지요? 강력한 영도자의 능력이 절실하지 않을까요?
“힘으로도 되지 않으며,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슥 4:6a)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힘이 있어야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돈이 힘인데, 돈 없이 성전은커녕 움막 하나 세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예루살렘 대성전’을 지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도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아니랍니다. 하나님은 돈도 권력도 아니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돈도 권력도 아니라면, 성전은 어떻게 무엇으로 지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슥 4:6b)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을 짓는 스룹바벨에게 주셨던, 그리고 성전을 지으려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오직 성령으로만 지어야 합니다. 돈으로 지은 신전에서는 돈이 행세하고, 권력으로 지은 신전에서는 권력이 다스리게 됩니다. 오직 영으로 지은 성전만이, 오직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만이, 인간의 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짜 성전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스가랴의 환상은 마치 성전 조감도처럼 보입니다. 돈과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만 짓는 성전의 조감도지요.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운 고린도는 어떤 도시였을까요? 그리스의 번성한 대도시였던 고린도는 이른바 그리스 신전의 도시였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물론 고린도에도 수많은 신전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신전들은 정말 거대하고 웅장했습니다. 그 대성전에 안치된 남녀 신상들은 또 얼마나 매혹적이었을까요? 거기서 거행되는 제사/예배는 또 얼마나 신비롭고 황홀했겠습니까? 이런 거대 성전의 도시 고린도에서 바울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어떤 교회를 지어야 할까요? 저들과 경쟁하려면, 저들의 대성전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예루살렘 대성전을 지어서, 저들의 코를 지그시 눌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바울은 능력의 사도니까,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마땅히 그런 대성전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러나 놀랍게도, 정말 이상하리만치 사도 바울은 그런 대성전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 대성전에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의 가난한 교회로서는 그런 대성전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어설프게 지었다가는 시쳇말로 쪽팔릴까 봐 아예 포기했던 걸까요? 아닙니다. 바울이 꿈꾸는 성전, 바울이 지으려는 진짜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리는 진정한 성전은 그런 돌로 짓는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세우려 한 성전은 저 대성전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세우려는 진짜 성전,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돌이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세우는 성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 3:16, 6:19) 그렇습니다. 바울은 돌로 지은 신전 안에 돌로 만든 우상을 안치하는 대성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을 모시는 살아 있는 성전을 지으려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성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렇게 보면, 고린도전서 12장은 바울이 설계하는 진짜 ‘성전/교회의 조감도’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교회의 외관을 그린 설계도가 아니라 성전의 본질을 그리는 설계도입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 관한 말씀이지요. 바울은 먼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이 고백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중심이요, 우리의 신앙고백의 알짬이지요. 교회의 든든한, 확고한 기초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반석/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마 16:18) 하셨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우리가 아니라 다만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 무슨 믿음이 커서, 내가 다 경험해 보고 잘 알아서, 그렇게 고백하는 게 아니다, 그 말입니다. 신앙은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주님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야말로 다만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된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은혜입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는 각각 은사를 주십니다. 이 은사 또한 말 그대로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믿음을 주시고, 치유의 은사를 주시고, 기적의 능력을 주시고, 예언의 은사를 주시고,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시고, 방언을 주시고, 통역하는 은사를 주시지요. 이렇게 은사는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각각 다른 은사는 모두 하나입니다. 모든 은사는 섬기는 은사고,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요. 누구는 지배하고 누구는 굴복하고, 누가 더 높고 낮고 그런 게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은사는 우리를 교만한 교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죄인으로 무릎 꿇게 합니다. 은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는 할 바를 다 하고서도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눅 17:10) 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의 역사를 돌아보면, 성서에서 성전을 처음 지은 이는 솔로몬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과 대리석으로 지은 솔로몬의 성전은 정말 웅장했지요. 그러나 그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거대한 돌들은 처참하게 흩어졌고, 찬란했던 성물들은 침략자들의 전리품이 되었고, 자랑스러운 영광은 참담한 치욕이 되었습니다. 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까? 바빌론 제국의 공격 때문에요?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성전을 허물어버린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붕괴를 바라보며 예레미야는 이렇게 통곡했습니다. “아, 슬프다. 주님께서 어찌 이렇게 진노하셔서 도성 시온의 앞길을 캄캄하게 하셨는가? 어찌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하늘에서 땅으로 던지셨는가? 진노하신 날에 주님께서는 성전조차도 기억하지 않으시다니!”(애 2:1)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은 다시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는 스룹바벨을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스가랴는 한 가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성전은 힘과 권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완성되지 못했던 성전은 훗날 그리스의 침공으로 다시 치욕을 당했지요. 그런데 70년 대공사로 마침내 웅장하고 화려한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헤롯입니다. 헤롯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배나 더 크고 화려한 대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버리라 하셨지요. 로마의 침공으로, 헤롯의 예루살렘 대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대성전은 이교 사원이 되었지요. 이것이 돌로 지은 성전의 역사입니다. 돌로 지은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으로 지은 성전은 모두 무너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성전을 지어야 할까요? 사실, 성전은 우리가 짓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진짜 성전을 세우신 분은 따로 계십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헤롯의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버리라 하시면서, 사흘 만에 몸소 다시 짓겠다 하셨지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진짜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은 성전, 이 진짜 성전이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일찍이 스가랴는 성전은 다만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성령을 모신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 했습니다. 함께 믿음을 고백하며, 함께 아파하고 같이 기뻐하며, 약한 지체를 귀하게 여기고, 볼품없는 지체를 더 아름답게 꾸며주는, 그런 사람들, 높고 낮음도 없이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온 힘과 정성을 다하고도 오히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 말하는 겸손한 사람들, 그렇게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우는 성령의 사람들, 그들이 진짜 성전이며,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지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든든히 지어가도록, 성령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 안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