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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강림후(1-1) - " 주님이 돌아오실 때 "/ 도시농어촌선교주일 / 이훈삼 목사

관리자 2024-05-24 (금) 17:47 20일전 91  

본문) 사 52:7~10


1. 예언에 살다


살면서 지정학적인 요소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가게도 어느 곳에 차리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좌우될 수 있고, 교회도 위치에 따라서 부흥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난의 한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5천 년 동안 외적으로부터 침략당한 것이 900번이 넘는다는 말도 있고 3천 번이나 된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어느 수준까지 침략으로 봐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고, 900번이나 3천 번이라고 말하는 근거가 분명치 않다는 반론도 있고, 그렇게만 보는 것은 너무 패배적 역사주의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역사 속에서 굉장히 어려움을 많이 당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북쪽으로는 중국과 만주의 여러 나라가 우리를 침략해서 짓밟은 경우도 많습니다. 성남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아픔과 치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오른쪽으로는 일본이 호시탐탐 우리를 침략해서 대륙으로 나아가려는 성향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 외에도 소소하게 왜구의 침략으로 해안 지방이 많은 고초를 당했습니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와서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독립하였지만, 그렇게 보면 숫자가 좀 과장되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동안 남을 지배하고 침략한 것보다는 많은 수난과 어려움을 당한 것이 사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독특하게 한(恨)이라는 정서가 있고 또 어딘지 모르게 좀 구슬픈 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와 아주 비슷한 역사가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마치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과 우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역사와 문화와 언어와 전통도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스라엘과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아주 작은 나라로서 북쪽 메소포타미아 지역 큰 나라들의 침략을 받기 일쑤였고, 남쪽으로는 또 하나의 거대 문명인 이집트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를 탐냈고, 역시 이집트 문명도 팔레스타인을 지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사이에 낀 이스라엘은 늘 강대국의 영향 아래서 슬픔을 당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힘든 역사를 살았기에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기적을 만들고자 했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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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메니아 성경 삽화, 새 예루살렘, 1645년



이스라엘에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시리아와 튀르키예가 있고, 튀르키예 오른쪽으로 아르메니아라는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이미 1세기에 바돌로매와 다대오 두 사도가 복음을 전파했고, 301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움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세워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잘못했을 때는 회개를 촉구하고 힘들 때는 소망을 주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망치 않고 바른길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했습니다. 이런 예언자 전통이 구약 성경에 큰 흐름을 이루고 있고, 예수님은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예언자 전통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역사를 완성하신다는 거대한 역사관을 이어왔는데, 요한계시록에 그 모든 것이 모여있습니다.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사야를 비롯해 여러 예언자의 희망을 집약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마음에 품으면서 고난을 이겨나갔습니다. 이 삽화도 400년 전 아르메니아 지방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희망을 잃지 않고 신앙을 지켜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이 황폐하여 성벽은 무너지고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내려주시면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걷고 있습니다. 양 한 마리는 어깨에 메었고, 뒤따라오는 양들은 누워 있거나 아주 편하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불안이나 걱정, 탄압이나 고통도 없습니다. 아주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평안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초록색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생명의 색입니다. 나무가 풍성하고 건축물들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모두 반듯하게 서 있습니다. 나무도 있고 꽃도 있고 성문마다 천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어떤 외적도 침입할 수 없습니다. 바깥에서 불이 나도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안전한 공간입니다.

예루살렘 성 중심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죄를 이겼고, 마침내 재림해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그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은 이런 신앙을 통해 어려움 가운데서도 끝내 이겨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을 내리시며, 성령을 통해서 이 땅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고난 속에 있고 절망적이지만, 새로운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모든 위험과 걱정과 고통과 절망은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명이 충만하고 희망이 가득한, 사랑과 은혜와 행복이 가득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확신이 초대교회를 무너지지 않게 했고, 고난받고 박해받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도 힘을 주었습니다. 


이 믿음이 지금 극심한 위기를 당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절실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2. 황폐한 곳 농어촌


2500년 전,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걱정과 시름 속에 빠져 있던 예루살렘을 향해서 위로와 희망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강대국의 침략으로 불타고 짓밟히는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고통과 울음 속에 갇혀 있지만, 주님이 오시면 이 예루살렘이 생명의 장소, 희망의 장소, 행복의 장소로 변화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고난과 아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선언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약속이 바로 예수라는 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이 기독교인이고, 예수를 믿지 않고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 유대교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세상의 약속은 요한계시록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희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그리고 그것을 바라고 믿으면서 지내왔던 2천 년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황폐한 곳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황폐한 곳은 어딜까? 오늘 총회가 지정한 도시·농어촌 주일을 맞이해서 황폐한 곳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농어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작고 거기다가 분단되어서 절반밖에 안 되고, 그중에 또 70% 정도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래부터 우리 땅에서 자라온 세대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만주나 유럽 또는 미국을 차로 달려보면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땅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런 곳에 비하면 우리는 땅이 참 좁고 산이 정말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산은 생활에 굉장히 불편한 요소입니다. 그러기에 작은 땅덩어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가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2020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의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인구가 역전되었습니다. 수도권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이니 우리는 수도권 시민입니다. 수도권 면적은 12%밖에 안 되는데, 이 좁은 지역에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50년 전쯤인 1970년도에는 수도권 인구가 약 900만 명, 비수도권이 2300만 명 정도로 수도권이 30% 지방이 70%였습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70년 이후 수도권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반대로 지방의 인구는 정체되었습니다. 그래서 2020년부터는 수도권에 전체 인구 절반 이상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작은 땅덩어리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할 우리나라에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수도권에 모여 살까요? 사실 이런 현상은 다른 나라에도 일어납니다. 아무래도 수도가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인간 삶의 중심지고, 사람이 많은 곳에 기회가 많고, 할 수 있는 일이 많기에 수도권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 모이는 것이 적당한 것이냐입니다. 일본이 34%, 유럽에 있는 나라들이 보통 20%대, 독일은 7.5%에 불과하죠. 수도권과 지방이 별로 차이가 없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수도권 집중 현상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30% 안팎이 적당할 것인데 지금 우리는 50%가 넘어버렸고 세계 어느 나라도 이렇게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사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도권 편중 현상이 훨씬 심각한 거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지방 특히 농어촌의 생활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농어촌에 가면 전부 다 70대 이상 할아버지·할머니들만 있고 아기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합니다. 빈집이 늘어나서 마을 분위기가 흉흉합니다. 이렇게 10년 20년 지나면 마을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방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학교가 문을 닫고 병원이 없어지고 사업체가 떠납니다. 일거리가 없습니다. 

지방이 어려우니까 그곳에 있는 교회도 당연히 어려워집니다. 우리 교단은 농어촌에 교회가 많습니다. 충청과 호남지방에서 신도시보다는 주로 농어촌 지역에 기장 교회가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쪽이 전부 다 축소되고 발전을 못 하니까 교회도 어렵습니다. 정말 유능하고 성실한 목회자들이 큰 뜻을 품고 농어촌에 들어갔다가 평생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모질거나 자기 이익을 구하면 쉽게 도시로 나오겠지만, 마치 자기를 위해서 농어촌에 노인분들을 버리고 나오는 것과 같은 양심의 아픔 때문에 차마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목회자들의 경제생활, 아이들 교육, 건강, 노동, 모든 것이 너무 힘들어서 대부분 농어촌 목사님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많은 농어촌 목회자들이 생활이 어려우니까 목회와 함께 농사를 지어서 생활합니다. 목회하면서 농사도 짓는 것이 보통 일이겠습니까?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지쳐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황폐한 곳, 하나님께서 굽어살피시는 황폐한 곳의 첫 번째는 비수도권-지방, 특히 농어촌 지역입니다. 우리는 농어촌 지역이 다시 여유롭고 평안하고, 농어촌 지역의 교회가 부흥할 수 있도록 힘을 다해 기도해야겠습니다.


3. 상생의 사회 


이사야가 외친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사 52:9)


지금 황폐해서 아프고 힘들고 절망하는 사람들은 이제 기쁜 소리를 내어 노래하라고 합니다. 고난의 시절이 끝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특히 대한민국의 지방-농어촌에 이런 기쁨의 노래가 울려퍼지기를 기도합니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균형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한쪽으로 편중돼 있으면 균형을 잃게 되고 건강할 수 없습니다. 단백질이나 비타민이나 적절하게 필요한 것이지 너무 많으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맙니다. 사람 머리가 중요하다고 해서 머리만 계속 사용하고 육체를 사용하지 않아서 나중에 머리만 커지고 손과 발이 쪼그라든다면 그것은 건강한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인류가 이처럼 주로 머리만 사용하기에 미래 인류는 이상한 가분수로 변형될 것이라는 예상이 있습니다. 상체는 크게 발달했는데 하체가 빈약하다든지, 오른쪽은 힘이 센데 왼쪽은 힘이 하나도 없다든지, 자꾸만 한쪽으로 몸이 기울면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균형이 잘 맞아야 건강한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정신이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균형을 이뤄야지, 너무 이성적인 사람은 차갑고 다른 사람이나 시대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며, 너무 감성적인 사람은 감성에 치우쳐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이 균형을 잘 이뤄야 하고, 몸도 균형 있게 성장해야 하고, 정신도 이성과 감성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국토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야 합니다. 수도권 과밀 현상이 가져올 문제가 심각하기에 그동안 정부종합청사를 과천으로 옮기고 세종시를 건설하는 등 나름 노력했습니다. 지금처럼 수도권이 계속 비대해지고 지방과 농어촌은 무너지는 현상이 계속되면 국가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할 것이 분명하기에 수도 이전을 통해서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수도권 비대-지방 소멸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국가의 균형 발전이라는 소중한 가치는 사라졌고, 점점 더 수도권 규제를 풀어버리면서 수도권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사람으로 치면 한쪽만 발달해 있고, 나머지는 다 쪼그라든 아주 건강이 나쁜 상태입니다. 나라의 미래가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나라를 황폐한 곳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균형 발전-수도권과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외쳐야 합니다. 수도권에 50% 이상의 인구가 모여 산다는 것은 투표를 통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민주사회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수도권이 이미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정치인은 수도권 유권자의 지지를 잃어버릴까 봐 지방 살리기를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수도권 집중을 떠나서 지방을 살리자고 말하는 순간, 수도권에 사는 절반 이상의 유권자들이 그 정치인을 부정할 것입니다. 수도권이 점점 더 과밀화되어야 부동산이 오르고 경제적인 기회가 많이 생기고 여러 가지 혜택을 보기 때문입니다. 수도권 이기주의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먼 미래를 봤을 때 우리나라가 공멸하는 나쁜 시나리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나서서 지방과 농어촌을 살려야 한다는 기도와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수도권이 지방으로 분산되면 교회도 교인도 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과 다른 점은 우리 전체의 행복, 지금보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자기 초월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방과 농어촌을 살리자는 캠페인을 끊임없이 벌여야 합니다. 수도권 시민을 설득하고 정치인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이제 더는 견디지 못하고 한계선상에 있는 농어촌이 무너지지 않고 현 상태로만이라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교회를 지원하고 지방을 지원하고, 그리고 서서히 국민 의식이 바뀌어서 수도권뿐만 아니라 지방과 농어촌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도시도 행복할 수 있고 지방도 행복할 수 있고 우리나라 전체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행복은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야 비로소 이루어지겠지만, 우리는 주님이 오실 그때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보고서 다시 희망을 불어넣었던 말씀이고, 예수님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말씀이고,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 시대를 열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도시 농어촌 주의를 맞이해서 도시뿐만 아니라 지방 특히 농어촌도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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