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부활주일(1-1) - "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 / 장애인주일 / 서재경 목사 > 부활절

본문 바로가기

부활절 HOME > 설교올리기 > 부활절

[둘째해] 부활주일(1-1) - "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 / 장애인주일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5-04-18 (금) 15:44 21일전 84  

본문) 욥 19:23~27, 고전 15:1~11, 막 15:42~16:8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마가복음 16장 8절)


며칠 전에 양산 통도사에 들렀습니다. 계곡을 따라 들어가는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노송들이 참 장관이고, 이른 봄 흐드러진 홍매화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요. 그런데 통도사에는 소나무와 홍매화보다 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통도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입니다. 보통 사찰의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있습니다. 대웅전에 있는 불상 중에서 가운데 있는 불상이 석가모니 불상이지요. 석가모니 불상은 다른 불상들보다 큽니다. 그렇다면, 통도사의 대웅전이 특별한 까닭은, 그 석가모니불이 크고 화려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곳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없습니다. 석가뿐 아니라 다른 불상이나 여래상도 없지요. 아예 아무런 불상도 없습니다. 정말 독특하지요. 그렇다면, 그 대웅전에는 왜 불상이 없을까요? 도난이라도 당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대웅전의 앞 벽은 통유리여서, 그 바깥이 내다보입니다. 그 바깥에는 너른 박석 뜨락이 있고, 그 한가운데 부도가 있습니다. 그게 석가모니 진신사리 부도입니다. 그러니까 통도사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까닭은, 석가모니의 진짜 사리를 모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처의 진짜 사리가 있으니까, 그 어떤 불상도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른바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는 것입니다.

불상이 없는 통도사 대웅전의 진신사리 부도를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로부터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중심에 자기들이 믿는 신의 형상을 둡니다. 형상이지요. 그 신의 몸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신의 형상을 만들고, 거기 의지하고 안심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형상이 허위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압니다. 그래서 그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부러워하지요. 그리고 그 진짜를 얻었다면, 그 자부심이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기세등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진신사리는 또 무엇입니까? 세상에 그 많은 진신사리가 정말 진짜일까요? 무엇보다 석가모니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검의 흔적에 그토록 집착하기를 바랐을까요? 석가의 가르침은 그 허망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 아닐까요?

어쨌거나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형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형상이 없는 종교가 또 있지요.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우리의 교회에는 그 어떤 형상도 없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형상이 없는 까닭은 통도사와는 다릅니다. 통도사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있기에 불상이 없었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진신사리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 이유가 없고, 만들지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진신사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데, 누가 그 어떤 형상을 만든다는 말입니까? 형상은 죽은 자들의 것입니다. 사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그 부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덤이지요. 죽은 석가모니의 흔적/먼지를 그 돌로 만든 무덤/부도에 모셔놓고, 그 무덤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꾸미고 섬길 예수님의 무덤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날 이야기를 함께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에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무덤에 안장해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머리 둘 곳 하나 없이 사셨으니, 어떻게 무덤을 장만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있었습니다. 명망 있는 의회원이었던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죽었는지 확인하고 나서 시신을 내어주었지요. 요셉은 삼베로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무덤 어귀를 큰 돌로 막았습니다. 그 무덤은 요셉이 자기를 위해 마련한 새 무덤이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지요. 우리 예수님에게도 무덤이 생겼습니다. 허술한 무덤이 아니라 바위를 파서 만든 새 무덤이었습니다. 혹시 압니까? 그 무덤에서 사리보다 더 귀한 진주 알이 나와서, 교회마다 그 진주 한 알씩 고이 안치하고, 그 진주를 우리의 중심에 두고, 예수님을 섬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중세에는 성인의 뼛조각 하나라도 안치하면 교회가 문전성시였다는데, 예수님의 진주를 안치한다면, 그야말로 대박이겠지요.

그런데 우리의 이런 소망(?)은 부활의 첫날에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금요일 저녁 해가 떨어져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은 무덤에 급하게 안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 셋이 이른 아침 해가 돋자마자 무덤으로 갔습니다. 예수님 몸에 향료라도 발라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걱정이 많았지요. 여자 셋뿐이니 무덤을 막은 돌을 어떻게 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무덤에 이른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엄청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무덤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드리려 했던 여인들의 갸륵한 정성은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인들은 그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웬 젊은 남자가 흰옷을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정말 혼비백산할 일이지요. 그는 주님의 천사였습니다.(마 28:2) 그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막 16:6) 그리고 천사는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은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볼 것이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첫 부활절 아침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이 첫 부활절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선포한 부활의 첫 소식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돌아가신 조상이나 성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서 무덤을 만듭니다. 그 무덤에 정성을 다하지요. 그런데 성현 정도가 아니라 신의 아들이라면, 얼마나 큰 무덤이 필요하겠습니까? 실제로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 칭하던 군왕들은 정말 크고 화려한, 정말 교만하기 짝이 없는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얼마나 크고 엄청난 무덤입니까? 저 로마 황제들의 무덤은 또 얼마나 크고 장엄합니까? 그러나 사실 그 무덤은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입니다. 실제로 그 거대한 무덤들은 거의 다 도굴되어서 허망하게 텅 비어 있거나,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지요. 그 신을 참칭한 교만한 군왕들은 제 무덤 하나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허망한 거짓 신들이 아니라면, 오직 유일한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는 그를 위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드려야 할까요? 우리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무덤을 만들어도 부족하지 않을까요? 하늘의 하늘이라도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에게는 무덤이 없습니다. 실제로 세상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에게는 그 무덤이 있지요. 그리고 그 종교들의 신앙은 언제나 그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무덤이 있는 곳은 성지중의 성지가 되고, 신도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온갖 진귀하고 값진 예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정성껏 예물을 드릴 수 없습니다. 첫 부활절에 여인들이 정성껏 준비했던 향료를 예수님께 발라드리지 못한 이래, 그 누구도 예수님의 무덤을 꾸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무덤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발라드릴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진신사리가 없다는 것은 절대 기죽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자랑이요 긍지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이요,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없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무덤을 꾸미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 예수님은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저기 무덤 속이 아니라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 신앙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고전 15:3-4) 이것이 우리의 확고한 믿음이 아닙니까? 그 극심한 고통 중에도 살아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욥의 믿음,(욥 19:25-26) 나의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는 그 믿음,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는 그 믿음, 그것이 바로 부활의 믿음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첫 부활절 아침에 천사가 들려주었던 부활의 첫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부활절에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니체는 당시의 교회를 가리켜서, ‘교회가 납골당이 되었다’고 희롱했습니다. 교회가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하는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니라, 죽은 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납골당처럼 변질되고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교회들은 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그 교회에다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성자의 유골을 안치했지요. 그 성자의 유골을 꾸미고, 선전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성자의 유골을 안치한 성당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시쳇말로 대박, 부흥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자 성당마다 경쟁적으로 유명한 성인들의 뼈를 안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뼛조각이 무슨 기적을 일으킨다고 맹신했고, 성당들은 유명한 성인의 발가락 뼛조각이라도 확보하려고 다투었지요. 그러다 보니 가짜 유골도 몰래/공공연하게 유통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지요. 

그런데 이렇게 허망한 무덤을 꾸미는 맹신이 그저 미개했던 옛일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뚫고 들어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교회가 살아 계신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이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교회만이 아니지요. 우리는 윤석열 탄핵과 파면을 겪으면서, 이 괴이한 권력의 밑바닥에 참으로 괴이한 종교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정말 황당하고 비루하고 조잡하고 추악한 종교의 민낯이 드러났지요. 그리고 그 한복판에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종교의 특징은 무덤을 팔아서 돈을 버는 탐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썩어 냄새나는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갈릴리로 가셔서, 거기서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사람들 속에,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무덤이 아니라면 진짜 교회는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는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저 그리스 로마의 거대한 신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우리의 몸이 진정한 성전이라 했습니다.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몸에,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역사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서재경 / 한민교회 원로목사)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