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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3-1) - "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 / 남신도회주일 / 한가위감사주일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6-09-17 (목) 21:43 1시간전 1  

본문) 창 2:18-25, 엡 5:21–6:4, 막 10:1-16


오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창조절 셋째 주일입니다. 어느새 들판은 황금 물결로 출렁이고, 달콤한 과일이 향기롭고 탐스럽게 익어갑니다. 이제 또 금방 온 산천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겠지요. 이 찬란한 계절에 우리의 삶에도 은총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창조절이 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대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마음속에 그려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롭습니까? 하늘과 땅과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이 다 우리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하나님의 피조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人間입니다. 사람이요, 나, 우리입니다. 흔히 창조절은 자연을 돌아보고, 자연의 순리를 배우고 따르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창조절은 하나님이 지으신 환경/생태계만 생각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도 자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인간을 회복하지 않고서 자연을 회복하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10장 1-12절)에서, ‘이혼’을 비판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창조 절기에 웬 뜬금없는 ‘이혼’ 이야기인가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일을 ‘인간의 윤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인륜을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 섭리’로 보셨습니다. 

사건은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일하시던 예수님이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가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바로 다음 장(11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니까,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렀을 때입니다.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와 예루살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영역(나와바리?)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도 ‘늘 하시던 대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걸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었지요. 그들이 다가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는(시비 거는) 문제를 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남편이, 남자가, 아내를 곧 여자를, 버려도 되느냐, 이 질문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낸 시험 문제였습니다. 이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고 반문하셨지요.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대답은,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였을 때,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는, 신명기 24장 1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이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도 하나님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율법에 기록된 대로 남자는 여자를 버려도 된다, 그렇게 말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모세의 계명의 기록된 문자가 아니라 그 문자를 기록한 그 이유, 그 율법의 정신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이 기록된 시대에는 남자가 여자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팔고 살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본래 히브리 사람들은 노예였지요. 그런데 그런 시대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였다면, 그때는 어떻게 했을까요? 돌을 던지고, 멍석말이해서 맨몸으로 쫓아내고 말겠지요. 그런데 모세는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했더라도 아내를 그냥 내쫓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보내라 했지요. 이 ‘이혼증서’는 이 여자가 합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는 권리가 됩니다. ‘이혼증서’는 최소한의 보호장치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본디 그 여자를 죽이자는 게 아니라 살리자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남자 중의 남자,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모세의 율법을 남자가 여자를 버릴 수 있는 ‘면허증’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내쫓고 싶을 때, 확 버리고 싶을 때, 그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지요.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였을 때’라는 그 전제조건입니다. 이거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뭐가 문제겠습니까? “넌 나에게 수치심을 주었어!” 이거 하나면 충분한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율법학자들은 수치심의 이유를 오만가지로 만들어 냈습니다. 빵을 굽다가 태웠다, 국을 끓이다가 졸였다, 그냥 맘에 안 들었다, 별별 이유가 다 통했습니다. 그래도 샴마이 학파는 엄격했는데, 그들은 수치스러운 일을 ‘음행’이라고 보았습니다.(마태복음 19장 9절 참조)

이렇게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이 남자가 여자를 버리는 걸 허락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본뜻은 남자가 여자를 맘대로 버리라고 한 것 아니라, 힘없는 여자를 지켜주라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밝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우리가 이 창세기 2장의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 1장에 나오는 ‘만물의 창조’ 이야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이레에 걸쳐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태초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했지요.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어둠이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정도로 깊고 짙었다는 말입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暗黑입니다. ‘혼돈’에다가 ‘공허’에다가 짙은 ‘어둠’까지, 세 겹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 이전의 상태입니다. 이게 뭘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태초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바빌론 포로 시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빌론 포로 시기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황과 처지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절망스러워서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고, 헛갈리고 허망하고 깜깜했습니다. 그것이 바빌론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바로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불러서 어둠(黑暗)을 몰아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을 나누시고, 하늘과 땅을 나누시고, 육지와 바다를 가르셔서 混沌을 물리치셨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온갖 식물과 동물을 종류대로 지으셔서, 텅 빈 空虛를 충만하게 채우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카오스’를 생명 가득한 ‘코스모스’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은 이렇게 이레 동안 萬物을 창조하신 이야기로 마무리되지요. 

그런데 2장 4절부터 다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 창조 이야기 한 편의 동화처럼 펼쳐지지요. 이렇게 ‘사람의 창조’를 재차 섬세하게 톺아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창조에서 ‘사람의 창조’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창조’ 이야기는 사람이 무엇인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을 밝히려 합니다. 

앞에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지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었지요. “참 좋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1장 3절,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31절, 신명 나는 추임새처럼 계속, 일곱 번이나 참 좋다 하십니다. 그런데 2장 18절에 이르러서, ‘좋지 않은 것’이 하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는데, 그런데 좋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남자가 ‘혼자 있는 것’(홀로 있다는 것은 외롭게 혼자 산다[獨存]는 얘기도 되겠지만, 혼자 다 차지하고 권력을 휘두른다[獨裁]는 얘기도 되겠지요.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사람은 혼자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사람은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셔서, 그래서 그를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짐승들을 만들고, 날아다니는 새들을 만들어 데려오셨고, 아담은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불러주었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그를 돕는 배필,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깊은 잠’(라담)은 보통 잠이 아니라 죽었다고 할 정도로 깊은 잠입니다. 남자가 자기 갈빗대를 빼내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가야, 죽어야, 그래야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말도 여기서 나왔지요. 어쨌거나 하나님은 그렇게 여자를 만드셔서 남자에게로 데려오셨습니다. 그때 남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이거 아직도 잠에서 덜 깬 것 같지요?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람 창조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창조 이야기는 무슨 얘기겠습니까? 뭘 말하자는 걸까요? 남자와 여자는, 사람과 사람은,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함께 더불어 사는 존재로 지으셨다, 그것입니다. 시편 시인(133편)이 노래했듯이, 사람이 함께 더불어 어울려 사는 모습이야말로, 아름답고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하나님이 주신 영생이 거기에 있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참 좋게, 즐겁고 행복하게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창조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창조하셨습니까?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짝’을 만들겠다 하셨습니다. 돕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이 돕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보조자, 조수, 비서를 말하는 것일까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돕는 사람은 도와주고, 살펴주고, 뒤에 서주는 사람입니다. 히브리 말로 ‘에제르’(עזר)이지요. 그런데 이 ‘에제르’는 단순히 ‘들러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서에는 최고의 ‘에제르’가 계십니다. 누굴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에제르,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놀랍게도 성서에서 ‘에제르’는 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21회 중 17회)입니다. 모세의 아들 이름이 엘리에셀이었지요? ‘나의 하나님은 도우심’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시인들도 하나님은 나의 도우심(54편 4절 등등)이라고 노래하지요. 생각해 보면,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무력하고 용기도 없다면 누굴 돕겠습니까? 사랑 없이 뭘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확실한 도움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도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의 ‘에제르’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남자의 ‘에제르’다, 사람은 곧 하늘이다,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할 말이 있습니다. 돕는 ‘배필’이라 할 때, 그 배필(케네그도, כנגד)입니다. 배필은 서로 동등하게, 함께 더불어, 마주 보는 짝을 말합니다. 무거운 짐을 들 때, 함께 마주 보는 짝과 호흡이 잘 맞아야 하는 것과 같지요. 사람은, 남자와 여자는, 우리는,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게 아니라, 동등하게 ‘더불어서 함께’ 서로서로 ‘도움’이 되는 짝으로 창조되었다, 그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우심’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예수님’ 또한 우리의 ‘도우심’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십자가에 버리실 만큼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지극히 당연하게 ‘성령’ 또한 우리의 ‘도우심’입니다. 保惠師 성령이라는 그 말 자체가 ‘돕는 분’이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 하나님은 오롯이 우리의 ‘도우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 또한 ‘도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도움이 되고, 남자 또한 여자에게 도움이 됩니다. 어른은 어린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어린아이는 어른에게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도움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三位一體 하나님의 도우심 안에 살아갑니다. 본디 ‘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人)이 서로 관계(間)하며 사는 존재라는 말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무엇일까요?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지요. 애초부터 잘못된 질문입니다. 버릴 수 있는 관계라면, 그게 무슨 가정이겠습니까?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서로 ‘도움’이 되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대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는 사람들, 서로 도움이 되는 사람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지요. 네가 나에게 일생의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힘이 되어주고 도움이 되어주는, 그렇게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란 또 무엇일까요? 바울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창조의 신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와 나가 우리가 되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신비를 보았습니다.(에베소서 5장 32절) ‘교회’는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 서로 도움이 되어주는 사람들, 그들입니다. 교회는, 우리는 서로 도움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도우심’입니다.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이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도우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 모든 곳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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