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26-31; 누가복음 12:4-7
죽음의 위협, 그것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가장 큰 협박이 됩니다. 그 죽음의 위협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물론 종교의 긍정적인 부분은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유한적인 인간에게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을 보여주고 죽음으로부터 위안과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의 위협을 매개로 자기의 제도와 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극단적으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위협이 필수적인 요소인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이든지 그것이 종교의 시원에 있었던 요소들의 의미를 상실하거나 고착화시켰을 때에, 그것은 인간의 삶을 규제하거나 또는 적극적으로 억압하는 역할을 합니다.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자연과 사회의 관계는, 사회가 자연을 지배함으로써 자연의 힘을 완화 혹은 굴복시켜 그것을 사회화하는가, 또는 사회가 자연법칙을 앞질러 사회 구성원의 죽음을 집행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특히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인간을 ‘원래부터 죄인’이라고 규정하여 죄의식 속에서 공포를 느끼게 하고, 종교적 기득권으로 수 많은 인간들을 누멘을 대신한 사제들에게 종속시켰습니다. 기독교는 죽음, 멸망 그리고 지옥의 고통으로 인간을 위협합니다. 즉 생명의 유한함과 사후의 고통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의 불안과 경악을 유발시키고 교회의 정신에 일치하는 신앙생활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통제 수단으로서의 교회적인 죽음의 위협과 더욱 명백하게 관련되는 것으로서 사형의 위협이 존재합니다. 죽음이라는 공포 아래에서 국가나 지배자는 구성원의 생명을 요구하거나, 치명적인 폭력에 의한 위협을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극형에 대한 위협은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줄곧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회통제의 수단, 사회 규범에 반대하는 형태에 대한 제재, 그리고 종국에는 지배의 수단으로 존재합니다. 자연 질서로서의 죽음, 즉 죽음의 존재론적 긍정은 현실적 삶에 이르는 필요 불가결한 관문이고, 순수한 인간의 경험으로서의 죽음은 현실적 삶을 풍요롭게 하나, 제도화한 죽음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에서 지배자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죽음/죽임의 위협에 대하여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몸을 죽일 수 있고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나의 친구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친구로서 예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죽음/죽임의 협박에도 당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여러 가지 불편함과 불이익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자신 있게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죽인 후에도 게헨나에 던질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죽인 후에 게헨나에 던질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를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분’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리고 게헨나를 지옥이라고 번역하고 몸을 죽이고 영혼을 지옥에 던질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하느님의 섬세한 사랑과 서로 맞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게헨나는 여러 번 나오는데, 천국의 상대 개념인 지옥, 죽은 이후에 영혼의 형벌 장소로써의 지옥으로 번역하기에는 전체 문맥상 무리가 있습니다.
게헨나는 예레미아가 말한 ‘살육의 골짜기’라는 뜻인데,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고유명사인 힌놈(Hinnom)이 합성된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몰록에게 제 자식을 인신 공양 한 장소이기도 했으며, 요시아 왕 이후 그 골짜기는 처형장으로 변했으며, 짐승의 사체와 시신을 태우는 화장터로서 오래도록 오물과 구더기가 들끓고 항상 악취가 풍기는 고약한 곳이었습니다. 이는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강제적인 살육을 말합니다.
따라서 죽인 후에 게헨나에 던질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불신자들을 지옥불에 던질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 교리상 천국의 영생과 지옥의 형벌을 대조시키며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여 현실 세계의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예수님의 친구로서 사는 일이 죽음의 길이라면 두려울지라도 그 길을 당당히 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참새들처럼 하찮게 여겨지는 세상, 사람들의 노동이 돈에 의해 가치를 잃어버리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의지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은 무엇이고, 수 많은 인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과연 우리의 운명을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을까요? 세계의 연약한 사람들이 그들의 돈 놀음에 언제까지 끌려다녀야 합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머리카락도 헤아리고 계신다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작은 새(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그 참새들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작은 새 여러 마리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 팔려나가는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죽임의 위협에 직면한 친구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두려워 말라.”
인간에 대한 이해나 교리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 창세기 1:26의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입니다. 하느님 형상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 하느님의 형상과 하느님의 모양은 같은 의미인가, 서로 구분되는 것인가?
- 하느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적인 특성만을 의미하는지, 신체적 특징도 포함하는지?
- 하느님의 형상이 인간의 타락 이후 완전히 상실하였는지,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지?
- 하느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 관계인지?
- 하느님의 형상은 내용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 하느님의 형상을 통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관계적인가 존재적인가?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기독교의 일반적인 이해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그 형상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동양적으로 이해하여 불교에서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는 불성이라고 말하거나 최제우의 말을 따라 시천주(侍天主;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비교종교학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먼저 성서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의 형상, 즉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하느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한,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정착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벨론의 창조 이야기와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비교할 때에 이스라엘 창조 신앙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창조는 인간에게 고된 노동의 짐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조화롭게 경작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나 왕족만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고백은 어린이나 어른, 여자나 남자, 노예나 자유인 등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이 존귀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느님의 형상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인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생명권의 근거가 됩니다(창 9:6).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입니다. 바벨론과 고대근동의 창조 이야기와 현실에서도 ‘신의 형상’은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왕이나 왕족의 소수에게만 부여되었던 특권이었지만, 성서에서는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다릅니다. 몇 명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은 차별의 근거가 되고 사람을 나누고 운명을 강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창세기는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모든 사람이, 모든 생명이 소중하고 존엄한 하느님의 형상임을 말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바로 당신이 하느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며 동시에 완전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하여 존엄한 권리를 강조하거나 인간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은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절박한 고난의 현실을 뚫고 함께 아파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과 인간의 모습 사이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향하는 인간입니다. 하느님의 형상도 모든 인간을 지향하고, 자기 비움이나 자기 낮춤도 동료 인간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손을 쭉 펼치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인이나 한 사람만을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하거나 자기만을 위한 비움과 낮춤은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되는 원인입니다.
히틀러가 전쟁을 준비하며 독일을 정신적으로 통합할 때에, 독일의 거의 모든 교회와 신학자들은 히틀러를 위대한 영도자로 추앙하며 지지했습니다. “우리는 영도자의 인물 속에서 독일을 역사의 주 앞에 세우고 말의 예배, 레위인과 바리새인의 예배로부터 사마리아인의 거룩한 예배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자를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위해 목사가 되려고 결심한다.”<레플러> “강력한 민족적 운동이 우리 국민을 사로잡고 열광케 하고 있다. 자라나는 독일 국가 안에서 제국의 원대한 개혁이 표명되었다. 역사의 이 전환점에서 우리는 감사하며 그것이 옳다고 말하고자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는 독일국민의 구세주로 자처하였습니다. 이때에 고백교회의 중심적 위치에 있던 칼 바르트는 하느님은 인간들과 같을 수 없는 ‘절대 타자’임 강조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인간임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 국민들에게 구세주로 추앙받는 히틀러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주장이 바르트의 종교 비판에서 나타납니다.
인간이 자기를 비운다고 하는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비워 겸손하게 됨으로써 더 큰 교만이 자기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웃과 아픔을 함께 하고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空의 관계성입니다. 예수님과 관계성을 가진 자기 비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하느님과 관계성에 있는 자기부정은 하느님을 내 속에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과 관계를 맺는 자기 비움, 자기부정은 함께 만나서 짐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존엄성이든 겸손이든, 그것의 지향은 동료 인간들, 다른 생명을 향할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