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30:1-5, 골 1:3-14, 눅 12:22-34
혼인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혼인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합니다. 해도 후회가 남고. 안 해도 후회가 남는 일이 있다면 하는 게 좋을까, 안하는 게 좋을까요? 어차피 둘 다 후회 할 거라면, 하는 게 좋지요! 왜냐하면 하고나서 하는 후회는 반성을 하게 돼서 앞을 보게 하지만, 안 하고 나서 하는 후회는 미련이 돼서 뒤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륜지대사라고 하는 혼인은 중요한 일이기에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혼인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한다면 누구와 할 것이냐. 혼인뿐만 아니라 작고 소소해 보이는 일상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과거에 내가 선택한 일들의 결과이고, 지금 내가 선택하는 것은 나의 미래가 됩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현재 모습은 이전에 우리가 선택한 것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지금은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잘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심 끝에 결정한 일에 대해 후회하곤 합니다. 이처럼 후회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특정 대안을 선택을 함으로써 유발되는 대안적인 즉 선택되지 않은 ‘가능 세계’로부터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경기에서 금메달을 놓친 2등이 메달권에 가까스로 들어간 3등보다 만족도가 더 낮을 뿐 아니라 1등을 하지 못한 후회의 감정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모두 1등을 원하지만 현실에서 2등은 1등을, 3등은 4등이나 5등을 대안적인 ‘가상 세계’로 상정하기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후회의 감정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내포된 책임감이 선택에 따른 후회의 또 다른 이유입니다. 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발생되는 일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후회를 느끼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는 버스나 기차를 놓친 사람들은 모두 탈 수 있는 기회를 놓쳐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도착 직전에 출발한 경우가 도착 15분 전에 출발한 경우보다 후회의 감정은 훨씬 더 크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택의 기로에서 행한 행동으로 인해 내가 지게 될 책임감이 바로 선택에 대한 후회의 감정을 유발시킵니다.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입니다. 후회는 무언가 다음 상태에 대한 내 행동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포함합니다. 후회는 지금 이 상태에서 느끼는 어떤 감정뿐만 아니라 “이렇게 했더라면” 혹은 “다음에는 이렇게”라는 식의 추가적인 생각을 더 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이러한 생각들은 이른바 ‘경우의 수’를 다양하게 발생시켜 생각의 꼬리물기가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좋고 나쁨을 떠나서 후회는 만족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인지적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택의 상황에서 후회를 제일 덜할만한 선택을 하려 하고, 후회하면서도 후회의 순간을 또 다른 기회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게 됩니다.
신명기 30:1-5은 이스라엘 백성이 “받을 수 있는 모든 복과 저주”를 이미 말했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서 살 때에 그리고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 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 앞에 놓인 복과 저주를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삶 속에서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과적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와 식민지 생활을 합니다. 그 때에 “이제라도” “주 당신들의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명령한 주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십시오.”라고 경고합니다.
자기 삶의 흔적을 돌이키면서 후회하고 “이제라도” 돌아설 수 있는 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삶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느꼈을 때,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리고 삶의 목표를 상실했을 때, 바로 이때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새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앞에 놓은 복과 저주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그 선택은 한 번만으로 확정되지 않고, 삶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잘 선택하여 후회하지 않을 때에도, 잘못 선택하여 후회를 할 때에도 그 선택의 결과는 감사일 때에 선택과 후회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인데 농사를 하지 않는 도시생활에서도 추수는 우리가 한 해 동안에 힘써서 일한 결과물을 상징합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물질적-경제적인 것이든 마음의 성숙이든지 열심히 일하여 이루고 거둔 것을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잘못 선택하고 기회를 놓쳐버렸을지라도 “이제라도” 돌이켜 잘 선택할 수 있다면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즈음에 지난 9개월 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감사드립시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의 조건과 내용을 기도하는데, 그 감사가 한 사람의 감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감사이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몸에 무엇을 걸칠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까마귀를 먹이시고, 수고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 들풀을 화려하게 입히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각박한 현실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위로를 주었고, 이 구절에 의지해서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여 시련을 극복하는 것도 그런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과 무리들의 상황을 조금만이라도 고려하면서 이 구절을 읽는다면, 그리고 이 구절이 단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다면, 예수님처럼 잔인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입을 것이 없어서 헐벗은 민중들에게 이러한 교훈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라면, 그들에게 계속 굶주리고 헐벗고 지내란 말입니까? 이렇게 잔인한 악담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토록 잔인한 사람이었나요? 당장 고향에서 쫓겨나 떠돌아다니는 사람, 먹을 것이 없어서 들에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 목자를 잃은 양떼처럼 방황하고 헤매는 사람에게 오늘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그들의 처지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놀리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런 말씀은 제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라 본문의 바로 앞에 나오는 곡식이 차고 넘쳐서 더 큰 창고를 지어 거기에 곡식을 쌓아놓고 ‘편히 쉬고 놀자’ 하는 부자에게 적당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자기를 따라다니는 무리들을 놀리거나 그들을 단순한 낭만에 빠지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은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믿음이 적은 자들”, “내 어린 양떼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의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낙오되어 떠돌아다니는 가여운 민중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어 하느님의 통치를 몸으로 체험하게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단순히 평화를 얻기 위한 자기 절제나 금욕적 자기 극복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단순히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다. 또한 그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세상에 존재하는 것, 먼 미래에 있는 것, 또는 관념적으로 미화되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님은 종교적 경건으로 채색되어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에 의해 소위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옮기도록 추동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님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도 잘 먹고 있는 까마귀 같은 사람들, 수고하여 길쌈을 하지 않고서도 좋은 것을 입고 있는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 같은 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린 민중들의 삶에 새로운 질서를 찾도록 선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분명히 목가적인 평화를 넘어서 열렬한 평화를 향한 희구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침전된 절망과 함께 격렬한 선동이 숨어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29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염려하며 애쓰지 말라. 30 그런 것들은 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1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번역하겠습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런데 현실을 어떠한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수고 없이 생기고 풍성하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사람에게는 없지 않은가?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거나 부족해서 생명을 위협받고, 정당한 권리를 빼앗겨버린 사람들에게야말로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런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여라. 그러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은 그것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느님의 통치가 도래하면 먹을 것과 입는 것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느님 나라 운동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나는 배고프지 않다’라는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서 현실을 망각하려는 알량한 금욕주의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겉옷마저 담보물로 빼앗겨 스산한 사막의 밤바람을 피하지 못해서 ‘나는 전혀 춥지 않다’라고 자기암시를 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려는 타계적 도피주의로는 하느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의 교우들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해서 여러분이 품고 있는 사랑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두신 소망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믿음, 사랑, 소망이 여러분 모두의 삶에 언제나 스며있어서 서로를 볼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감사할 일들이 더 풍성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9-12절)
다시 주어진 기회를 통하여 남은 3개월 동안에 “이제라도” 더욱 열심히 애씀으로써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못 선택하여 후회하는 일이 있으면 “이제라도” 잘 선택하여 일한다면 연말에는 온전히 감사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주어진 기회를 “이제라도” 잘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 부족한 것이 있어서 후회한다면, “이제라도” 새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는 지금 이 순간을 미래를 향한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더 온전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이제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