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2025 전국대회 주제 강연
삼위일체력에서 본 성부 하나님의 세계
자연과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
-성부 계절 회복/구원 계보구축/ 계명을 주심/ 절기 신앙인 육성-
(창1:1-4, 12:1-3, 미4:1-2, 신16:1-17)
최 부 옥 목사 (말씀목회연구원장)
( 본 강연 내용은 삼위일체력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영역에 관한 발표문이다. 이 중에서 창조절에 관련된 초입 부분은 개혁교회 진용의 대표적인 신학자요 운동가인 루카스 피셔 박사(베른대 교수)의 논제(A Time of Creation,1999,2,9)를 상당 부분 참조했음을 밝힌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전체적인 틀은 예배 전통의 유산인 교회력(敎會曆)을 중심으로 구축된 것이다. 그 굵은 뿌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전통에서 왔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배하며 살아가는 데에서부터 그 길잡이로 제시된 세절기들인 바로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이었다(출23장, 레23장, 신16장 참조).
이 큰 절기들은 1년을 주기로 한 자연의 순환에 깊이 뿌리들 두고 있음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이 절기들은 또한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된 사건들을 기념하게 한다. 양의 첫 새끼를 희생제물로 드리는 봄 축제인 유월절은 그들의 유목민 시절에 기원한다. 다른 세절기들은 가나안 땅에서의 땅의 경작과 관련한다. 7주간 차이로 기념되는 무교절과 맥추절은 보리 수확을 기념했고, 초막절은 포도와 과실 수확을 기념하였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이 세 절기를 지키면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억하며 지냈다. 유월절에는 노예에서 해방된 출애굽을 기억했다. 무교절에는 쫓겨난 자기들이 그날 아침에 반죽한 빵을 발효되지 못한 채 갖고 나왔음을 무교병을 먹으면서 기념하였다(출12:34,39). 맥추절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계시받은 일을 회상하는 절기로 지켰다. 초막절은 광야 40년의 초막에서의 생활을 기념하며, 주변의 약자 돌봄의 훈련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세 절기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 신앙을 견인한 핵심 절기는 7일마다 지키는 안식일이었다(출20:11). 이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창1:31-2:3). 이날은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도 모든 농사 행위를 금지하며 쉬었다. 이 주기는 7년째 되는 해에 땅과 인간과 모든 생명체에게 완전한 휴식을 주는 안식년(安息年)과 그에 얽힌 모든 것을 원래로 되돌려 주는 희년(禧年)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안식일 전통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한 주를 시작하는 첫째 날 곧 주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主日)에 흡수되게 되었다.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주일로 옮겨진 것이다. 핵심 내용도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이 되었고, 성만찬 속에 거하시는 주님의 존재를 기념하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기 위해 모였다. 분명히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인 하나님의 선물이 창조 세계와 관련된 부분으로 내재하고 있음에도,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친교가 강조되면서, 창조 세계와의 관계성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1. 회복된 성부의 계절
이런 중에 교회 간의 발생한 분열은 역설적으로도 교회력의 다양한 모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특히 16세기 종교개혁 이래 다양한 고백을 담은 교회력들이 등장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일치성을 가진 핵심적 절기들은 이렇다.
첫 번째는 7일 단위의 <주일>이다. 전체 교회력의 기본 틀거지를 이룬다.
두 번째는 <부활절>이다. 처음엔 연례적 기념 축제였는데, 이를 중심으로 점차 다른 절기들이 발전했다. 부활주일은 춘분 이후 보름에 지난 첫 번째 주일에 기념했기에, 그 정확한 날짜는 해마다 다르며, 부활절에 연계된 다른 날들도 해마다 다르게 결정되었다. 부활절 전에는, 사순절-종려주일-성금요일이 있었고, 부활절 후에는 승천주일과 성령강림주일로 이어졌다. 이 모든 절기를 총괄하는 삼위일체주일도 첨가되었다.
세 번째는 <성탄절>이다. 이 절기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와 주현일(1월6일)에 따라서 구별되었다. 그런데 이 성탄절은 태양력(양력)의 특정한 날로 확정되어 있어서, 성탄절 주기와 부활절 주기는 서로 다른 계산법을 사용하고 있기에, 주현절과 사순절 사이의 주일 수와 성령강림절과 대림절 사이의 주일 수 역시 해마다 다르다.
이런 기본적인 교회력을 유지하면서도, 세계교회는 교회력이 여전히 시대와 역사의 발전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아직도 교회력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특별히 창조 세계를 존중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날을 교회력에 포함하려는 노력들이다. 더 많은 기독교 집단에서 지금의 환경 위기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 세계의 보전을 교회력에 포함시켜서 예배의 명백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였다.
그중 동방정교회는 9월1일을 교회력의 시작으로 삼고 있는데, 이날을 선정한 이유는 ‘인간과 우주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께 창조 세계의 선물에 대한 감사와 그것의 보전과 구원을 간구하는 날’로 예배하자는 취지에 근거하고 있다. 이날은 비록 5세기 때의 비잔틴 제국의 유산이긴 하지만, 콘스탄틴노플 총주교는 이때의 절기에 시작된 교회력 절기는 창조주 하나님, 선물로 주어진 창조 세계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 및 창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회상함으로써 시작되어야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유럽교회들의 제2차 에큐메니칼 총회(1997년)의 제안에서는 창조 세계 보전에 참여하는 일은 여러 쟁점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교회 생황의 가장 본질적인 차원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간은 마침 세계 각지에서 추수를 기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바람에 세계교회는) 무리 없이 창조의 절기를 기존의 교회력에 도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주님의 탄생에서부터 성령의 강림에 이르는 구속사적 큰 사건들을 축하하는 절기들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모든 생명의 원천(源泉) 이신 하나님을 먼저 기억하게 될 수 있었다.
사실 세계교회가 교회력에 (이) 창조절기를 제정하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는 사도신조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들 모두가 다 함께 교회력에 반영된다. 이제는 창조세계 보전에 대한 책임을 신앙 전체에 공히 자리하게 함으로써, 더 이상 창조에 대한 교회의 부분적 접근을 막아내면서, 기독교 신앙 전체인 삼위일체적 구도를 확고하게 한다. 곧 창조절을 정하면,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며 풍요롭게 된다.
창조절은 교회력의 시작이며 끝이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고 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럼에도 창조절에 우리는 구원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시작과 완성)를 예배한다. 무엇보다도 창조절은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그가 주신 창조의 선물들을 어떻게 사용해 왔으며, 또 미래에는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절기는 교회에게는 좀 더 새롭고 책임적인 삶의 양식을 실천할 기회를 제공한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된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게 이끈다. 그러면서 창조 세계를 누리고 기념할 뿐만 아니라, 그가 겪고 있는 고통(苦痛)도 함께 나눌 것까지 요청한다. 곧 우리의 회개하는 삶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회개는 이제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차원의 회개일 것이다. 결국 창조 절기의 제정과 준수는 그 회개에 기여할 것이며 완수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1999.2.9. 발제)
2. 구원의 계보(系譜) 구축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향한 경영과 심판의 방법은 노아의 대홍수 사건을 정점으로 대변화를 맞게 된다(창8:20-22절 참조). 이는 당시의 범죄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대규모적이고 집단적인 대홍수로 인한 심판의 방식을 포기하시고, 그 대신 인류 중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특정한 백성들을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방식으로 대 전환(轉換)하신 까닭이다.
노아 보도들을 다시 보자. 하나님이 보신 인간 일반은 ‘어려서부터 악’(惡)했다(21절). 곧 사람들에게서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면서, 당신이 그런 존재인 인간을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마음에 근심하실 정도였다(창6:5-7절 참조). 인간 일반이 하나님 앞에는 부패하고, 이웃에게는 그 행위가 포학함이 가득한 연고였다(11-12절).
하지만, 그곳엔 그런 부정적인 인간들만 있지 않았다, 비록 극소수였지만, 그곳엔 노아(Noah)와 같은 전혀 다른 성향(性向)의 인물도 있었다. 세 아들의 아버지였던 그는 당시의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의인이요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할 만한 인물이었다. 하나님으로서는 그런 그를 도저히 불의한 다수와 함께 취급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8-10절 참조).
그러기에, 창조주의 방향 전환은 심판의 대상인 인간들 본연(本然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깊은 성찰에서 나온 은총의 결단이었다. 실로 무참하고 처절했던 대홍수심판을 시행해 보시면서, 여호와는 그런 대다수의 악인을 향해 쏟아낸 당신의 분노와 심판의 칼날 대신에, 비록 소수이지만 그래도 의롭고 바르게 당신의 뜻을 좇아 살려고 하는 남은 자(remnant)들을 앞장세워서, 인간과 세상 경영을 펼치시려고 작정하신 것이다.
곧 노아 홍수 이후에 다시 시작될 세상에서는, 바로 노아와 같은 자들을 축복하고 붙들어 주면서, 그들이 잘되는 모습을 통하여 잘못된 죄인들을 하나씩 되돌려 쓰시려는 방향으로 당신의 인간 돌봄과 세상 역사의 손길을 펼쳐 가시고자 하셨다. 즉 본래부터 부패했던 다수를 향한 관심 대신에, 그 안에서 깨어 살아 있는 창조적 소수를 보다 크고 소중하게 보시면서,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역사를 세워가고자 하셨다.
이 일은 구원사의 대변화를 창출하는 대사건으로서,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가장 크고 반가운 복음적(福音的) 의미를 갖게 한다. 그 까닭은 여호와 자신이 처음부터 스스로의 변혁이 불가능했던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접고, 차라리 모든 상황과 역사를 주도하시는 당신 자신이 그런 불가능한 현실을 가능한 것으로 변혁(變革)시키기 위하여, 먼저 자기의 경영 방법부터 재조정하고 나오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구원자로서의 변신 모습은 후에도 이어졌다. 특히 제3 이사야는 이 점에서 보다 놀라운 증언을 한 바 있다(사57:14-19 참조). 그는 대사면을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 시대의 도래를 공포했다. 그의 예언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여전히 변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두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실 것인지에 대하여 증언한 것이다. 그 방법도 역시 하나님의 자기 혁신이었다.
곧 하나님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계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소생(蘇生)시킬 것이라면서, 당신이 더 이상 백성들과 끊임없이 다투거나 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 까닭은 당신 백성의 여린 영혼들이 당신 앞에서 피곤할까 염려하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징벌이나 매질 대신에(17절), 그들의 온전함을 위해 당신이 선제적으로 나서서, 그들의 거치는 것을 제하시고(14절), 소생시키며(15절), 고쳐 주어서 위로를 다시 얻도록 하시겠다고 다짐하셨다(18-19절).
그야말로 여호와는 더 이상 무섭고 책임 추궁하는 두려움의 신이 아니라, 부족한 자식을 먼저 불쌍히 여기며 감싸주는 은혜를 베푸는 자비의 아버지인 여호와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신 것이었다. 실제로 이 예언은 성자 예수의 오심을 통하여 완전히 성취되었다. 특히 탕자(蕩子)의 비유에서 그 주님은 그 실체를 보여주셨다(눅15:11-32 참조). 동시에 보혜사 성령의 시대도 여시며, 연약한 인간이 소생(蘇生)되는 시대도 활짝 열어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겸허(謙虛)하심은(마11:29-,빌2:5-11 참조) 결국 연약한 인간들로서는 살길을 찾게 되었고, 복음의 능력도 맛볼 수 있게 하였다.
집안의 변화는 어린아이에게서 보다는 어른 자신에게서 나올 때, 그 효과가 발휘된다. 아이들은 어른의 변화를 보고 배우며, 바르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창조주의 인간을 위한 주도적인 낮아지심은 어찌 인간들에게 파장을 크고 놀랍게 안겨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두려운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하나님을 뵙게 된다. 심판의 주보다, 자비와 긍휼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 정죄의 하나님 대신에 용서와 포용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미숙함과 부족함을 보면서, 자신의 책임부터 걸머지시려는 은혜의 하늘 아버지를 만나게 한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성부 하나님을 당신의 사람(제자)들에게 전하고 엮어주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하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훈련 시키셨다 - 마6:9 참조).
결국 하나님 구원사의 방향 재조정은 소수의 의인 중심으로 풀어가는 쪽으로 정립되었다. 그런 하나님의 결심과 실행은 아브라함을 역사의 무대에 불러세우시면서, 본격화 되었다(창12장 참조). 노아의 장손인 샘 족의 후손(11대손)으로, 메소포타미아와 하란에 걸쳐 살아왔던 무명 인사 아브라함을 블러 앞세우신 것이다(마1장 참조). 그가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주요 내용들이 담겨 있다.
1) 그는 유대인의 조상이지만, 본질상으로는 이방인과 나그네(떠돌이)였다. 이는 그의 신분은 그가 어느 특정 족속이 아닌 범 세계인의 믿음의 조상이기를 적합하게 한다. 그는 또 아버지 데라가 우상(달 신)을 섬기던 바탕에서,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는 그가 특정 종교에 차별 없이 모든 종교인의 조상도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2) 그를 만나주신 여호와는 그에게 두 가지 차원의 복을 안겨 주셨다(창12:2-3). 먼저는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이었고, 그 후엔 자신이 받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웃)에게 나누어주는 복이었다. 이는 그와 그의 후손들 모두가 진정 참 복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아주 특별한 소명이 부여되었음을 말해준다.
3) 그 복의 실행 도구는 사랑이었다. 곧 자기에게 복을 안겨주신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했고, 그다음은 이웃도 사랑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랑은 상호 하나를 버리면 둘 모두를 잃게 되는 완전한 옵션 사랑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숙명적으로 얽힌 사랑이었다. 따라서 이 사랑 실천 공식은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은 물론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의 구원과 운명을 점검할 절대 핵심 포인트가 되었다(눅10:25-28). 아울러 이 하나님 사랑에서는 예배와 순종과 복종과 희생적 삶이 따랐고, 이웃 사랑에서는 선교와 섬김과 돌봄과 겸손과 용서의 영성이 자리하게 되었다.
4) 각 성도는 바로 이 이중적(二重的) 사랑 실천 여부의 잣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의 삶에서 이 사랑의 균형이 살아 있으면 영생을 받지만, 무너져 있거나 깨져 있으면 아브라함 후손의 자격을 실격 받게 된다. 특히 둘 중에 한쪽만 살았으면, 그 신앙은 불구 신앙이 되어서, 그는 극우적 인간이나 집단이 된다. 하나님 사랑뿐이면 우파적 극우로, 이웃 사랑뿐이면 좌파적 극우로 치우친 존재가 되었다.
5) 지금 세계는 물론, 한국교회의 극우 현상도 무척 심각한데, 살펴보면 역시 이런 사랑 균형 상실이 주원인이다. 그 바람에 이 세계는 지금 뿌리로는 모두가 아브라함 후손 된 자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교파 분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지금은 다시 아브라함의 후손 됨의 제대로 된 위치를 되찾는 신앙(말씀) 운동이 너무도 시급하고 절실하다.
3. 진리의 계명(誡命-말씀)을 받은 민족
430여 년의 애굽에서의 난민 생활을 해왔던 야곱 자손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 이미 가족 단위가 아닌 민족(民族)을 이룬 상태였다. 그로 인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조상으로 둔 히브리족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이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그들 스스로 부르기도 했고,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부른 호칭이기도 했다(창14:13, 40:15,출3:18: 삼상4:6, 욘1:9 참조). 주전15-12세기에는 애굽에서 노동하던 외국인을 ‘아(하)비루’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본래 노아의 장자인 셈족 계보에 들어있었다(창10:21, 11:10-26 참조). 포로기 이후에는 유다인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했다(고후11:22, 빌3:5). 아람 말을 사용하는 팔레스틴 출신의 유대인을 가리키기도 했다(행6:1 참조).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인 이 히브리 백성인 이스라엘을 세계 모든 민족 중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에서 일하도록 그들을 성별하셨다. 그 바람에 이들에게는 이 세상 그 어느 백성에게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창조주 하나님이 그들과 일찍이 만나주셨고, 상대해 주셨으며, 가까이해 주셨다(신4:7). 그래서 일찍부터 늘 하나님 곁에서 살아가는 백성이었다(4:4). 실로 하나님의 압도적인 애정과 공력을 받으면서, 민족으로 성장하게 된 그들이었다. 출애굽 사건과 광야 생활은 그중 하이라이트였다!
이렇듯, 세상 그 어느 민족도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랑 속에서 살아온 그들은, 그것이 영광이면서 동시에 부담과 멍에도 되어, 그들이 온 세계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제 그들의 특별한 위치들을 확인해 본다.
1)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게 될 그들을, 온 세계 민족 앞에서 ‘큰 나라 큰 백성’이 되게 하셨다(신4:6-8, 26:16-19 참조). 이는 인구나 땅덩어리나 국방력에서 크고 강해서 제국과 같은 나라이기를 바라셔서가 아니다. 즉 외형적 크기를 말하는 ‘Big’이 아니었다. 그 대신 세계인들이 갖지 못한 깊은 지혜와 큰 지식을 말했다. 가치와 위엄을 드러내는 ‘Great’였다.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와 백성임을 세계인이 알아보고, 놀라며 존경하고 배우고 싶어 찾아오는 그런 민족이기를 원하셨다. 진리와 지혜와 지식의 강국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다.
2) 그러기에 그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그 생활 문화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온통 하나님과 그 말씀이 중심이 된 신앙의 나라와 백성이 되어야만 했다. 이를 위하여 여호와는 그들에게 먼저 당신의 언약(言約)의 말씀을 위탁하시면서, 그 언약을 지켜 행할 것을 전제로 하여, 그들을 모든 민족 중에서 당신의 직계 소유(所有)로 삼으셨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셨다(출19:5-6절). 그러면서 온 세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안내자로 살게 하셨다(창12:3).
3) 그들은 그런 막중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주신 <모세>와 <예수>라는 매우 특별한 인물들을 상대하면서, 자신들과 온 만민을 먹여 살리게 될 진리와 생명의 말씀인 율법(律法)과 복음(福音)을 받아먹고 살아야만 했다(미4:1-2 참조). 미가 선지자의 증언을 보자.
- ‘이는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殿)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道)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4:2절).
4) 여호와께서 그때 그의 말씀을 주신 방법은 계시(啓示)와 언약(言約)이었다. 시내산에 도착하면서 본격화된 말씀 전달이었다(출19장).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들은 그 말씀을 모세가 백성에게 전하면, 백성들은 그 말씀을 삶의 규례와 법도로 받아 준행하였다(신5:1). 그런 중에 여호와께서 획기적인 기록물을 돌판에 직접 써서 모세에게 내려 주신 일이 발생했다. 바로 돌 판에 새겨진 십계명(十誡命)이었다(신5:22).
십계명 내용의 기본 틀은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구체화한 내용 열 가지였다. 앞부분인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담아 주셨고, 뒷부분인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는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각각 압축하여 담아 주셨다. 그렇게 해서 백성이 율법으로 받은 총 숫자는 613가지였으나, 그것들 역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굵은 주제를 실천할 세부적 내용들이었기에, 이 십계명 중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가슴에 담고 삶으로 지켜 행하면, 하나님 말씀 전체를 큰 틀에서 준행하게 된다고 볼 수 있었다.
5) 모세는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일을 위하여, ‘쉐마 이스라엘’이란 교육헌장을 제정 공포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 데 있어서는, 각 집이 본인-아들-손자로 이어지는 삼대 신앙의 혈맥(血脈)을 구축함으로써, 그 축복의 날을 중단없이 이어가게 하라고 당부하였다(신6:2-4 참조). 이때의 하나님 사랑의 강도(强度)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였다(5절, 눅10:27). 그 바람에 유대인은 여호와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겨들으며 살았고, ‘매주자’라 불리는 말씀의 표를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까지 기록해 붙여서 말씀의 의식화를 도모하며 살았다.
이런 삼대 신앙의 보전과 유지의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그들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와의 전쟁의 패전으로 2,000년에 가까운 나라 없는 떠돌이 세월 속에서도, 쉐마 신앙의 맥을 통하여 믿음과 율법이 살아 있는 가정을 지켜냄으로써, 2차 대전 직후, 때가 오자 즉시 빼앗겼던 나라까지 되찾아, 지금의 저 탁월한 이스라엘이라는 위용을 온 세계에 보여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6) 하지만 부정적인 흐름도 있었다. 바리새인 중심의 율법 종교는 정죄 집단이 되어, 이웃 사랑의 축(軸)이 무너져버린 과오를 범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영적 지위를 상실하면서, 그 이웃 사랑을 회복하시려고 성육(成肉)하신 메시아 예수로부터 ‘마귀의 자식’이란 거센 책망까지 받았다(요 8장 & 복음서 전반). 그럼에도 회개치 않고 예수를 증오만 하다가, 끝내는 자기의 치부를 비판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역을 도맡기까지 했다.
요즘의 팔레스티나를 향한 이스라엘의 말살 정책을 지켜보면,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원 조상인 아브라함의 온전한 후손이 못되고, 옛적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로 그 바리새인들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여전히 아브라함과 예수로 이어지는, 원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복음과는 상관없는 자신들임을 입증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서 왜 극우(極右)가 나오고 있는 지도 입증할 생생히 자료가 되고 있다.
7) 성자 예수께서 영생(永生)의 길을 묻는 사람에게 주신 답변의 내용을 주목해 보자. 그가 답변한 말씀에는, 십계명 중 이웃 사랑 부분을 재확인하셨다(마19:16-19 참조). 특히 상대가 부자임을 아신 주님은, 그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이웃 사랑의 부분을 과제로 주시면서, 가진 것을 처분하고 가난한 자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만 하셨다. 그렇다. 십계명 실천은 율법 차원에 갇힌 계명이 아니다. 이웃 사랑도 꼭 실천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강력한 계명이다.
8) 우리의 이웃 사랑은 어느 정도 수준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지침으로서는, 예수님도 모세 율법인 레19:18의 내용을 존중하셨고, 사도들도 그리하였다. 곧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수준을 견지하였다(눅10:27,갈5:13,약2:8 참조). 따라서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내가 내 몸을 과연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숙고하는 일이 필요하다. 알게 되면. 이웃 사랑의 방법도 쉬(容易)워지기 때문이다.
내 몸은 사지백체(四肢百體) 오장육부(五臟六腑)로 서로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토록 다름과 기능상의 차이가 있음에도, 내 몸은 서로에게 전혀 갈등하지 않고 오히려 모두가 서로 아끼며 차별 없이 사랑한다. 한 지체가 아프고 문제가 생기도, 책망하거나 따돌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건강한 지체들이 그 아픈 지체의 회복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협력한다. 부끄러움도 덮어준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산다. 우리 이웃 사랑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바로 자기 몸 안의 그런 사랑의 질서를 본받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인과응보 사상도 버리자. 정죄의 몫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비록 상대가 아무리 죄인이고 우리에게 원수라 할지라도, 우리는 상대를 정죄하는 것 대신, 사랑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에게는 시종일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뿐이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요8:11)란 말씀에서도, 주님은 자신에게 있는 정죄권이나 심판권 사용을 아예 자제하셨을 정도였다. 우리는 내 마음에서 이웃 사랑의 마음을 삭제시키는 미움과 저주의 함정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9) 성자 예수님은 진리(말씀)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요18:37). 당신의 나라 진리를 증언하려고 오셨다. 오셔서 그는 위선적이고 거짓된 진리 훼손 세력과 싸우셨다. 그 위선 세력의 특성에는 하나님 사랑 측면만 고집하였고, 이웃 사랑 측면에는 아예 무시하는 잘못된 자세를 드러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잘 믿는 자요 자기들과 같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자로 살았다. 그런 그들이 유대교의 율법 종교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기에, 그 체제하에서는 죄인들만 양산해 낼 뿐이었다. 힘없는 자나 이방인에게는 영혼이 회복될 기회가 전무했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그런 독선자, 극우 종교인들의 아성을 깨고자 짊어지신 대속물이었다. 죄인들과 약자들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주시고자 희생하신 현장이다. 사실 바울도 그곳의 극우적 사람이었으나 그를 찾아오신 예수를 극적으로 만나면서, 자기가 잘못된 것을 발견한 후에는 깊이 회개하고,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전하기 시작하였다(행 9장). 교회 공동체는 그렇게 바울처럼 회개한 자들이 모여든 곳이다. 그러면서 혈육 차원이 아니라 믿음 차원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는 거듭난 사람들이 진입해 와 새 물결을 형성한 곳이다.
10)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때의 바리새파는 예수 부활을 끝으로 그 세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바울의 선교 전선에도 그들의 준동이 계속 이어지면서, 거룩한 교회를 계속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 특성은 여전하다. 이웃 사랑 없이 하나님 사랑에서 구원을 찾겠다는 자들로 완고하게 자신의 존재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를 중심으로 이방인 초대교회에서 그들은 광범위하게 거짓 교사들로 행세하면서, 교인들의 믿음을 허물고 있었다.
11)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기장 교단은 어떤가? 지난해 12,3 윤석열 내란은 그들 권력자들의 오만과 무모함을 만천하에 드러난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우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부끄러운 민낯도 여과 없이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교회들이 얼마나 비(非)복음적인지, 이념과 권력지향적인지, 또한 바리새적인지, 그리고 얼마나 폭력성을 띤 극우성향의 집단인지를 두루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윤석열 집단은 출생 자체가 옛 이스라엘의 바알 종교 주의자인 아합과 이세벨과 유사한 무속(巫俗)과 이교(異敎)집단 출신이었다. 게다가 친일. 친미 등의 사대주의를 발판으로 삼은 정권이었고, 가진 자와 검사 권력을 발판 삼은 거대한 폭력 세력이기도 했다. 그런 데에다 최근엔 통일교와 하나님의 교회란 이단 집단의 인적 물적 조직적인 지원까지 받아, 정권이 출범한 일도 폭로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 그들인데도, 한국교회 보수계 지도자들은 분별없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결탁하면서 지지하고 축복하며, 극우세력의 본산임을 숨기지 아니하였다.
그 바람에 한국교회는 세상의 비판과 불신을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코로나로 인한 교인 감소의 흐름에 이어서 이번의 내란 공조(共助) 세력이라는 비난까지 받게 되면서, 교세와 신뢰도는 더욱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번의 피해는 한동안 회복하기가 어려울 전망이다.
12) 이런 중에 우리 교단 기장(基長)은, 내란에 대한 대응에는 그런 보수 측과는 달리 비교적 정의롭고 성숙하게 대처하였지만, 그러나 뜻밖에도 동성애와 성소수자 문제로 교단 내부의 양분화된 대치 현상으로 인하여 큰 곤경에 처하였다. 그것은 일명 <궤어 신학>이란 동성애자들을 위한 신학에 대한 우리 안에서의 접근 양식의 차이로 인한 대립과 갈등 때문이었다. 그들 공격자들은 교단을 위한 행동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언행을 보면, 매우 바리새적인 측면이 강하다. 문자주의와 정죄의 칼날이 너무 날카롭고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4. 신앙 절기(節氣)를 세우시고
절기는 어느 민족이나 집단에게나 다 있다. 그들은 절기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계속 재확인하고, 서로의 결속과 단합을 도모하며, 자연과 인간들과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 절기는 그 민족의 문화와 풍습과 영성까지 보유한 것이어서, 매년 정기적으로 지키는 절기는 소속원들에게는 매우 소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도 년 중 24절기들이 있듯이, 이스라엘에도 절기들이 많다. 우리네 절기들은 대체로 자연과 기후에 차원에서 맺어진 민속적(民俗的)인 것들이라면, 이스라엘의 절기는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과의 믿음의 차원에서 맺어진 신앙적(信仰的)인 절기라는 점에서, 그 특성이 있다. 성경은 이 절기들을 “여호와의 절기”(-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라고 부르고 있고,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그 절기들을 성회(聖會)로 지키라고 명령하신 제도들이다(레23장 참조).
그들 절기의 전반적 내역(內譯)은 레23장에 집약되었지만, 그중에 핵심인 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과 초막절에 관련된 기록은 출23:14-17과 신16:1-17에 집중되어 있다. 그 세 절기가 갖는 특성은 해방절인 유월절(무교절)은 하나님 사랑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추수절인 칠칠절과 초막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는 특성을 가진다. 특히 이 세 절기 때에는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나와야만 했고, 그것도 빈손이 아니라 받은 복을 헤아려 예물도 드려야만 했다(신16:16).
그래서 그런 절기에 대한 일관되고 지속적인 준수(遵守)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원히 택한 백성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 삶을 좇아 사는 존재로서의 훈련도 받았다. 이제 그 주요 절기들의 내용을 살펴보자.
1) 안식일(安息日)이다.(-the Sabbath-레 23:3) - 모든 절기의 기장 기초적 절기이다.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쉼과 거룩을 누리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일곱째 날에 모든 노동을 멈추고 성회로 모인다. 이날은 품삯을 위한 일체의 노동 행위도 금지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답게 사는 삶에 참여한다. 이 안식일 제도는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일요일로 고정되면서, 주일성수 행위로 이어졌다.
2) 유월절(踰越節)이다.(Psassover-출12장, 레23:5)- 430여년의 애굽에서의 노예적 삶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때를 한 해의 시작인 정월(니산월)로 삼았고, 출애굽 직전 일인 14일 저녁에는 온 백성이 가족별로 어린 양을 잡아먹는다. 이때의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이어야 한다.
이때 고기는 불에 구워 무교병(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는 그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다. 그 피는 그 후에 있을 애굽인 집안의 장자들을 치는 심판 때에 면제나 속죄의 징표가 되어, 그 집의 장자들이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 유월절을 맞이할 때마다,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면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피로 구원받음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린다. 후에 성육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 죄를 지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유월절의 그 어린 양으로 오신 이임을 인정하시면서(요1:29),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어야만 영생을 얻으리라 선언하셨다(요6:53-57참조). 이로 인해 성만찬 예전은 우리 기독교 신앙과 예전에 핵심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 절기 신앙이 자리하면서, 그 파장도 컸다. <첫 열매 신앙>의 근거도 되었기 때문이다. 장자의 특권과 무게가 남달랐다. 사람은 물론 짐승이나 땅의 소산까지도 처음 난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했다(출13:2, 신26:2 참조). 아벨 예배의 특성(창4:4)도, 아기 예수의 예루살렘 정결 예식의 참여도 그 신앙에 기인하였다(눅2:23-참조).
한국 성도들의 신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첫 것이 복되어야 나중의 것들도 복되다’는 믿음을 발판 삼아, 자신이나 자손을 드리는 서원(誓願) 행위들이 잇따랐고, 첫 것에 대한 성별(聖別) 신앙도 이어지면서, 주일성수 하는 일, 십일조 드리는 일, 새벽기도에 하는 일, 성미(誠米) 생활에 힘쓰는 일 등등의 믿음 생활의 굵은 줄기들을 세우는 데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3) 칠칠절(the Feast of Weeks-맥추절-오순절)이다. (출34:22, 레23:15-22, 신9-11)
한 해의 첫 추수인 곡식(보리)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50일째 수확의 완성을 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리는 절기이다. 이때는 받은 은혜를 헤아려 자원하는 감사 예물을 여호와께 드린다.
집에 가서는 가족과 함께 주변의 이웃들을 향해서 받은 축복을 함께 나누는 섬김의 행위를 했다. 곧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 대상은 성(城) 중에 있는 레위인, 집에 있는 나그네, 주변의 고아와 과부 등의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하는 손길을 펼쳤다. 그러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곡식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모든 소산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고백하며 보낸다.
후에 신약의 초대교회에서는 성령께서 이 오순절에 강림하셨음을 생각하며 이 칠칠절을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律法)을 받은 날로도 기념하는 절기로도 지키기도 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이 절기에 년 중 첫 수확 곡물인 보리 추수를 감사하며 맥추(麥秋) 감사주일로 지키고 있다. 바라기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이 감사 절기를 이웃 사랑의 기회로 폭을 넓혀가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4)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출23:16, 레23:33-43, 신16:13-15)이다.
한 해의 두 번째 추수인 포도와 올리브 열매를 소출한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키는 감사 절기이다. 이때는 특히 자기들을 광야에서 보호하신 하나님 은혜를 추억하며, 7일 동안을 초막에 거주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을 체험하기도 한다. 또한 그런 자기들에게 먹거리를 주시고 수확하게 하신 여호와께 감사의 제사도 드린다.
이때도 맥추절처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행사도 실천한다. 가족들과 노비와 그의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손님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추수한 것들을 나누며, 함께 기뻐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하는 일을 전개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그들과 삶에 내려 주시는 복을 받는 체험도 하게 된다.
세계교회와 우리 한국교회 역시 이 절기를 전승해서, 매년 11월 셋째 주일 내지 그 전후로 하여 한 해에 두 번째인 쌀 추수를 하게 하신 하나님께 추수 감사 제사를 드린다. 그러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선행에도 참여한다.
o 그 밖에도 이스라엘에는 여러 국가적, 민족적 국난을 겪어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들이 있다. 마치 우리의 3.1절 만세 사건, 8.15 해방일 등과 같은 기념일들이다.
1) 무교절(the Feast of Unleavened Bread)이다.(출12:15-20, 레 23:6-8)
이스라엘 백성을 7일간에 걸쳐 출애굽하게 하신 때를 기념하는 절기이다. 급하게 그곳을 빠져나오게 한 것을 기억하면서, 7일간 누룩 없는 무교병만 먹는다. 첫날과 일곱째 날은 성회로 모인다. 죄와 누룩 없는 정결하고도 거룩한 삶 강조하는 절기이다.
2) 수전절(the Feast of Dedication at Jerusalem)이다.(요 10:22, 외경 마카비서)
BC 165, 마카비 혁명을 통하여, 헬라 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중수하여 하나님께 다시 봉헌하게 됨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대교에서는 8일간에 불을 밝히며 하나님의 임재와 빛을 기억하게 하였으며, 예수께서도 그 절기 축제에 참여하셔서,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놓고 유대인과 토론 하시기도 하셨다.
3) 부림절(Purim celedrated)이다.(에 9:20-32) 부림절은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봄 명절로 보이는데, 이는 본국으로 귀향하지 않고 바사의 동부 지역에 머물던 유다인들이 당시의 권력자인 하만의 음모로 몰살을 당하려다가, 동족인 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