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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강연 - " 역사 전체에 변혁을 주신 예수 "(1) / 제5차 전국대회

관리자 2023-10-18 (수) 10:05 1년전 250  


                                                                    역사 전체에 변혁(變革)을 주신 예수 (1)

                                                   -자녀의 시대를 열다/자녀의 삶이 제시되다/ 하늘 가족이 탄생하다

                                                                          (눅2:14, 사11:1-10, 엡2:14-22) 

                                                                                                                                                               최 부 옥 목사 (연구원장)


다시 뵙게 되어 반갑다. 이번 주제는 본 교단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삼위일체력에서 성자 예수님의 부분을 집중하려 한다. 이는 지난해,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이어진 영역이기도 하다. 성자의 사역을 배우고 익히는 절기들은 년 중, 4절기가 있다. 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이다. 그런데 이 성자의 4절기 분야를 오늘의 주제 강연에 다 담아내기란 너무 벅찼다. 분량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절반인 성탄절과 주현절에 관련된 사역들 부분에 집중하였다. 


그런데 여기의 핵심 사항으로 발췌할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심이 컸다. 그래서 발견한 부분이 가족(家族) 관계를 활용한 성자의 구원 사역이었다. 그중에서도 하늘 가족이신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의 구원과 역사 변혁을 위하여 쌍끌이하듯, 함께 동역하시는 모습이 새롭게 들어왔다. 가족의 힘과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시면서, 거기에서 나온 무한한 사랑과 연대의 힘을 발견한 것이다. 본래 가족은 가장 소중하기에 잘 활용하면 인생을 풍성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영역이지만, 소홀하면 인생을 가장 원한과 미련 속에서 후회하며 살게도 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예수님의 가족 관계 활용을 통한 구원 사역을 잘 배우면, 우리 삶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우선 우리의 삶의 현장 문제들을 잠시 살펴보겠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사롭지 아니한 종말론적 상황들로 보이는 두 가지 퇴락 현상을 먼저 거론하려고 한다.


첫째는 인구(人口)의 퇴락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인구소멸 현상에 직면하여 있다. 세계적인 인구학자인 데이비드 콜먼(옥스퍼드대)은 2750년에는 한국이 소멸하리라고 전망했다. 그것은 한국의 급격한 초(超)저출산율인 0.78을 보면서, 한국을 인구소멸 1호 국가로 본 것이다. 이는 OECD 38개국 중 꼴찌이다. 이스라엘이 2.9명으로 1위이고, 우리에 앞선 37위 국가인 이탈리아의 1.24보다도 훨씬 밑이다. 6년 전만 해도 40만 명 대였던 출생아 수는 지난해에는 249,000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붕괴에 빠져든 것이다. 이 일로 농어촌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도시의 초등학교까지도 통폐합이 추진될 정도가 됐다.


둘째는 교회의 퇴락이다. 어린이교회학교가 급속이 몰락하고 있다. 어린이 중심의 교회학교는 옛말이다, 이미 청년에서 장년, 장년에서 노년 중심의 교회 체제로 대변혁을 겪고 있다. 어린이-학생들 성경학교가 개교회 차원에서 되지 못하기에, 지금은 교회들이 연합해서 개최하는 경향으로 흐른다. 얼마 전, 본 노회 소속 5개 교회들의 중고등부 연합수련회에서 본 충격 현상들이다. 제법 규모 있는 중견교회들이 학생들을 모임에 5명 보내기가 힘겨울 정도였다-! 


교회의 암울한 미래가 아닌가! 신앙 3대의 틀이 견고해져야 미래가 있는데, 지금의 생산력 감소는 이 모든 가능성을 아예 포기하게 만든다. 그 빈자리를 요즈음 애견들이 차지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마저도 힘겹게 아이를 낳다 보니, 아이들이 우상(偶像)이 되었다. 키우는 일도 큰 부담이다. 따라서 아예 결혼과 출산도 기피한다. 악순환에 우리는 이미 깊이 빠져들었다. 


자녀 사랑의 방식도 크게 왜곡되면서, 요즈음 학교 선생들이 어린 제자들 돌봄에 눈물짓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담임선생을 ‘아동학대죄’로 고발하겠다고 위협하지를 않나, 심하면 선생님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나, 학부모가 담임교사를 협박하지 않나--, 실로 상상을 넘어서는 시대에 와있다. 오죽하면, 교사들이 20만 명이나 모여서 집단적 항의 시위를 하겠는가! 무언가 대변혁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모두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특히 생명의 주되신 예수를 주로 받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남달리 대처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의 생산적 대응이 시급해졌다. 창조 신앙에 다시 눈이 떠야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조주의 외침을 다시 받들어야 할 때이다. 특히 개혁교회들의 대각성이 필요하다. 교회와 민족 살리는 일에도 뜻을 모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성숙한 가족 목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가족 목회를 우리 목회의 근간으로 삼아야겠다.


<예수의 세상 목회의 특성> : 가족 관계 활용으로, 하나님 세계의 진면모와 그 사랑의 진정성을 맛보게 하시면서 세상 변화를 견인하셨다. 


‘사랑하라’는 메시지(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시작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조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창12:1-2참조).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이 사랑을 온전히 삶에서 실천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랑의 당위성을 머리에는 담고 살았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실천은 힘에 겨웠다. 그러다 보니 종교는 자신들의 허위의식을 은폐시키는 방패막이 역할만 하였다. 


결국 하나님께서 새 방안을 내셨다. 당신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가족인 아들 예수를 인간의 자식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셨고 가족과의 사랑과 애환들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 보게 하셨다. 그래서 가족 목회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한 과정을 친히 밟으셨다. 


잠시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셨던 가족의 특성을 살펴본다. 가족은 법과 원칙이라는 세상의 법질서보다도 훨씬 더 강한 결속력을 갖고 있다. 가족 사이에는 법과 윤리가 그렇게 큰 멍에가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 관계에서 솟아 나오는 자발적 사랑과 헌신과 나눔의 법이 있어서, 그것이 가족 서로를 살린다. 가족은 서로 살리는 무리이다. 가족에는 창조주가 세상에서 찾기 어려운 이해와 인내와 용서와 사랑으로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힘을 이미 주셨기 때문이다.


가족 사이에는 범죄하고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는 복원력(復原力)도 있다. 눅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에는 집 나간 자식을 무한히 기다리고 용납하시는 아버지와 가족의 힘을 잘 보여 준다. 실로 가족이 되어 누리는 특혜는 놀랍고 신비하다. 자신이 스스로 떠나지 않는 한, 버림당하지 않고 또 가족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신적 능력을 가진 가족 세계를 외면한 종교는 구원의 종교도 되지 못한다. 


예수의 선교는 이 가족 관계에 부여된 특성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 가족 사랑을 기반으로 한 목회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역사 전체 변혁의 능력도 이 가족 관계가 주는 놀라운 힘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처럼 상대와 이웃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품을 수 있어야 비로소 세상 만민을 품는 목회나 이웃 사랑이나 내 가족까지도 온전히 살리는 목회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는 복음적 목회가 아닌, 끌려서 마지못해서 하는 율법적 목회를 면치 못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만일 이런 예수님의 인간 세상을 향한 접근방식을 무시하는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역시 가족에게서 나온다. 이는 신불신을 떠나서 최상의 사랑을 맛볼 수 있는 영역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와 목회는 이제 이 가족 관계에 담긴 신적(神的)인 힘을 최대한 동력화해야만 할 때이다. 


사실 이 가족에 관련된 말씀에는 매우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가족으로 상처받은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넘어가야 할 영역이 이 가족력의 회복이 아니겠는가? 그 마음으로 나는 본 강연을 세 가지 틀에서 전개하려고 한다. 모두가 점진적 단계이다. 첫째는 예수가 자녀의 시대를 열다. 둘째는 자녀의 삶이 제시(提示)되다. 셋째는 하늘 가족이 탄생하다. 부디 이런 내용들이 우리 창조적 목회에 큰 지혜와 능력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Ⅰ. 자녀의 시대를 열다 – 새 창조 시대를 열다


1. 야웨란 이름의 하나님은 자존자(自存者)이시고, 만물의 근원이신 여호와이셨다(출3:14, 창1:1). 태초 이전, 영원의 시작을 여신 이시다. 모세에게 자신을 밝히신 내용을 보면, 그는 자신을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밝히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 누구에 의해서 지음을 받거나 낳았던 적이 없었던 유일한 자존자요, 모든 존재들의 근원(根源)이 되신 분이다. 


2. 이런 영원자가 온 세상 만물의 창조주가 되기 위하여 취하신 행동은 특별했다. 온 우주 만물, 그리고 천지와 인간이 사는 세상을 계획하시면서 필요한 양(兩) 축(軸)을 스스로 취하신 것이다. 바로 지혜와 말씀(로고스)이었다(잠8:22, 요1:1-2, 창1:1-5 참조). 


이 지혜는 여호와가 당신을 먼저 낳고 세우셨다고 말한다(잠8:23-25절). 결국 이 지혜는 모든 피조물에 앞서서, 맨 먼저 지어진 인격체이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도 스스로 계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가 아들로 나으신 분이셨다(히1:2-9 참조). 그래서 이 아들은 처음부터 로고스(말씀)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요1:1-3절), 지혜와 함께, 온 세상 만물의 혼돈을 정리하고, 말씀으로 창조의 대업을 질서 있게 이루어 내셨다(창1장, 잠8:30-31 참조). 


결국 온 천지 만물과 그 안에 존재하는 만물들은 모두 이분들로 인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다(창1장 참조). 태초의 역사, 영원 이전의 역사도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활동과 함께 우리에게 계시(啓示)된 영역이다. 따라서 그가 만든 만물에는 그의 말씀이 담겨있고, 모두가 경청해야 할 윤리(倫理)와 책임성이 부여되어 있다. 이는 만물이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이다. 이때부터 성경은 오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집중해서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 세상의 원주인이신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로 전하였고(3:16), 히브리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한다. 그는 약속된 메시아로서의 마지막 아들이시지만(시2:7-8, 막12:6), 창조의 중재자로서는 첫아들이시기도 하다(고전8:6, 골1:16 참조). 아들로서의 그는 창조주의 정확한 모형이셨다(3절, 고후4:4). 창조주와 함께 그는 창조 세계를 말씀으로 만드셨고, 또 뒤틀려 있는 세상을 새롭고 온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요1:1-3 참조). 


성탄(聖誕)은 하나님이 인간이 사는 세상과 생명의 관계를 확실히 맺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신 사건이다. 특히 창조주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모습 안에서 당신을 확실히 보여 주시기 시작한 사건이 성탄이었다(마1:1,16,18-25 참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고 살리시려고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취하신, 아주 독창적인 행위였다. 신이 인간이 되신 일, 그것도 인간의 후손이란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일은, 그의 친근성을 보여 주신 매우 큰 일이었다. 


3. 그렇다면 가족 구성원의 핵심인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하나님과 예수 사이로 대입되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펼쳐진 이유는 무엇일까? 창조 질서의 새 모습을 보여 주려 함이다. 즉 태초에 펼쳐진 ‘무에서 유로의 창조’ 행태는 더 이상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활동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에서 계속됨을 보여주려고 하심이다. 그게 바로, 부모 되기요 자녀 낳기요 거룩한 교회 공동체와 역사 만들기 등등의 창조적인 생산 활동 등으로 변형되고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가족으로 당신의 형상(Imago Dei)을 전할 통로가 되게 하셨다. 기본적으로 한 가정에 새 존재가 태어난 일도 창조 활동이다. 그러기에 새 생명의 탄생을 온 가족이 기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은 이것이다. 곧 생명 탄생이 가족 사이에 안겨주는 사랑의 힘과 그 결과를 알고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랑을 알고 사랑을 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도 억지 사랑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사랑이다. 


이제 예수로 인하여 열린 자녀(하나님의 아들) 시대의 모습들을 살펴본다. 


1.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스스로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일

하게 낳으신 아들이시다(요3:16, 히1:2-9, 5:5,참조). 창조주의 아들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셨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아들은 어떤 존재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다. 심지어 아들의 도리를 다하시는 데에는, 육신의 모친에게까지도 마지막까지 효(孝)를 다하셨다(요19:26-27참조). 


본질적으로 아들은 어떤 존재인가? 그 아버지의 법적 상속자란 특권 이외에도, 그 아버지를 가장 잘 닮았음을 보여 주며, 그 처지를 대변할 결정적인 존재다. 그러기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보유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마14:33 참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분으로서, 평생 하늘 아버지를 찾으며, 그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아버지를 받들며 사셨다. 나중에 자신의 비유에서 밝히신 바에 따르면, 그는 세상을 바꾸실 아버지의 계획을 이룰 최후의 카드로 오신 아들이셨다(막12:6-9참조). 그때 이 아들은 아버지의 전권(全權)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눅10:22, 요5:19-22 참조). 


2. 예수님은 하나님을 언제나 ‘내 아버지’시라고 부르셨다(복음서 전체). 그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交際)는 그의 매일매일의 한적인 곳에서의 기도로 이어졌다(눅3:21, 6:12, 9:18, 29-29, 11:1참조). 생의 막바지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와(막14:36, 눅22:42) 십자가에서의 아버지께 부르짖음에서도 이어졌다(눅23:34,46). 수시로, 매일, 습관적으로, 밤새우시면서, 제자들과도 함께 기도를 통한 아버지와의 동행을 보여 주셨다.


예수의 이런 독점적인 하나님의 친(親)아들 주장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함께 신성(神性) 모독죄로 정죄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가 되었다(마26:62-63, 요19:7, 5:17-18, 8:54, 10:29-33). 사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신 일은 그 시대에 이미 널리 인지(認知)된 사항이었다. 특히 그가 고발당해 고난을 겪으실 때는 사람들의 비아냥 거리가 될 정도였다(마27:40, 43 참조).


3. 하늘 아버지께서도 매우 중요한 시점에서는 당신의 음성으로 친히, 예수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확인해 주셨다. 탄생하실 때(마1:20-21), 세례받으실 때(마3:17, 막1:11), 변화산에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막9:7) 등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당신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요3:18)이라고까지 하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그런 하늘 아버지를 진지하게 소개하면서, 그분이 아들인 당신에게 그의 모든 세계를 다 보여 주셨고, 그것을 펼치도록 전권을 위임하셨음을 증언하셨다(요5:32-37, 5:19-20 참조)


4.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도 확인된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소년 예수 때와 성인 예수로 성전을 방문하실 때에 그렇게 하셨다(눅2:49, 요2:16 참조).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에 설립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배의 처소인 성전이 당신 아버지의 집이라는 점을 밝히시면서, 그에 대한 아들로서의 소속감과 일체감을 직접 표명하셨다. 그러면서도 제 역할을 감당 못 하는 지상의 성전과 일꾼들을 보시고는 그 책임을 물으시며 격하게 분노하기도 하셨다(마21:12-14, 요2:14-16, 요8장 참조).


5. 예수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핵심적 증언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였다.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에서도 오실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눅1:32-35절). 세례 요한의 증언도 ‘하나님의 아들’이었다(요1:34). 제자 베드로의 결정적인 고백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마16:16).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를 본 제자들의 고백도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마14:33). 모든 귀신들도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막5:7). 십자가에서 임종하신 예수님을 지켜본 로마 백부장의 고백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였다(막15:39). 


6. 시험하는 자인 사탄이 예수께 나아와 묻고 확인했던 시험과목들도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었다(마4:3,6, 눅4:3,9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 사탄이 제시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던 일은 의미가 크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격증(資格證) 취득의 건은 예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 된 자들도 사탄이 주도하는 세상으로부터의 제반 승리를 위해서도 반드시 취득해 두어야 할 자격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7. 제자들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시대를 여시다(마6:9 참조). 이 호칭 사용에 대한 허락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의 독특한 아버지와의 관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 요구를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나의 크고 신령한 토대 위에 세우심과 동시에 그들을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과 사명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로 모아들이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상대해야 할 하나님을 ‘너희 (하늘) 아버지’라는 칭호로 사용하셨다. 제자들이 하나님을 아주 친근히 교제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며, 자신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의 삶을 산다는 자긍심을 끊임없이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그의 표현 중에는, ‘너희 아버지’도 있고, 간혹 ‘너의(네) 아버지’라고도 일러 주셨다(마6:4, 6,18).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영원한 아버지가 그들에게 존재함을 일깨우고, 그 하나님과 가족처럼 연결된 존재이기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세상에 나아가라는 점을 독려해 주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녀를 향한 부모의 본능적인 사랑과 이해와 관용이 하늘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임을 생각할 수 있게도 해 주셨다. 아울러 지금의 우리도 더욱 성숙한 어버이가 되도록 이끌어주셨다.


8. 예수님은 잃은 둘째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온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마음을 전하셨다(눅15:11-32). 아버지(부모)의 구원 의지는 깊은 인내와 기대 속에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열려 있음을 알리셨고(요6:37, 44-45), 그 아버지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그 누구나 결코 버림당하지 아니하고 영접받게 되리라는 점도 확고히 전하셨다(37절). 


Ⅱ. 자녀의 삶이 제시되다


우리가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자연히 새 삶의 질서가 따른다. 예전의 세속적이고 육적인 성향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새 삶의 질서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 지침은 예수의 교훈과 말씀과 모범을 통하여 주어진다. 그래서 자기 부정과 자기 몫에 매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서 살아가게 된 새 피조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김호영 장로가 그의 후손들에게 남겼다는 유훈 4계(戒)를 보면, 하나님 자녀의 삶을 잘 대변해 주는 매우 귀한 내용이 올라와 있다 :

☞ 첫째, 생명도 나의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존경하자. 둘째, 육신도 나의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보호하자. 셋째, 자녀도 나의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교육하자. 넷째, 재산도 나의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취급하자.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는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의 관계가 맺어지면서, 모든 인간관계가 수직적 관계나 차별적 관계에서 벗어나, 수평적 관계와 연대적 관계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권-평화-사랑-나눔-공유-용서-화해-일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주님도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을 누리리라‘고 말씀하셨다(마5:9). 

                  

상대에 대한 인간적 조건을 생각하기 전에, 서로 사랑부터 하는 관계가 가능해졌다. ‘먼저 사랑부터 하는 자’라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별칭이었던, ‘티테티우스 OOO’가 가능해진 것이다. 사랑의 인물들이 나타난다.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듯 하는 사랑의 무리가 등장한다. ‘여기까지 만의 사랑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저 손양원 목사처럼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들이 등장한다(마5:43-45). 


실망과 속임과 분노에도 참고 견디며 기다려 주는 사랑과, 기능과 능력에 따라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자들이다. 상대를 위하여 모든 헌신과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들이다. 주고 또 주어도, 더 잘해주지 못함을 미안해하는 그런 사랑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이웃을 향해서는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의 마음을 품고 살게 된다. 분열과 대립이 아니라 평화와 화목의 사람으로 살게 된다. 독선과 독주의 인물이 아니라 공생과 공영과 공존의 마음을 품은 인물이다. 미움과 시기의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위로의 사람이다.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 세상 대변혁을 위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자녀의 삶에 관련된 소중한 가르침들 열 가지로 소개한다. 


1. 하나님의 자녀는 자격증(資格證)부터 보유한다(마4:1-11). 이는 예수께서 메시아의 사역을 본격화하시기 전에 먼저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사탄이 가하는 시험에서 하나님 아들의 자격을 취득하신 내용에 근거한다. 그 시험에서 하나님 아들의 신분을 확인받은 예수님은 거침없이 마귀와 죄의 권세를 가진 어둠의 세력들과 맞서면서, 본격적인 메시아 사역을 펼치셨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절대 필요한 과정이다. 목사이기 전에, 교인이기 전에, 그 어떤 직분 자이기에 전에 가장 필요한 단계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다. 마귀와 싸울 줄 알고, 어둠과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하나님 자녀의 자격증부터 취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이런 영적 힘과 무기가 준비되지 못한 일꾼들은, 빈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간 무력한 용사와 다름이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줄 강한 용사가 될 수가 없다.


2. 하나님의 자녀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분깃)로서, 이 지상 곳곳에 흩어져 살다가 주님과 그의 부르심을 받으면서(만나서) 찾은 바 된 존재들이다(신32:9, 요17:6-10 참조). 그러기에 이들은 다시 찾은 자녀들이기에, 아버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돌봄과 사랑을 받게 된다. 특히 선교와 전도와 돌봄과 나눔이란 매체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며 그의 부르심에 따라나선 자들이다(마28:16-, 행14:9-10참조). 그래서 하나님의 생산 활동에 참여한 자들이다. 


3. 하나님의 자녀는 막힌 담을 허무는 자들이다(마12:22, 겔37:15-, 엡2:11-22이하). 우리 주변에는 악한 세력이 항상 패 가르기를 하고, 서로 미워하거나 외면하게 하고, 자기와의 차이를 가진 이들을 배척하거나 무시하게 하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많은 이웃과 높은 담을 쌓으면서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켜 살게 한다. 이는 마치 자기 의(義)에 붙들려서 고집을 부리며 연약한 자들을 책망하고 무시하며 죄인으로 매도하던 바리새인의 모습과 같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런 흐름을 거부한다. 예수의 모퉁이 머릿돌 영성을 가진 자들로 산다- 평화 만드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혼자 좋은 것이 아니라, 함께 좋을 수 있도록 힘쓴다. 조율하고 종합하며, 합의하고 하나 되게 하는 삶의 방식을 좇는다. 그게 바로 모퉁잇돌인 주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런 자녀들이 들어가면, 그곳에 평화와 일치가 이루어진다. 


4.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아들의 말씀을 듣는다(막9:7). 행동 중심인 마르다가 아니라 생명의 젖줄인 주의 말씀을 먼저 들으려는 마리아형으로 산다(눅10:39). 행동을 위한 최우선의 지침으로 말씀을 경청한다.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결국 마귀의 말을 듣게 된다. 주님은 누구신가? 모세와 엘리야를 곁에 두고 대화하신 분이셨다. 구약의 양대 축인 율법과 예언을 복음이라는 틀 안으로 융합시켜 하나로 묶어주신 인물이셨다. 그래서 세계인 그 누구나 모든 차이를 넘어서 쉽고 편하게 나아가, 구원의 샘물을 먹고 마시게 할 분이시다. 


5. 하나님의 자녀는 독점이 아닌 공유의 삶을 추구한다(막9:38-50). 하나님에게는 자녀들이 숱하게 많다. 온 세계인들이 다 그의 자녀들이다. 그러니 별별 자녀들이 있다. 잘난 자도 있고, 모자란 자도 있다. 모두 다르며 차이도 크다. 생각과 이념도 다양하다. 그러기에 자녀가 우선 조심할 일은 자기가 모두를 독점하려는 일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것을 마치 자기가 다 주관하려는 듯이 하는 행태이다. 거기는 첫째 아들 신드롬(syndrome)이 들어있다(눅15:25-).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에게는 애정과 용서와 사랑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을 좇아 살려 한다(50절). 그런 측면에서 교회 공동체의 공유의식은 생명이다. 거기에 평화와 생명이 담기게 되기 때문이다. 독점은 쉽다. 하지만 공유는 힘들다. 독창도 좋지만, 합창은 더욱 아름답다. 그게 하나님 자녀가 매야 할 멍에이다. 


6.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면에서 비(非) 자녀들보다 더 우월해야 하는 무리이다(마5:17-20).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율법학자보다 더 나아야만 되는 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이다. 천국은 자기 잘난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이 아니다. 좋은 것과 힘든 것을 함께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 곳이다. 복음은 율법보다 더 나아야 하고, 더 높아야 하며, 더 탁월해야 한다. 


교회의 수준, 성도의 수준은 언제나 최상 최고 최선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부족함을 항상 성찰하여야 한다. 십계명을 잘 지킨 부자 청년이, 예수를 만나 자신의 이웃 사랑과 헌신의 분야가 낙제 점수라는 점을 점검받은 모습을 배워야 한다(눅18:18-27). 천국은 그 단계를 넘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살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자신들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인들에 의하여 ‘저 사람이야말로 참 의인이다’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들어가 살 곳이다(눅23:47 참조). 


7. 하나님의 자녀는 좁은 문 출입을 생활화한다(마7:13-23). 내 앞에 있는 사망과 저주가 아닌 생명과 복을 선택하는 무리들이다(신30:15,19-20). 이는 겉과 속이 다른 외모나 외형 중심주의나 가짜 경건주의를 피하고, 열매가 있고 생명과 사랑이 있는 진짜를 찾아서 사는 무리이다. 

넓은 문을 찾아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과 섬김의 삶을 외면하며 사는 이들이다. 실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양 날개에 고장이 난 이들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이 없는 자이다. 그러나 좁은 문 신앙은 다르다. 저 착한 사마리아인의 경우처럼,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구별할 수 있다(눅10:37 참조). 

이웃과의 교제가 있고 진실한 나눔과 섬김이 있으며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참여가 있고, 환난을 겪은 이들을 위해 닫혔던 지갑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 욕망을 걷어내고 주님의 말씀과 사랑의 격려를 좇아, 외롭고 힘들지만 실천하며 사는 삶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이 삶의 전 영역에서 정의와 인자의 내용으로 나타나도록 살아간다(미6:1-8 참조). 


8. 하나님의 자녀는 유일성과 포용성을 동시에 가진다(막10:13-16, 신4:32-40). 유일성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신다운 신이시며, 그와 같은 살아계신 신이 없음을 믿고 전할 때 드러낸다. 하지만 포용성은 이웃과 사람을 상대할 때 나온다. 특히 자기와 같은 종교를 가진 자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종교와 문화와 생각을 가진 이들을 향해서 나온다. 하지만 낡은 육신의 지혜는 탐욕과 배타심과 이기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기에, 예수를 욕되게 하며 관계를 차단하며 천국 문을 닫게 한다. 


9.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한다. 시몬 베드로는 이 양면을 가장 잘 보여준 자였다. 하나님의 것과 그의 영광을 구하였을 때, 그는 칭찬받았다(마16:18-19). 그러나 주의 것보다는 자기의 안전을 구했을 때는 사탄이 되고야 말았다(막16:21-28). 신앙이란 나의 삶의 축이 내게서 예수에게로 옮겨간 것을 말하는 데, 그러기에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내 중심으로 살고 예수의 것을 무시하면, 그는 신앙인이랄 수 없다.


10.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늘 아버지 이외는 그 앞에 그 누구도 받들지 않는다(눅22:42 참조).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고 산다.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께 항변하며 저항하던 베드로를 꾸짖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산다(막8:33 참조). 물론 나의 뜻은 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자녀의 자세이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대로 자신을 사용해 달라고 자기 포기를 선언한 자이다. 


Ⅲ. 하늘 가족이 탄생하다


사람은 가족에서 시작된다. 조상들의 협력 속에 가족의 일원으로 이 세상에 왔다. 하지만 그가 성장해 가면서 그는 부모를 떠나 자신만의 새 가족과 가계를 이룬다. 그러면서 후손이 생기고 자신도 생을 마감하게 되면, 그는 전혀 새로운 가족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바로 하늘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때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의 때에는) 장가나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은 존재가 된다(마22:23-30 참조). 오직 하늘의 영원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되어 영생(永生)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생을 누릴 인물은, 언제부터인가? 마치 사전 예매표처럼, 이미 이 땅에서부터 발급된 징표(徵表)가 있다. 또한 임산부 뱃속의 태아와도 같다. 따라서 하늘 가족이 될 사람은 지금 여기 이 세상의 삶이 결정적이다. 그 점도 선지자(겔33:12-)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이에 대해서도, 삼위일체력에 나타난 하늘 가족의 실상 열 가지를 정리하여 제시하겠다. 


1. 이 하늘 가족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後孫)임을 확고히 의식하며 산다. 그래서 아브라함

처럼 오직 믿음으로 산다. 아브라함은 이 땅의 사람이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확실히 공인받은 하늘 사람이다. 가장 확실히 천국에 간 이 땅의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앙인의 조상이 된 이였고(롬4장, 히11장 참조), 하늘에서도 천국 문을 출입하는 이들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위치에 오르신 분이다(눅16:19-31). 따라서 그의 후손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명예 차원을 넘어선, 구원의 문제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표지이다.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다(마1:1). 그러면서 예수님도 누가 과연 참 아브라함의 자손인 지를 관심하셨다. 주님은 혈족인 유대인들을 무조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보시지 않으셨다. 유력한 종교인이나 지도자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규정하지 않으셨고, 외식하는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아예 제외했다(요8장). 오히려 삭게오 같이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가진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회개한 그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영접하셨다(눅19:8-9절).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대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셨다. 


2. 하늘 가족에게는 권세가 주어진다. 그 권세(權勢)는 오직 예수의 이름을 믿는 데에서 얻는다(요1:12-13). 세상의 돈이나 권력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믿을 때, 그가 가지신 영광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로 인하여 값없이 주어진 충만한 은혜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 살게 될 권리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1:14-18, 요3:16 참조). 


3. 하늘 가족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함께 받아서,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다(요3:5-6 참조). 물세례는 그가 세상에서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사람으로 새 출발 한 일을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 앞에서 공인받는 표지이며, 성령세례는 그런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출발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그의 성령을 그의 몸과 마음과 영에 보내셔서 그를 건강히 세우는 관계로 들어선 표지이다. 그러기에 그는 하늘과 땅 양쪽의 사랑과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 매우 구별된 사람이다. 자기 안에 오신 성령으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분별하는 영적 안테나가 작동된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 인물이다.


4. 하늘 가족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산다. 그런 점에서 이 가족은 혈육 가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 가족은 운명처럼 주어졌으나, 하늘 가족은 찾아오신 예수와 그의 사랑과 말씀을 직접 듣고 선택함으로써 맺어진 관계이다. 이 점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혈육 가족들 앞에서 언급하셨던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인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 눅8:21절). 


예수님에게도 혈육의 가족이 있었다. 요셉과 마리아인 부모, 야고보-요셉-유다-시몬인 형제들과 그 익명의 누이들이다. 이들 중, 신약성서의 기자가 된 야고보와 유다는 자신들 소개를 <예수의 친동생>이라는 표현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다. 이는 혈족의 가치보다, 그리스도의 종과 하늘 가족이라는 칭호를 더욱 존귀한 명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혹, 이 흐름과 질서가 혈족 사이에서 어긋나게 되면, 가족 사이에서도 분쟁이 일어난다(눅12:51-53). 


5. 하늘 가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산다. 이렇게 부름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마6:9). 사실 예수님은 그 제자들도 아버지의 소유로 보셨다(요17:9 참조). 그러기에 당신의 아버지는 그들의 아버지도 되시고, 그들은 당신과 신분이 같은 친구로도 보셨다(요15:14). 이는 아들이신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영광과 축복을 제자들과도 영원히 공유하기를 원하신 큰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의 승천과 재림의 약속 안에는 하늘 아버지의 집이 언급되어 있으며, 후에 제자들이 거처할 영원한 처소도 준비하겠다는 약속도 담겨있다(요14:1-3). 이 약속은 모든 믿는 자의 큰 소망이 되었다. 


6. 하늘 가족은 나사렛 예수를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다(마16:16). 예수를 자기 삶의 반석으로 시인하며, 그 반석을 삶의 기반으로 삼고 산다. 언제나 예수를 바라보며 그를 따르며 살아가는 무리이다. 그러면서 이런 내용으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함께 모여 그의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 집(오이코스‘(헬)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배를 탄 하나의 가족이 된 운명공동체의 의미도 담겨있다. 이는 십자가에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란 배에 같이 탄 무리로서 함께 항해하는 존재들이다.


7. 하늘 가족은 세상 안에서도 소금과 빛으로 산다(마5:13-15). 세상의 주인 되시고 빛 되신 예수를 만나서 그 자신도 세상 현실에 깊이 관심을 두면서, 세상을 살리고 맛을 주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고, 슬픔과 어둠을 몰아내는 희망의 빛인 존재가 된다. 이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요1:29)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게 된 인물들이다. 실로 세상의 운명을 거머쥔 주역이 된 것이다. 


8. 하늘 가족은 항상 아버지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산다(마6:33 참조). 그것은 하늘 아버지는 당신 자식들의 필요한 것은 미리 알아서 제때 공급해 주심을 믿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늘 가족의 관심사는 언제나 아버지의 하시는 일과 교회의 일이 먼저 잘되도록 협력하고 힘을 모은다. 혹 아버지의 일이 잘못되었는데 자식들의 일이 잘된다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 질서와 흐름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늘 가족들이다. 


9. 하늘 가족은 원수들의 공세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시련도 많다. 주변의 마귀들은 끊임없이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냐‘를 시험하며 물어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에 대한 기본 대응책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자세이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이웃 사랑의 책임을 실천하며 산다. 주께서 주신 이런 승리의 말씀 때문이다. - ’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라‘(눅6:35 참조).


10. 하늘 가족은 기본적으로 평화(平和) 지향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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