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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6-09-22 (화) 16:45 1시간전 2  

본문) 욥37:14-24, 마14:22-33, 롬9:14-26 


오늘은 창조절 넷째 주일이다. 산천초목의 색깔도 어느덧 변화가 왔다. 산야엔 누런빛이-, 들녘엔 황금빛이 보이면서 한 해의 추수기가 도래했음도 확인할 정도이다. 조석으로 서늘해진 날씨만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숨 막혔던 무더운 절정기를 보내면서 가졌던 몸부림을 정리하면서, 그 열매와 추수를 차분히 기다리게 하는 때에 들어선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이란 분명한 사계절을 안겨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를 새삼 발견한다. 아마도 세계에서 우리만큼 기후상으로 뚜렷한 사계(四季)를 가진 나라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비교적 사계의 변화에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요즈음의 급변하는 계절의 속도를 뒤쫓아가기에는 우리 역시 버겁다. 특히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우리의 이런 사계의 빛들이 주는 변화의 다양함에는 충격과 환상에 빠져들 것이다. 


이런 중에 우리는 성부 창조주 하나님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매 주일 그분이 만드신 창조 세계의 다양한 진면모를 잇달아 만나서 알게 되고 확인하고 있다.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그중에 인간(사람)을 창조하셔서 당신의 이 지구촌 관리를 품에 안겨주신 여호와, 그리고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인간을 남녀로 만드셔서 하나 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자녀를 생산하여 역사를 이어가게 하신 여호와를 잇달아 확인하였다. 


그런 중에 우리는 창조절 넷째 주일을 맞이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은 창조주의 어떤 모습을 보게 하실까? 이 부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창조 사역들이 소개된 흐름과는 달리, 오늘은 그 창조주를 대면하는 나의 믿음과 반응은 과연 어떤지를 되묻는 차원의 말씀을 주신다. 그 이유가 있다. 앞에서 아무리 창조주와 그의 창조 내역에 대한 놀라운 소개를 해 주어도, 정작 그 창조주 자체에 대한 나의 믿음이 확실하지 못하다면, 그동안의 창조절에 관한 풍성한 증언들이 내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로 그 영역에서 체증(滯症)이 걸리면, 즉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내 믿음이 분명하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아무리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이나 명령이라도 내 의지와 판단에 따라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그때는 곧장 순종이나 복종 대신에, 하나님을 의심하고 외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면서 ’유령이다‘라고 소리 지르며 두려워한 제자들의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14:26 참조). 


그러기에 오늘의 네 번째 주시는 세 본문 말씀은 우리가 <창조절에 적합한 축복과 은혜> 받기에 합당한 믿음을 보유하고 있는지부터 우선 점검하려 한다. 그를 위하여 삼위 하나님은 그를 믿는 우리를 매우 힘겹게 하고 곤혹스럽게 하시는 분으로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신다. 그러면서 창조주이신 당신을 믿는 우리가 어느 지점에까지 믿고 따르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하신다. 곧 나는 자기 지식과 상식, 판단력과 이해의 지평까지도 훌쩍 뛰어넘어오시는 하나님까지도 의심 없이 굳게 믿고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예상(예측) 불가능한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고 있는가를 확인하려 하신다. 


욥이 만난 하나님을 보라. 욥기에서 만난 하나님은 시종 우리를 힘겹고 무겁게 하신다. 욥은 본래 그가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의인(義人)이었다:1).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그의 믿음이 참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에게 상상을 초월할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셨다. 오죽하면 욥 자신이 그런 하나님을 ’자기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항변하였겠는가(9:19-22). 이 일로 하나님의 의와 정의로우신 통치를 믿는 수많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욥에게 보여 주신 그런 고난을 보면서 ’무고한 자의 고난‘에 대한 이해에 무척 곤혹스러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인과응보(因果應報)론에 익숙한 무리의 신념도 허망하게 하셨다. 


복음서에서 보여 주신 바람과 파도를 발로 밟으면서 물 위를 육지처럼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서 배에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만 놀라게 하신 일이 아니었다. 예상이 가능한 하나님만을 찾아서 믿고 사는 인본주의적 기독교인에게는 실로 판타지 같은 면모를 보여 주셨다. 그 바람에 예상 불가능한 하나님의 모습, 곧 자연의 창조주요 지배자이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만 현존하고 계심을 받아들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베드로가 보여 준 믿음의 가능성과 한계는 그런 혼란에 빠져든 우리의 믿음 지평을 크게 확대해 준다. 


성령 안에서 이방인 선교에 헌신한 사도 바울의 로마서 증언도, 모세의 율법 종교에 오랫동안 사로잡혀서 예수와 성령에 의하여 새롭게 시작된 새로운 차원의 온 세계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소화 시키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그들은 이방인 중심의 선교 운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선택과 약속의 말씀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강고한 흐름 때문에, 바울은 결국 동족인 유대교도의 고발과 배척으로 로마로 끌려갔다. 


위 사례들뿐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건설을 향한 과감한 행동을 서슴치 않으셨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게 하신 일, 야곱의 시련기, 꿈꾸는 자 요셉의 고난,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의 400년간의 노예로서의 삶,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유랑, 선지자 요나를 적국 니느웨로 파송하신 일, 유대인의 바벨론 40년 유수와 귀환, 오랜 세월의 제국 치하의 유대인 생활, 독생자를 인간으로 보내신 일, 그 독생자를 만민의 죗값으로 십자가에 대속하게 하신 일, 로마와 전쟁 후의 2000년 나라 잃은 디아스포라로서의 이스라엘 등등이다.


이런 역사의 숱한 역경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주이시냐‘, ’그가 과연 우리를 사랑하시느냐‘라는 숱한 의혹과 오해를 받으시면서도, 당신이 하시는 일을 통하여 진정 당신이 누구신지를 스스로 입증해 오셨다. 그 주요 내용은 이렇다 : 


- 온 천하 만물은 모두 하나님이 지으셨다. 하나님은 온 만물의 절대적 주권자이시며 지배자이시다. 하나님과 겨룰 수 있는 피조물은 전혀 없다. 피조물이 가진 그 어떤 높은 지혜나 지식도 하나님 앞에서는 공허할 뿐이다. AI도 그렇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의 원초적 품성은 자비와 긍휼이시다(시25:6). 그의 품성은 자유로운 그의 선택을 통하여, 온 세상 만민에게 펼쳐졌다. 먼저 선택받은 자들은 그런 그의 품성을 안고, 창조주를 전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를 거스른 완악한 세력은 결국 멸망한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예상이 가능한 하나님뿐만 아니라, 예상 불가능한 하나님까지 믿도록 베드로처럼 나아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시험하고 의심하려 하면 안 된다. 최후까지 우리는 창조주에게만은 절대 신실해야 한다.


사실 이런 차원의 오해나 의혹의 문제는 신인(神人) 차원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존재한다. 특히 가까운 관계 속에서도 현존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것은 진실 여부 차원보다는 그가 처해 있는 수준과 상황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오해나 견해들로 인한 경우가 허다하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오해, 위정자를 향한 백성들의 의혹, 목회자에 대한 성도의 갈등 등이다. 이런 문제는 대체로 서로의 믿음과 신뢰가 견고하면 금방 해소되지만, 허약해지면 파국도 맞게 된다. 이제 오늘의 세 본문을 통하여 이런 내용들을 보다 확인해 보자. 


1. 구약 / 욥37:14-24 / “ 욥이여 — 하나님의 요묘한 일을 깨달으라 — 우리는 그에게 할 말을 —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 —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 


동방의 의인인 욥이 당한 극심한 고난과 파괴당한 삶은 주변의 충격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그의 절친한 친구들의 방문을 이끌었다. 욥기는 그 비극에 관한 원인을 두고, 신론(神論)에 집중된 그 친구들과의 토론과 논쟁이 주축을 이룬다. 당사자 욥은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거두어가신 이도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극심한 고통이 왜 발생했는지 알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결국 하나님은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고 항변하기도 했다(9:17-21 참조). 


그러자 그의 세 명의 전통적 친구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론(因果應報論)에 근거하여 욥의 시련을 그의 숨겨진 죄악과 행악의 결과물로 보고, 어서 회개하여 회복의 은혜를 입이라고 권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보이는 인간의 현실만을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의로웠던 욥에게는 친구들의 그 권고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런 중에 다소 개혁적 식견을 가진 친구 엘리후가 앞 사람들과는 달리, 다소 참고할 만한 차원의 식견을 제시하였다(32-37장 참조). 그것은 고난 중에는, 범죄와 죄악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당하게 된 형벌로서의 고난이 있지만, 또 다른 하나, 곧 하나님이 자신의 사람들을 보다 더 견고하고 튼튼히 세우시려고 가하시는 연단과 같은 고차원의 고난도 있음을 소개한 것이다. 이는 상당히 경청할 만한 증언이었기에, 욥과 친구들 모두의 반발은 따르지 않았다. 


인간의 행실에 의한 심판으로서의 고통과 하나님의 보다 큰 의와 온전함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여하신 고난은 분명히 결코 동질과 동격도 될 수 없다. 결국 욥의 이 고난 메시지는 믿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를 통하여 당신의 큰 뜻과 섭리를 펼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드높게 경험하는 고난의 새로운 지평이 되었다. 우리는 그 최고의 지평을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성육신하게 하시고, 십자가 참사로 만민 구원을 성사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더욱 확인하게 된다. 이제 우리 믿는 자들의 시야는 거기까지 가야 한다.


2. 복음서 / 마14:22-33 / “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 제자들이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도 두 가지 유형(類型)이 있음을 예수의 제자들을 통하여 확인한다. 하나는 예수를 예상이 가능한 분 정도로 알고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자이고(26절), 또 하나는 예수에게서 예상이 불가능한 면도 있음을 보면서, 자신도 주님이 계신 그 영역에까지 들어가고자 힘쓰는 자가 있다(28절). 전자는 제자들의 모습이었는데, 유독 한 사람 베드로는 믿음 때문에 용기를 내어 바다 위로 뛰어들면서 그 신령한 영역의 맛을 본 주인공이 된다(29절). 


그 바람에 베드로는 결국 그 숱한 실패와 수치의 과정을 경험하고도, 구원자 예수의 손길에 붙들려서, 교회의 머릿돌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제자들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으며, 천국 열쇠를 움켜쥔 지금 로마 바티칸 성당의 이름인 베드로 성당의 영예를 안게 된 주역이 되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의 믿음도 상식적 수준에 머물지 말고, 예수와 성령의 신비함에도 동참하는 담대하고도 과감히 믿는 자의 자리로 들어서야 하겠다. 그 세계, 수준에 눈이 떠야 하겠다. 


3. 서신서 / 롬9:14-26 / “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


성령께서 제자들과 바울을 앞세워 이방인 선교를 본격화하며 교회 공동체를 확장해 가자, 이에 속앓이하게 된 그룹이 바로 유대교도 및 유대인 공동체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선택과 축복이 독점적인 것이어서, 세계 그 어느 족속에게도 제한적이어야 마땅하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 입장을 신성불가침적 영역으로 보았다. 


하지만, 삼위 하나님의 뜻은 공유와 공존과 공생이었다! 물론 유대인을 여전히 사랑하시지만, 그렇다고 수많은 이방인 구원을 외면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공의와 인애와 긍휼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 취지에서 여호와는 이방인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셨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칭하셨다(25-26절, 호1:10참조). 그런 은혜로운 결정은 하나님의 불가침적인 절대 주권에 속한 것이었다(사45:9, 렘18:4-6). 마치 토기장이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 그릇과 저 그릇을 자유롭게 만들어 사용함같이, 누구의 동의나 협력 없이 홀로 결단하신 것이다. 이런 대의를 품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어찌 기존과 기득권의 사랑만을 고집하는 특정 인물들에게 발목을 잡히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오직 피조물만 변하면 해결될 문제다!!


O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기린다. 그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창조의 솜씨를 마음껏 즐기며 찬양하고 내 것으로 기뻐할 믿음을 단단하게 소유한 내가 되길 빈다. 이 믿음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시험을 받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하여 끝없는 시련에 휘말릴 수도 있다. 이제 저 베드로와 바울처럼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와 능력의 품에 담대하게 뛰어 들어가 보자. 그때 비로소 나는 진정한 창조신앙인이 되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 신앙이 날 살리고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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