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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6.25 민족화해주일

관리자 2026-06-16 (화) 23:54 1시간전 2  

(본문) 행16:6-15, 욘 3:1-4, 마 28:16-20


오늘은 강림 후 넷째 주일이다. 여름의 무더위도 이제는 어느덧 일상화된 느낌이다. 앞으로 더할 것이 분명한데, 부디 몸 관리 잘하셔서, 건강히 이 여름 잘 넘어가시기를 기원한다. 


때마침 우리 이재명 대통령이 프랑스 에비양에서 개최되는 G7 국가의 초청객으로 참여하기 위하여, 유럽에 있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있는데, 그중에 로마에 있는 바티칸에 가서 가톨릭의 교황 레오 14세와의 면담을 통하여, 세계 평화를 위하여 함께 논의하고, 그중에 특히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교황의 북한 방문을 요청하는 등의 논의가 있을 것으로 알려져서, 우리 모두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부디 이런 평화를 위한 노력이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아름답고도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윤석열 일행의 내란 사건이 성공했더라면, 지금의 우리 처지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은 자신들의 내란과 영구집권을 이루기 위해서, 북한과의 내전도 깊이 획책하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형성된 북한과의 불신 때문에, 지금의 한민족 두 국가 체제가 고착화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재명 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하든, 다시 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 중이다. 부디 하늘과 땅의 주되신 하나님께서 이런 정부의 노력에 은혜와 복을 베푸셔서, 남북이 다시 만나고 관계도 문재인 정부 때의 수준으로 복원되는 길이 열리게 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우리 남북은 진정 세계적으로 매우 우수한 족속이요 탁월한 민족이다. 그러기에 서로 평화를 택하여 하나만 될 수 있다면, 그때는 온 세계를 선도할 수 있을 주도 국가가 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은 마침 우리 총회가 6.25 민족 전쟁 제76주년의 참사를 기억하면서 제정한 민족화해(民族和解) 주일이다. 두 번 다시 동족 간의 상잔이 재발 됨이 없이, 오직 평화와 사랑으로 우리 민족이 다시금 서로 하나 되는 그날이 오기를 열망하면서,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예배와 기도를 드리자는 주일이다. 그렇다. 남북이 하나 됨은 분명한 하나님이 뜻이다. 이 뜻을 다시 되새기고, 우리가 할 일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고 한다. 


마침 오늘 주신 세 본문 말씀은 이 세상에 강림하신 성령이 민족과 족속 간에 하나 됨을 위하여, 심지어 자기와 원수 된 관계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서는 교회와 주의 일꾼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셨는지를 소상히 밝혀주신 내용들이 올라와 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주목하면서 경청해야 할 이유는 그 속에 진정한 화해와 하나 됨의 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의 정치가 해결할 차원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의 힘이 해결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숙고해 보자. 강림하신 성령은 당신의 종들을 어느 곳으로, 어느 백성들에게로, 어떤 내용을 가지고 가라고 명령하셨는가는 확인해 보자. 과연 하나님의 뜻과 우리 인간들의 생각은 과연 하나일 수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해 보자. 다르다면, 우리는 어떤 결단이 필요한 것인지도 숙고해 보자. 


1. 서신서 / 행16:6-15 /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서신서인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은 주의 성령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의 선교를 어떻게 끌어냈는지를 전해준다. 이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서 아시아 선교를 진행하던 사도 바울이 결국 성령의 지시로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중단하고, 당시는 미지의 세계였던 유럽을 향한 선교지로 전환할 수밖에 없도록 강력히 인도하신 모습을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6-10절). 


그때의 새로운 선교의 중심 무대는 유럽의 관문이기도 한 그리스의 빌립보였는데, 여기에서 주의 성령은 아시아의 터키(튀르키에)에서 유럽의 땅인 그리스의 빌립보에 와서 의류 무역업을 하던 한 여인이었던 루디아를 통하여, 그 선교의 역사적인 문을 활짝 열게 하신 모습을 자세히 전한다. 곧 주의 성령은 당시에 한갓 지극히 작은 무명의 한 사람, 곧 이방인이요 장사꾼이며 여인에 불과한 인물이었던 그를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섬겼다’는 그 부분을 중시(重視)하면서(14-15절), 소중히 택하여, 그토록 ‘큰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다(11-12절). 


그렇다면 루디아의 행위가 ‘큰 역할’이었다 라는 표현은 왜 가능한가? 그곳 빌립보에서 시작된 선교가 결국은 유럽 대륙을 기독교 중심의 역사로 돌려세우고, 그 대륙 백성의 구원과 문화와 문명에 아주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루디아 본인은 당시 그런 비전을 갖고 복음과 바울 일행을 영접하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루디아의 역할만으로 유럽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식의 독점적 표현도 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미천한 그녀를 유럽선교의 밀알로 택하신 것은 분명해 보인다(13-15절).


사실 우리의 믿음의 역사도 매우 흡사하다. 지금의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원초적 근원들을 보면, 대부분 이름도 없고 힘도 없어도, 오직 우리 안에 있던 신실한 믿음과 헌신의 한 사람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이렇게 신앙 가계를 이루고 번성한 존재가 된 경우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내용에서 ‘우리의 루디아’에 대한 관심도 살펴서 감사하면서, 그의 열매 된 존재로서의 내 역할과 소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성령이 진정 어떤 사람을 귀중히 보시고 쓰시는지를 아주 상세히 알게 해 준다. 


1) 바울 일행의 아시아 지역 선교는 거의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지역 선택도 성령이 감동을 주시지 않으면 가질 못했다(6-7절). 하지만 그들이 드로아(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곳)에 갔을 때,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음성을 듣자, 바울은 그에 하나님의 지시로 알고 즉시 유럽행 배편에 올라서 그리스의 네압볼리로 갔고, 이어서 빌립보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8-12절). 


2) 빌립보는 그곳 로마의 식민지인 마게도니아의 첫 성(城)이다. 그만큼 모든 행정과 문물이 로마로 이어지는 요긴한 곳이었다. 바울은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렀다가, 안식일을 맞이하자 그곳에 혹 기도 처소가 있는지를 수소문하던 차에, 그곳 강가의 아낙네들을 만나 말을 건넸다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믿음의 사람 루디아를 만나게 된 것이다(13-14절). 


3) 루디아는 영이 살아있던 자였다. 그러기에 기도처를 찾는 믿는 자들의 향기를 맡게 되자 즉시 반응을 한 것이다. 아마도 그는 모국인 터어키에서부터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이 있었고, 이곳 낯선 이방 땅에서도 영적 갈망을 하며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영혼에 성령의 사람들인 바울 일행은 마치 오아시스와 같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반응은 뜨거웠다. 


4) 먼저 전도자 바울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면서, 온 집이 다 세례부터 받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요청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留)하라“. 그것도 강권하면서 그렇게 청했다. 이것은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 전도자들을 향한 대단한 친절이요 접대 행위였다. 그 순간 바울은 얼마 전 밤에 본 환상에서의 마게도냐인을 이 루디아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9절 참조). 곧 성령이 선교를 위하여 이렇게까지 준비하셨음을 확인하였을 것이다. 그 바람에, 바울 일행은 준비된 거점을 바탕으로, 오직 빌립보 지역 복음 전파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빌립보 교회의 출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행16장 참조). 


2. 구약 / 욘 3:1-10 / ”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나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니느웨로 가니라 “


요나서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선교의 지평을 직접 결정하시고, 그런 곳에 당신의 종들을 파송하신다는 점이다. 마치 서신서에서 성령이 바울 일행을 유럽으로 가게 하신 모습과 흡사하다. 그 선교할 대상도 여호와가 직접 결정하신다. 여호와는 선지자 요나의 선호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히려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유대인에게는 마치 적군이여 원수요 기피 대상이기도 한 백성인 니느웨 사람들을 지목하셔서, 당신의 뜻을 그들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셨다. 


이것은 여호와가 재차(再次) 명령하신 일이었다! 이는 첫 번째에는 그렇지 못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때는 주의 종인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자기 입장과는 배치된다고 보면서 거부하고 도망친 적이 있었고, 그 일로 그가 무서운 벌을 받고 나서야 자기 거역한 잘못을 회개까지 한 후에 나온 두 번째 명령이었던 까닭이다(욘1-2장 참조). 


무엇보다도 여호와께서 니느웨를 포기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여호와가 그들 니느웨 백성에게서 여전히 구원받을 가능성을 보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록 그들이 지금 악하고 행악자의 길에 빠져 있어도, 여호와로부터 무서운 심판의 경고를 듣게 되면은 자신들의 입장만 고집하지 않고 회개할 유연성(柔軟性)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런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機會)를 주고자 하신 것이었다(5-9절 참조). 반면에 요나에게서는 그런 자비와 긍휼의 영성은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기에 요나는 더는 자기 입장을 내세우지 말고, 다만 믿고 순종부터 해야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선교’의 실체였다. 


그렇다. 선교의 주이신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외모로만 보시지 않는다. 비록 그가 지금 당신의 백성이나 자녀들과의 원수가 되었고 적개심을 품은 대상으로 존재하는 대상일지라도, 하나님은 역시 그런 그들을 향해 마음 문을 아예 닫아 놓지는 않으신다. 그게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던 니느웨가 위기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맛볼 수 있었던 이유이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입장 때문에, 우리 역시 북한 동족들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더라도, 여전히 화해와 평화의 기회가 열리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유연성이 부족한 요나의 태도이다. 잘못된 신학과 유연성을 갖추지 못한 완고함 때문에, 그로 인하여 극우화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적개심만을 품고 앗수르와 니느웨를 미움과 심판관적인 마음으로만 상대하려는 바리새적인 요나가 문제이다. 이런 모습은 지금의 반공 이념적 사고로 경직화된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다. 정작 하나님은 한없이 유연하신데, 말이다.


정말 큰 걱정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그의 종들이 완고한 것이 정말 큰 걱정이다. 요나는 한 번의 잘못에 대한 회개로 큰 선교의 열매를 거두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요즈음은 전혀 기대할 수 없어서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과 회개가 전혀 제대로 밑받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이한 사고, 현상 유지에 대한 착각이 교회의 장래를 어둡게 한다. 그만큼 선교의 문도 좁아졌다. 따라서 다시금 선교 원칙에 대한 주의 음성을 경청할 때이다. 


3. 복음서 / 마28:16-20 /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대 위임(委任) 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다. 제자들을 떠나 하늘 본향에 오르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구원의 복음을 전 세계 민족들에게 전하도록 위탁하신 선교 명령이다. 


1) 갈릴리는 당시 유대인 못잖게 이방인들도 많이 혼재되어 살던 곳이었다. 그런 점에서 갈릴리는 예수 복음의 출산지이었다. 복음은 이곳에서부터 비(非)유대적인 이방인들의 세계로 퍼져 나갔다(마4:12-17, 24참조). 


2)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하늘과 땅의 전권(全權-모든 권세)를 소개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민족(民族)에게로 파송하신다(18-19절). 이 분부 때문에, 앞의 사도 바울 일행이 아시아와 유럽을 향해 복음을 들고 찾아갔다. 그 뜻은 아버지 성부의 뜻도 되었었기에, 요나 선지자는 앗수르의 니느웨까지 파송을 받아 회개와 심판을 외쳤다. 현재의 모든 해외 선교사들도 복음을 들고 선교사역에 매진하며 살고 있다. 


3) 파송된 제자들이 각처에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이었나? 또 다른 제자를 삼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제자 된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洗禮)를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 아래 모두 하나 되게 해야 한다. 그래서 하늘 백성, 신령한 가족(家族)이 되어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께서부터 전달받은 말씀과 삶을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한다(20절). 


4) 그런 선교적 삶에 헌신하며 말씀을 지켜 행하는 곳(자)에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항상(恒常) 함께 계시겠다고 확실하게 약속하셨다(20절). 우리는 모두 주의 제자들이다. 이 위임 명령을 굳게 잡아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존재로 살아가자. 


o 오늘은 민족화해 주일이다. 두 번 다시 동족 간의 상잔이 없도록 평화와 화해가 정착되도록 전력을 다해야 할 직무와 책임이 우리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명심하자. 무엇보다도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능력이 우리 모든 한국교회 위에 임하시기를 기도하자. 성령 충만을 부르짖는 한국교회의 보수 진영 내지 복음주의 진영에 극우세력들이 번성하고 있는 현실은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부디 삼위일체 신앙이 제대로 자리 잡은 한국교회 강단이 되도록 기도하자. 편협과 편중을 넘어선 가장 균형 잡힌 복음과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자. 세계 선교는 물론, 동족 선교도 활발해질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기도하자. 성령이여 우릴 깨워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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