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19: 1-16, 사59:1-3,9-20, 딤전1:12-17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이다. 십자가(十字架)를 향한 예수님의 인류를 위한 마지막 행보가 뜨거워지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를 보내신 하늘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절대적 충성심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의탁하거나 떠넘길 수 없고, 오직 당신 자신만이 홀로 걸머지고 받아 마셔야 할 고난의 잔을 이제는 묵묵히 마셔야만 하는 때를 맞이하신 것이다. 그의 그런 처지를 알 리 없는 주변의 무리들은 그의 생명을 앗아가고자, 온갖 폭력을 가했다.
마침 오늘은 우리 총회가 총회순교자주일로 제정하여 지킨다. 진정 묻는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가? 절대 그럴 리 없다. 진정한 순교는 자신의 왕(王)이신 분에게 받치는 신하된 자의 충성(忠誠)의 헌신인데, 그런 자리에 어찌 아무나 설 수 있을까? 진정 오직 충성된 삶과 마음으로 다져진 존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자리이다. 계시록의 증언을 봐도, 그곳에 입국한 자들은 한결같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을 지켜낸 순교자들이었다(14:12-13, 15:2-4 참조).
요즈음 장안 영화계에서 1,000만 관객 돌파로 큰 화제(話題)가 된 <왕과 사는 남자>란 영화의 내용이 생각난다. 그 이유는 비운의 왕인 단종의 죽음보다도, 죽은 왕에게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건 충성을 드렸던 그곳의 촌장인 엄흥도의 행보가 준 감동과 여운 때문이다. 그는 강물에 떠다니는 죽은 왕의 시신에 손대면 가족 삼족(三族)이 멸하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전격적으로 시신을 수습하여 영월의 산골에 매장한 후, 온 가족과 깊은 산속에 들어가 고독한 여생을 보냈고, 그 후손들도 뿔뿔이 흩어져 죽은 듯 지냈다. 그런 그들이 나중에는 조정으로부터 충신 가문으로 공인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지금 죽었으나 산 자의 표본이 되어 등장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충성이란 주제에는 자신이 믿고 섬기는 왕에 향한 목숨을 건 순결한 헌신이 뒤따르게 됨을 본다. 보상은 반드시 위로부터 주어진다. 곧 하늘과 역사로부터 구원과 영광이라는 위로의 보상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와 진리를 향한 고난의 멍에를 두려워하지 않고, 감당하려는 삶을 택하는 까닭도, 바로 이런 순교와 그에 따른 보상을 믿고 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오늘의 세 본문을 다시 본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는 모습은 참 순교자의 표상(表象)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점이다. 십자가의 참혹한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진리와 생명의 길을 고수하시는 그의 마음은 하나였다. 곧 그를 보내신 영원하신 왕이신 하늘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일편단심의 충성심이었다. 우리는 오늘 그에게서 그의 참혹한 모습보다는 그의 충성된 태도를 읽어야만 한다.
1. 복음서 / 요 19:1-16 /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
대체로 본문을 보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에 어떤 재판을 받았고 그 참상은 어땠느냐에 관심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분문의 인물들이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으며, 그 행위의 결과에 따라 그들에 대한 심판도 걸맞게 주어졌다는 점도 알아야겠다.
1) 체포당한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를 향한 총독 빌라도의 채찍질을 필두로(1절), 로마 군인들이 예수의 머리에 가시나무 관(冠)을 씌웠다(2절). 그리고 몸에는 왕을 상징하는 자색(紫色) 옷을 입혀놓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라’라며 조롱과 모욕하며 구타까지 했다(3절). 그러자 빌라도는 그런 예수를 잠시 관정 밖으로 데리고 가서, 그 고발자들 앞에 참담해진 예수를 세웠다. 그러면서 그 유대인들을 향하여 ‘바로 너희 때문에, 무죄한 이 예수를 내가 이렇게 처리하고 있다’라며, 이 모든 책임을 자기가 아닌 고발자인 유대인들에게 전가하였다(4-5절).
2) 빌라도의 ‘예수의 혐의(嫌疑) 없음’에 대한 말에, 자칫 예수가 방면(放免)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된 고발인들(대제사장들과 그 하수인들)은 그때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는 거친 압력을 총독 빌라도에게 가했다. 그 모습을 보면, 그 당시 유대 종교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 일하고 계셨던 나사렛 예수를, 얼마나 미워하고 증오하며 골치 아파했었는지를 충분히 엿보게 해 주는 전모를 엿보게 된다.
3) 그들의 절대 목표는, ‘예수는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예수로 인하여 자기 율법 종교인 유대교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는데, 그런 흐름을 차단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정치적(政治的) 차원도 있었다. 곧 당시 백성들로부터 메시야급의 압도적인 추종을 받는 나사렛 예수를 살려두면, 이 나라에는 두 명(예수& 로마황제)의 왕들이 있게 되는 상황이 되면서, 결국엔 로마 제국으로부터 무자비한 공격을 받게 되어 온 나라가 처참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때문에, 얼마 전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를 제거하는 문제까지 제기했었다(요18:14 참조).
4) 그런데 만약 이번의 재판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진짜 방면하기라도 한다면, 이야기는 아주 달라진다. 자기들의 계획이 완전히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금 그들은 더욱 전력해서 빌라도에게 예수 처리에 대한 자기들 입장을 전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였다(6절). 그래도 여전히 빌라도가 ‘그렇다면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자(6절), 그들은 더욱 격렬하게 소리치면서 처형할 새 이유를 추가했다.
5) 바로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죄를 지었기에, 자기들 법대로도 당연히 죽여야 할 죄인이라는 것이다(7절). 그러자 빌라도는 그 부분도 확인하고자 예수에게 가서, 그의 신분에 관한 추가 심문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Where do you come from?). 이에 예수께서 답을 주지 않자, 그는 예수의 답을 유인해 내려고 자신이 가진 권세, 곧 죽일 수도 있고 방면할 수도 있는 권세를 갖고 있는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면서, 그러기에 ‘네가 자신을 변명해 보라’는 듯 유도(誘導)까지 했다(9-10절).
6) 이에 입을 여신 예수님의 답변은 빌라도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곧 ‘나의 이런 고난은 너의 권세 때문이 아니라, 위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밝혀주시면서, ‘그렇지만 나를 이곳에 넘겨준 자(유대 종교인들)의 죄(罪)는 나를 재판하는 당신보다 더 크다‘(11절)라고 설명하셨다. 이에 묘한 심리적 부담과 압박을 느낀 빌라도는 더욱 예수를 방면하려고 애쓰려고 했다(12절,상). 그 바람에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7) 빌라도에게 그들의 가한 최후 일격은 정치적 접근으로 나왔다. 그들은 현실 정치인인 빌라도에게 취약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예수를 방면하면 당신은 가이사(황제)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왕(王)이라 하는 자를 인정하는 일인데, 그것은 결국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 아니냐?’(12절). 실로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일격이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줌으로써, 양심과 진리가 아닌 타협과 눈치를 택하는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예수를 포기하는 최악의 악수(惡手)를 두고 말았다.
8) 이야기는 빌라도의 꼬리 내리기로 끝나지 않았다(13절). 그것은 빌라도가 유대인들로부터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절)라는 기막힌 고백(?)까지 계속 듣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고백에서 유대교도들은 자신의 신앙의 주(主)가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이 아닌, 세속 정치의 권력자에게 신하로 복종하며 살아가는 종교적 집단의 일원에 불과함을 폭로하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고유한 신앙고백과 민족적인 메시야의 희망까지도 이미 폐기한 자들로서. 하나님이 없는 백성의 모습을 보였다!
9) 이런 장면은 최근 미국 백악관에서 전쟁과 폭력을 일삼는 대통령 트럼프를 축복하기 위하여, 그 나라 복음주의 많은 목사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는 장면과 중복되기도 한다. 폭력과 위선, 자신을 세계의 왕으로 알고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을 무시하며 온갖 폭행을 저지르는 자를 찾아가 그토록 축복 기도하는 목사들의 위선적인 모습이, 이 사순절에 빌라도와 거짓 종교인들과 맞서다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너무도 다르게 보인다.
10) 순교는 절대 패배(敗北)가 아니다. 폭력과 폭행은 반드시 폭망으로 끝나지만, 순교는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부활 승리란 환상의 코스가 멋지게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가 그 증인이다. 당시는 온 세상의 모든 권세가 폭력이 되어 죄 없는 그를 잔인하게 죽였지만, 얼마 후엔 그가 부활하시자 그 모든 무지했던 자들이 그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그를 경배하는 세상이 펼쳐졌잖은가! 그렇다. 오직 예수만이 희망이다!!
2. 예언서 / 사59:1-3, 9-20 /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
본문은 왕이신 하나님 여호와의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매사에 불통 인생으로 어렵고 슬프게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원인을 밝혀준다. 복과 은혜를 주시려는 여호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지만, 받고 살아야 할 인간들은 계속 헛발질만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점은 포로 생활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실상이었다. 본문은 그 원인을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새 길을 찾기 위한 대안을 세 단계로 제시한다.
1) 선지자는 그 불통(不通)의 원인을 여호와에게서가 아니라(1절),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음을 아주 신랄하게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계속되는 죄악(罪惡)과 거짓과 악독한 행실 때문이었다(2-3절). 곧 백성들의 두터워진 죄악들이 양자 사이를 갈라놓았고, 빛 되신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서 소통을 막게 한 것이다. 손으로 짓는 죄, 입술로 짓는 거짓과 더러운 죄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을 제반 은혜와 도움들을 못 받게 하는 불통의 주범이었다.
2) 이런 경고에, 백성들은 마음을 열고 자신들의 죄악을 두 가지 차원으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첫 부분은 눈에 드러나고 느낄 수 있는 죄의 결과에 대하여 고백(告白)했다(9-11절).
☞ 백성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환경이 되어서, 자신들은 온통 어둠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게 되었고(9절),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분명하니까 자신들의 삶은 매사에 확신 없이 더듬는 삶이 되었고, 밤낮 없이 넘어지고 자빠지며 살게 되었으니, 실로 산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삶임을 자백하였다(10절). 그 바람에 정작 마음으로는 정의나 구원을 바라지만 잡히지 않고 멀리만 있는 것 같아, 그저 새들처럼 울부짖고 슬피 울며 지낼 뿐이다.
둘째 부분은 자신들 안에 있는 허물과 범죄의 실상에 대하여도 진솔하게 자백했다(12-15절).
☞ 자신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이며 살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포악과 패역을 쫓았으며, 거짓말을 마음에 거리낌 없이 구사하고 살고 있음으로써, 하나님이 바라신 정의와 공의의 세상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공공장소에서도 정직이나 성실이 통하지 못하는 곳이 되게 하면서, 종국에는 의로운 자들이 손해를 보며 사는 세상이 되게 했음을 고했다.
3) 이런 솔직한 고백 앞에 여호와께서는 어떠하셨나? 그는 그러한 어둠과 모순된 현상으로 인하여 좌절과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당신 백성의 모습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래서 적절한 사람이나 중재자가 없으면 당신 자신이라도 직접 나서서, 당신의 구원과 공의가 펼쳐지도록 하시겠다고 다짐하셨다(16-17절). 그때에는 당신이 공의로 갑옷을 입고 구원을 머리의 투구로 쓰시며 행위대로 갚으시는 보복의 옷으로 완벽히 무장하셔서, 열정으로 행동하시는 주역으로 찾아 나서실 것을 예고하셨다(18-19절 참조).
4) 그때의 당신은 정죄자가 아닌 구속자(救贖者)-Redeemer)로서 시온 예루살렘을 찾을 것을예고하셨고, 그중 야곱의 후손 중에서도 죄과를 떠나 사는 의로운 자들에게 임하시리라 하셨다(20절). 그들은 그 어둠의 시대에서 고난과 시련의 역경을 안고 사는 이들이었는데, 바로 그들을 구속자께서 찾아내서 품으시겠다고 하셨다. 곧 찾아가시는 메시아 시대가 예고 되었다.
3. 서신서 / 딤전1:12-17 /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본문은 찾아오시는 메시아 시대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사도 바울 자신임을 고백한 내용이다(17절). 특히 예수를 향한 최대의 비방자요 박해자며 폭행자였던 ‘죄인의 괴수(魁首)’였던 자기를 찾아오셔서, 이토록 영광스러운 사도의 중임(重任)을 맡기신 일에 대한 감격이 가득하다(13절). 주님의 바울 찾으심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진 구체적 사례였다(사59:20 참조).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기꺼이 주님께 바치고, 순교의 제물도 될 수가 있었다.
1) 매우 주목될 부분은 괴수인 자신을 향한 주님의 용납이, 자신이 믿기 전 주님을 미처 알지 못하여 저지른 악행이었음을 주님이 너그럽게 받아 주셨기 때문이었다는 점이다(13절). 주님은 미처 몰라서 잘못한 자들에게는 한없는 관용과 긍휼의 품으로 받아 주시는 분이시다. 바로 그 점이 사람을 다시 세우고 주님을 사랑하게 한다. 의사 누가는 그 점을 매우 광범위하게 활용하면서, 예수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데 활용했다(눅23:34, 행3:17, 13:27, 17:30 참조).
2) 또한 주님이 바울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심은, 이후에 또 다른 바울과 같은 자들에게 본(本)이 되게 하시려 함이었다(16절). 그래서 영원하신 왕 하나님의 품은 모든 죄인에게 항상 열려 있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들이나(이사야) 늦게라도 깨닫고 돌아오는 탕자와 같은 자들에게도(바울) 항상 함께 살 자리를 마련해 두신 분이시다.
o 사순절에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나의 왕이요 진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심의 회복에 있다. 나를 향한 예수의 자비와 긍휼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 알아야만 내가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드려 충성할 수가 있다. 나의 이익이나 유익에만 관심을 둔 신앙의 수준에서는, 나 역시 언제든 예수를 배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 될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순교자의 영성을 품고 살아갈 자가 되도록 깊은 기도를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