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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2)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교회연합주일

관리자 2025-09-09 (화) 11:08 9시간전 10  

본문) 창 11:1~9, 막13:14-27, 고후4:1-6


오늘은 창조절 둘째 주일이다. 폭염의 기세가 여전하지만, 조석으로 불러오는 기운은 이미 때가 가을에 성큼 들어섰음을 알게 한다. 창조주의 손길은 역시 경이롭고 놀랍다. 그 혹독했던 더위 덕분에 오곡백과(五穀百果)를 맛보게 될 것을 생각하니, 이 또한 반갑지 아니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시련 속에 살아온 내 인생은 과연 어떻게 익어왔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이런 중에 최근에는 남북 정상들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동을 통하여 세계적 주목을 받았는가 하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도 북경에서 개최된 인민혁명 제80주년 혁명기념 식전에 참석하여,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과 함께 군사의 열병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모습은 우리 남북의 위상과 역할이 분명히 세계적 관심의 초점에 들어가 있음을 보여 준 장면으로서, 언제가 기대될 남북 통합 정부의 미래와 그 역할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다.


분명히 우리가 지금은 분단의 시련 속에 있으나, 언젠가 통일 내지 통합정부만 이루어지면 이는 우리가 세계의 중심 국가로서, 세계 양대 진영의 머릿돌 역할을 감당할 주역이 될 것을 꿈꾸게도 하였다. 부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 우리 민족에게 그날 그때를 안겨주시길 기도드린다. 게다가 최근 미국 정부가 우리 조지아주에 파견되어 있는 우리 노동자들 약 3백 명 정도를 비자 문제로 긴급 체포한 사건이 발생하여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일도 발생하였으나, 다행히 황급히 수습되는 차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런 중에 오늘 우리는 창조절 둘째 주일의 세 본문 말씀을 받는다. 대체 무슨 말씀들인가? 전체적 내용을 보면, ‘흩으심’에 대한 이야기와 ‘모으심’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 소개되어 있다. 물론 이 둘 모두의 주도권 행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그래도 하나님의 흩으심의 내용들은 다소 낯설다. 물론 흩으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흩으시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바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실 때이다. 그게 어떤 때인가?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범죄와의 단호한 단절의 의지를 표명하실 때이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죄악과의 공존을 불허하실 때이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불순종에 따른 추방 사건이 그 첫 예이다. 또한 노아 홍수 때의 일괄 심판도 그런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보내셔서,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되찾게 하고자 하실 때이다. 탕자의 비유가 그 경우이다(눅15:11이하).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을 바벨론 제국 휘하에 보내셔서, 70년간이나 눈물의 밥을 먹게 하신 경우이다. 그것은 최악의 멸망 상황을 차단하고 연단이라는 차선(次善)을 통하여, 그의 백성이 회개하고 방향 전환을 하여서 당신께 돌아오게 하려 하실 때이다. 


이것은 심판은 심판이지만, 실재는 제모습 찾기를 원하시는 마음에서 나온 은총의 조치(措置)이다. 여기에는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전체가 아닌 일부라도, 마음을 돌이켜 돌아오려는 이들에 대한 선택적 배려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당신의 ‘택한 백성’(the elect)이나 ‘남은 자들’(remnant)로 규정하시고 지극히 사랑하신다. 그런 그들에게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이어갈 새 역사를 위하여 일하도록 과감히 기회를 주시기도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모음이 곧 축복이요, 흩어짐이 곧 저주라는 단선적인 공식은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든지 필요하면 모으기도 하시고, 흩으시기도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모으려고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이 흩으시기도 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이나 구원을, 흩으심이나 모으심을 가지고서는 결정짓는 분이 아님이 분명하다. 비록 지금은 형편상 흩으셨으나, 여건과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나 다시 복(復) 낙원 할 기회를 열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침 한국교회가 교회연합(敎會聯合) 주일로도 지키는 때인데, 그런 점에서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의 의미는 더욱 크다. 사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분열의 아픔과 아쉬움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지내오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분열만을 탓하고 지낼 때는 아니다. 그 대신 이런 형편에서 우리가 모두를 위하여 보다 감당할 일들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게 무엇일까? 


우리가 서로 다름과 차이만을 크게 보지 말고, 우리 교회(교단)들이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나름대로의 은사들과 역량들을 서로 인정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 교회들과의 사랑의 연대와 선교적 역량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할 수 있다면, 우리의 지금의 분열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자원이 될 것이다. 아울러 세상을 살리는 교회의 참모습을 되찾게도 되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제 모습과 맛을 드러낼 교회도 이룰 것이다. 


오늘 세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물로서의 교회의 영적 질서들을 다시 보자. 말씀들은 당신의 창조 세계를 거스리는 자들을 향한 심판으로서의 흩으심과 함께, 당신이 정해주신 영적 질서인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향한 보호책으로서의 모으심이 양립되어 있음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1. 구약 / 창 11:1-9 / “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에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라”


에덴에서 밀려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워진 인간들은 그때부터 자신의 생존과 자존을 위하여 더욱 어딘가에 매달리는 행보를 취한다. 그들은 이미 거대한 군상(群像)을 이루어 살게 되면서, 자신들의 결집된 힘에 관심한다. 소위 ‘집단(集團)’의 힘이다. 그것으로 가슴에 품고 있는 소외감을 벗어나고자, 집단이나 단체를 대신할 이름들을 내세우려고 한다(4절 참조).


본문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넓은 평지인 시날(Shinar)이 무대로 소개되고 있는데(2절), 사람들은 그곳에다 거대한 탑인 바벨탑 건설을 시도했다. 역사에는 아마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고 보인다. 이집트의 스핑크스, 중국의 만리장성, 페루 잉카문명의 마추픽추, 인도의 타지마할, 요르단의 페트라 등등 기타 세계 처처에 알려지지 않았던 유무형의 중대형 성읍과 탑들의 건축물 등등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지켜보신 조물주 하나님은 그런 일들을 부정적으로 보셨고, 그것을 막고자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다. 


그 흩으신 표면적 이유로는 그 권력자들이 그 탑을 높이 쌓아서, 자기들의 이름을 온 천하에 과시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4절). 그러자 주님은 하나 된 언어를 혼잡(=바벨)하게 만들어 서로의 소통을 못하게 하신 것이다(6-7절 참조). 하지만 더 직접적 원인은 이 일 때문에 엄청난 국고가 손실되면서 국민의 삶이 피폐해지고, 민중의 노동력 착취와 인권 탄압으로 인한 탄식과 신음들이 커지면서, 결국 이 일이 중단됐다고 보인다. 


결국 바벨탑 프로그램은 인간들의 결속과 이름 내기에 집중된 행동들로서, 전혀 비생산적인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창11장 본문). 그러기에 이번에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나서서, 당신과의 소통 관계 확립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들을 출현하게 하는 역사의 새 방법을 선택하셨다. 곧 아브라함을 소명자로 세우시고 그와의 언약과 축복으로 새롭게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지구촌에 출범시키는 일이었다(창12장). 이 모습은 남신도회 주일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2. 복음서 / 막 13 : 14-27 / “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에 두시고 지켜내셔서 끝내 살리시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억압자나 박해자나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떤 자들이 하나님께서 편(便)들어 주시는 무리에 속하는 자들일까? 그 점에서 오늘의 복음서는 매우 흔치 않은 모습으로 그 대답을 제공한다. 


배경은 마치 지구촌이 최후의 날이라도 맞이한 상황이다. 여기서는 억압자와 피(被)압박자들이 아주 대조적으로 그날을 맞이하고 있다. 모양세는 너무 일방적이고 속수무책의 형국이다. ‘어떻게 하든 살아 남아라’ 것이 그때 최선의 방책이었다(14-18절).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당하는 일이었기에, 유구무언의 순간들이었다. ‘대체 하나님은 그때 어디 계셨는가-!’


학자들은 이 본문이, 희랍 제국에서 제2 알렉산더와 같은 왕으로 알려진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당시 자기 주변에서 유일한 신본주의자들이었던 유대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 상황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본다(기원전 170년). 그는 자신이 대표적인 인본주의자로서, 신본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믿는 자를 학살했다. 다행히 BC 160년경에 끝나긴 했지만-(20절).


그때 주어진 성도들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는 이랬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에 서거든)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逃亡)하라(14절). 지붕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무엇을 가지려고 들어가지도 말라.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려 뒤로 돌이키지도 말라(15-16절). 아이 밴 자와 젖먹이는 자는 이런 일이 겨울이 터지지 않도록 기도하라’(17-18절). 그때의 유일한 피난 수단은 오직 도망, 피난, 기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이러한 사태가 완화됨을 다행스러운 일로 술회한다(20절). 그들의 폭력 행위가 예상 밖에 길지 아니함은, 하나님이 그날을 감(減)해 주셨기 때문으로 본 것이다. 그 점을 함께 감사하자는 뜻이다. 이런 하나님의 대책을 보면, 확실히 우리 인간의 대응의 결과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취할 행동의 지침들은 나왔다. 그것이 대체 무엇들인가? 


믿음 공동체의 안팎에서 분출하는 거짓 세력들 및 이단(異端)들에 대한 예리한 분별력을 발휘하는 일과, 흔들리지 않는 종말의 믿음을 견지하는 자세이다(21-27절 참조). 사실 외부 박해는 우리의 영혼을 더욱 강하게 무장시킬 수 있지만, 내부의 거짓 세력은 자칫 우리 영혼을 아예 해체 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21-23절). 곧 미혹(迷惑)이 최고의 적이다!


다시 보자. 시련과 박해의 터널을 통과한 성도들은 안전할까? 아니다. 그들은 또 다른 참상(慘狀)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참상이란 무엇인가? 그들 신앙에 모델같이 보였던 위인들의 변절된 모습을 대하게 된 일이다(24-25절). 그래서 그들로 인해, 깊은 충격과 비애를 당하는 일이다. 그들은 바로 오랫동안 신앙으로 소문난 큰 스타였던 위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그 무서운 박해와 시련의 과정에서, 크게 변절해서 추해지고 실망을 안겨준 원로(元老)들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내 연약한 신앙에 큰 충격과 시련과 시험을 안겨준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도 이런 숱한 변절자들이 우리 한국교회에 나타나, 얼마나 비애를 안겨 주고 있는가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마지막 권고를 하신다. 그런 타락한 인간들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잘 극복해서 그 마음과 고통의 시련을 이겨낸 사람이 되어, 큰 권능과 영광중에 오시는 인자(人子)를 보게 되라고 권하신다(26절). 그런 사람만이, 오실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어 당신의 택(擇)한 자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재(再)약속해 주신 바로 그 구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26-27절, 신4:32, 눅21:28,, 살전4:17 참조). 


3. 서신서 / 고후 4:1-6 / “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그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반(反)신앙적인 바벨탑 문화 쫓기를 거부하고, 거짓 선지자들처럼 이적과 기사 중심의 미혹(迷惑)하는 증언자들의 모습도 아닌-, 제3의 길인 다시 오실 메시아를 제대로 드러내려는 그의 양심적 증언에서 복음의 참 빛이 드러남을 밝힌다. 이를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자비(긍휼)하심에 따라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도직을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아래의 몇 가지 내용으로 온 교회와 성도들에게 천명하였다. 이는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주님의 일꾼들에게도 핵심이 될 지침이 된다. 


1)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1절, 하). 하나님의 종이 낙심하는 모습은 그를 부르신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태도이다. 왜 주의 일꾼들이 ‘항상 기뻐하라’(살전5:16)를 드러내야 하는가? 낙심은 거듭나지 못한 본능의 산물이다. 거듭난 종들은 결코 낙심에 빠져들 수 없다. 


2) 우리는 은폐하는 것이 없고, 간교(奸巧)하게 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는다. 오직 진리만을 드러내되, 모두의 양심을 향해 떳떳이 전한다(2절). 혹 복음이 가려졌다면 그것은 멸망 받을 자에게 가려진 것이고, 세상의 신(神)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된 복음을 못 보게 하였기에 그런 것이다(4절). 주의 종이면서도 주인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려는 말씀의 사유화(私有化)는 단연코 거부한다. 


3) 우리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되심만을 선포한다. 아울러 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모두의 종(從)이 된 것을 고백한다(5절).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오직 주인만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메신저로서의 충성스러운 자세를 강조한 까닭이다. 주의 빛과 영광을 드러내게 하고자 함이다(7절). 


o 교회의 연합은 당연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 기반은 ‘주의 돌봄 속에 있는 한 교회’ 의식에 있어야 한다. 힘의 결집이나 이름값 높이기가 초점이 된 연합운동이면 안 된다. 그보다는 모든 지체들이 서로의 은사를 나누고 공유하여서, 서로를 풍요롭게 채워주는 사랑의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 지혜와 건강을 도모할, 하나 됨의 주의 몸이 되기를 지향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모든 역사와 생명체의 주(主)이심이 강조되고, 동시에 그 예수의 지체로서의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모두를 섬기려는 종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연합운동들이 활발히 전개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복음의 빛은 찬란히 어둠의 세상을 밝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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