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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야야 할까 / 고난주간, 씨뿌림 - 4.19혁명기념주일

관리자 2025-04-09 (수) 07:49 30일전 88  

본문) 요 12:12~19, 슥9:9-12, 빌2:1-11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이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다. 입성(入城)이란 말은 아무에게나 적용되는 용어가 아니다. 왕과 같은 권력자의 궁성 입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여태껏 당신을 나라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백성들의 열망을 받을 때에는(요6장 참조), 단연코 거부하고 피하셨었는데-, 이날은 전혀 달랐다. 제자들과 지지자들의 열광하는 환영을 기꺼이 수용하셨기 때문이다. 


평민이 왕이 된다는 것은 꿈이나 꿀 수 있는 건가? 상대는 로마 대제국을 배경으로 삼은 군사력을 가진 강자인데, 그게 어찌 상상할 수 있는 건가? 체제에 대한 변혁과 혁명일 수밖에 없기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대변혁이 밑받침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발상이었다. 그걸 모르실 리가 없는데도, 그날 그 시간의 예수님은 그 민중들의 열망을 묵묵히 수용하셨다. 대체 어떻게 하시려는 것일까? 그 길에 대한 접근 자체가 이미 목숨을 건 행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어떤 왕을 생각하신 것일까? 분명한 것은 어느 특정 국가와 백성만을 품으려는 왕은 아니셨다. 그보다는 온 세상 만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구원자 차원의 새 왕이었다. 그래서 평생 아니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맺어줄 새 왕이 되시고자 하셨다. 그 방법까지도 당신이 제자들에게 이미 밝히셨던 그 방식이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이를 위해 당신은 그 어떤 인간도 전혀 들어가 보지 아니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못 박혀 수치를 당하며 죽임을 당하는 대속(代贖)자의 자리에 서셨다(빌2장). 


이는 새 구원 역사의 창출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저 흑암의 밑바닥에 던져진 씨앗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씨에서 그 씨의 생명과 DNA를 담은 새순과 열매가 나듯이, 당신을 닮은 새로운 존재와 인류가 출현하도록 역사하셨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얽힌 정치적이고 지역적이며 한 시대에 국한된 왕이 아닌, 공의와 정의에 기반한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열망을 품은 모든 자들의 영원한 왕이 되고자 하셨다. 


마침 오늘은 4·19 혁명기념주일로서, 지난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의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대항하여 일으킨 민주항쟁 기념주일이다. 그때는 특정인을 부통령으로 삼고자, 부정선거를 획책한 일에 대하여 학생과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통하여, 부패한 정권이 몰락하는 혁명을 경험하였다. 이때는 해방 후 우리 백성들이 처음으로 나라의 주인이 특정 위정자가 아닌 백성인 자신들임을 체험하는 첫 기회였다고 본다. 


이런 때에 우리나라는 지난 4월 4일(금)에 또다시 민(民)에 의한 대통령 탄핵을 이루면서, 부패하고 낡은 정권을 퇴출하는 역사를 치렀다. 이는 작년 12월 3일에 대통령이었던 윤석열이 자신의 영구집권과 왕정과 같은 철권통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친위 구데타인 계엄령을 내린 내란(內亂)에 대하여, 국민과 국회가 목숨을 걸고 저항하면서 이룩한 정치적 승리였다. 제2의  4.19 혁명과 같았다. 그 바람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켜내며 무모한 권력의 망동을 국민의 평화적 저항을 통하여 저지함으로서, 보다 밝고 건강한 정부를 조기에 세울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돌보신 커다란 은총이었다.


이제 다시 종려주일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렇게 열망과 설렘 속에서 메시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경험한 백성들은 그 후 어떤 상황을 맞이하였는가? 사실 그들의 미래는 그들 중 그 누구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역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의 크신 뜻을 받들면서, 다가올 미래를 열기 위하여 자신만이 마셔야만 할 고난(苦難)의 쓴잔을 묵묵히 받아 마셨다. 마가가 전한 그 주간 예수님의 마지막 주요 행보는 이러했다. 


잘못된 예루살렘성전을 찾아 책망하셨고, 감람산을 방문하시면서 다가올 환란에 대한 대비를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며,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가 쏟아부은 값비싼 향유 세례를 미리 받으셨고, 유월절 성찬을 제자들에게 베푸셨으며, 제자 유다의 배신도 당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의 애끓는 최후의 기도를 드리신 후, 체포(逮捕)되어 공회에 끌려가셨을 때 베드로의 부인도 지켜보셨으며,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으신 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금요일 아침 9시에 못 박히셨고, 6시간 고통당하신 후인 오후 3시에 운명(殞命)하셨다. 그의 시신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원하여 모셔서 준비된 바위 무덤에 안장(安葬)되셨다.


하지만 오늘의 세 본문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이스라엘의 왕의 입성임을 밝히려 하면서도, 그 왕은 세상 왕들의 입성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새로운 것임을 더욱 강조한다. 그 강조는 이미 있었던 구약 스가랴의 예언의 성취로서, 잘못된 세상의 악의 고리를 끊으려고 오시는데, 그것도 ‘피의 언약’에 따른 것을 예고한다(출24:8). 이는 또한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역사를 통한 것임을 암시한 대목이며, 갇힌 자와 소망을 품은 자들을 위한 것임도 예고한다. 서신서는 그런 메시아 예수의 마음을 이제 우리도 품고 살아야 함을 역설한다. 


1. 복음서 / 요 12:12-19 / ” 이는 기록되신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백성들로부터 왕과 메시아로서의 영접을 받게 된 절대적 권위가 있었다. 그것은 얼마 전,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안장까지 되었던 한 나사로를 그 돌무덤에까지 친히 찾아가셔서 그 돌문을 열게 하신 후, 그 죽은 자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라며 그의 이름을 부르시자, 그 시신(屍身)이 그의 명령을 쫓아 일어나 걸어 나와 부활(復活)하게 된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요11:28-44 참조). 


이렇게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죽은 자에게 명령하고 살려서 집으로 보내시는 일’을 예수에게서 목격한 그곳의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믿게 되었고, 그의 능력과 존재에 대한 기대감 역시 고조되었다. 그의 소문도 급속히 전국에 확산하였다. 그러자 당시의 종교 권력자들은 예수로 인한 백성의 결집이 되면 로마인들의 제압용 공격까지 예상하면서, 차라리 예수를 죽여서 모두를 안전하게 지켜내는 일이 낫지 않겠느냐는 논의가 본격화되기에 이르기도 했다. 예수를 향한 백성의 환호는 그런 복잡다단한 배경까지 깔고 있었다(12절,11:45-53절). 


1)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들은 예수와 동행하던 무리만이 아니라(막11:9 참조), 유월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이미 예루살렘에 와 있던 순례자들까지 포함되었다(12절). 그들은 죽었던 나사로를 불러내어 살리신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메시아적 깊은 기대감을 품고 이 유월절기에 참여한 자들이었다(17절). 반면에 적대 세력인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백성들의 예수를 향한 뜨거운 열망 앞에서 거의 낙담한 수준에 떨어져 있었다(19절).


2) 예수를 환영한 무리들은 이미 예수가 자기들 이스라엘의 왕(王)이심을 감추지 아니하였다(13절). 지난 오병이어 때에 이루지 못했던 자기들의 왕의 추대(推戴)가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요6:15 참조). 


3) 그런 열망에, 예수님의 응답은 어땠는가? 일단 수용하셨다. 그것은 오래전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예고된 그 내용의 모습을 취하시는 방법인 나귀를 타시는 모습으로, 백성들의 열망을 수렴하셨다(14-15절, 슥9:9 참조). 다만, 나귀는 나귀인데, 어린 나귀를 선택하시므로서, 그들의 열망과 예수께서 보여주시려는 의도가 차원이 다름도 예고하셨다. 그들의 메시아 왕국은 무력에 의한 것이었으나, 예수의 것은 진리를 드러내고(18:36-37 참조), 영원한 생명을 펼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14-16, 10:10,28 11:25-26 참조). 


4) 이런 사실은 당시 제자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나,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그리스도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 사연이기도 했다(16절). 그만큼 차원이 높고 다르게, 예수의 만민을 위한 왕의 등극이 진행되었음을 말한다. 


2. 구약 / 슥 9;9-12 / ”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새끼 나귀니라 “


예수의 입성을 예고한 내용으로 알려진 스가랴서 본문은, 오시는 메시아로 인하여 다스릴 평화의 왕국이 어떤 것일지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 왕의 특징들 몇 가지를 살핀다(9-10절). 


1) 공의(公義)로우시다(righteous). 이 얼마나 소중한 정체성인가? 이 세상 모든 권력자들은 바로 이 공의 차원에서 실패한다. 사적 이익이나 편파적 치우침으로 한쪽에 치우쳐서, 정치를 망치게 되는 경우가 너무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번의 윤석열도 그런 모습 때문에 쫓겨난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완전 치우침이 없으시다. 법과 원칙, 당신이 진리로 세우신 그 영원한 질서에 따라 온 세상 만민과 만사를 통치하시니, 그러기에 우리가 그를 믿고 산다.


2) 구원을 베푸신다(having salvation). 이는 보호하고 지키는 능력과 품을 가진 분이란 뜻이다.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는 모든 이들이 그의 구원 능력 안에서 편안하게 안식하고 쉼을 얻게 됨을 말한다(요14:18). 


3) 겸손하시다(gentle). 이는 본래가 ‘가난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가난하고 낮아진 백성에게 보다 어울리는 왕이시다는 뜻이다(습3:12). 그러기에 그는 전쟁용 말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 나귀를 선호하셨다. 그것도 새끼 나귀이다. 나귀는 전쟁이나 싸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하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점을 보여준다(10절). 그것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땅의 모든 백성에게도 그러할 것임을 예고하셨다(10절). 


4) 군사력이나 무력에 의한 전쟁을 불러오거나 그 완력에 의하여 권좌에 오를 왕이 아니라, 세상 만민과 원근의 나라들과의 평화를 이루실 왕이다(10절). 그런 점에서, 예수는 온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다. 오신 예수는 그런 당신에 관련한 예언 성취의 마지막 관문으로서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 타시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확인해 주셨다. 11-12절 말씀은 이런 예언이 성취되기 전에, 여호와께서 당신의 피의 언약에 따라 유다 백성에게 베풀어주셨던 역사적 사례들에 대한 언급이다.


3. 서신서 / 빌2:1-11 /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의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 “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회 내부에 있는 불화와 이기심이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위협한다고 보았다(1:17,27, 4:2-3 참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일찍이 주의 성령을 통하여 선사 받았던 그것, 곧 그리스도 영 안에서 권면(encouragement)과 사랑에서 나오는 위로(comfort)와 성령을 통하여 이룩된 교제(fellowship), 그리고 긍휼(tenderness), 자비(compassion) 등등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제는 그러한 영적 선물들을 공동체의 삶 안에서 효과를 제대로 나타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1-2절). 


그를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야 하고, 모든 일에 다툼이나 허영이 아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서, 자기 일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아야 한다고 권했다. 이런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믿는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3-4절).


1) 바울은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에 관하여(5절), 원시 교회의 그리스도 찬가(讚歌)에 나타난 내용을 인용하면서 설명한다(6-11절). 


2) 이 찬가의 전반부(6-8절)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 존재의 비천한 처지로 내려와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극한의 낮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걸으신 길을 서술하고 있다. 찬가의 후반부(9-11절)는 그리스도가 걸으신 이 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서도 소개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인 인간 존재의 한계를 스스로 취하시고, 인간의 간고와 죽음 아래서의 종살이를 떠맡으심으로써 이기심과 죄와 죽음의 세력을 꺾으셨고(롬5:12-19), 만유의 어른이 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주님께 굴복하였다. 이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그런 아들이 가진 이름을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의 소유자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며(9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 모두가 그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기 때문이고(10절), 모든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기 때문이다(11절).  


4) 이로써 그리스도 예수께서 걸으신 길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삶의 근거, 힘, 모범이 되었다(5절). 따라서 성도들은 결코 자기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을 위하여 살 수 있어야 한다(4절).


o 왕으로 오신 주님의 자초하신 고난과 그 의미를 생각하는 주간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두의 삶과 구원을 위하여 취하신 겸손과 섬김이 오늘 나에게서 새순으로 드러나야만 할 때이다. 교만하여 심판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는 일이 없게 하자. 오직 겸손과 진실로 주의 구원을 이루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인류에게 전해 주신 가장 분명한 구원의 메시지는 참 강자는 주변에 있는 모든 약자를 위하여 자기를 비우며 섬기는 자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고대하는 새 시대도 그런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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