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14:25~35, 삼하 24:18-25, 행 4:32-5:11
오늘은 주현절 여덟째 주일이다. 절기 마지막 주일이며 동시에 사순절 직전 주일이기도 하다.
날씨는 겨울의 막바지에 이른 느낌인데, 그 어느 해보다도 겨울 넘기기가 힘들다는 느낌을 갖
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가온 봄을 외면할 수는 없다. 봄을 앞둔 올겨울의 날씨처럼,
우리나라의 정세도 비슷하다. 윤석열 내란 재판을 이끌어온 헌법재판소의 최종 변론도 금주로
끝이 나고, 내달인 삼월 중순 전후로는 최종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 극우의 준동이 아무리 거
세도, 다시 새롭게 열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다시 봄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내란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 하나 있다. 대체로 당사자인 대통령을
비롯한 그 주변의 지도층 인사들이 한결같이 너무도 자기 보호적이고 탐욕적인 마음과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는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또 하나는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을 하급자들에게 돌리기에 급급하면서 자신들의 책임은 오로
지 발뺌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바람에, 하급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범죄 사실이 계속 폭로되고 입증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창피한 모습인가? 그런 수준의 사람
을 나라의 대통령과 지도부에 두고 지내온 국민인 우리가 무척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사랑해서 자기가 먼저 법 태두리에서 이러한 거사(擧事)를
결단할 수밖에 없었음을 그 사례와 함께 국민에게 세세히 설명하고, 부하인 그들이 자신의 그
런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따라주지 못한 일을 두고 아쉬워하는 증언을 했다면, 분위
기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지도자를 둔 자신들을 기뻐했을 것이고, 그런 지도
자를 제대로 밑받침하지 못한 그의 참모들이나 부하들의 무책임한 배신적 행태와 함께 그런
상사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하급 종사자들의 불충한 행태를 크게 질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모두가 자기의 종신 집권과 자기 집단의 영구 권력 확보
를 위하여, 반헌법적 반인륜적 패륜 행태를 자행하면서 심지어 자기의 모든 비판자들을 일거
에 몰살까지 하려다가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금 저들은 그토록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다. 그것도 그의 하급자들로부터 그가 보인 지시와 입장에 대하여, ‘이것은 아니다’
라는 역심(逆心)을 품게 하면서, 처음부터 윗 지시에 불복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진정성과 신실성이 없는 지도자, 교만하고 모든 백성 위에 군림하려거나 거짓과 위세
를 부리며 백성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특히 자기 밑에 있는 자
들의 숫자만 믿고, 오만을 부리며 자기 욕구만을 챙기려는 자는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어떤 유형의 지도자가 모든 사람에게 공감(共感)을 안겨 주면서, 그를 따르는 모두에게 하나로
복종하게 하는가? 그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 주역들인 복음서의 예수님, 구약의 다윗왕, 서신
서의 바나바와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로 묶어 준다.
오늘은 마침 주현절에서 사순절로 넘어가는 주간이다. 이때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시
는 모습 중심에서, 당신의 속마음과 뜻을 행동으로 보여 주시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하지만 그런 주님의 마음을 그를 좇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알 리가 없다. 그저 막연한 기대
감을 품고 좇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신을 좇는 무리들에게 필요한 마음과 자
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일깨워 주실 필요가 있으셨다.
더 이상 막연한 기대감에 의존한 따름이 아니라, 당신의 삶과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상을
공유하기에 필요한 마음 자세가 무엇인지를 무장시켜야만 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그러
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목숨 건 차원의 단호한 요구가 그들에게 제시되었다. 곧 당신의 제자
가 될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였다. 그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기 위한
삶을 선택하겠느냐에 관련된 결단의 문제였다. 마치 신학자 에벨링이 일찍이 ‘신앙은 곧 결단
(決斷-Entscheidung)이다’란 말을 실감하게 하는 순간의 메시지를 던져 주신 것이다.
구약의 다윗 왕의 경우도 특별하다. 다윗은 잠시 하나님 앞에서 인구조사를 자행하는 행위로
교만한 마음을 드러냈다가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을 받는다. 그 문책의 결과는 백성이 무려 사
흘의 전염병으로 칠만 명이나 죽게 되는 참상을 당한 일이었다(삼하24:15). 이에 깊은 책임감
을 느낀 다윗은 여호와께 매달리며 백성이 아닌 자신과 자기 집을 쳐달라며 간구하고 나왔다
(17절). 이에 하나님께서는 징계의 손을 거두시고자, 대안을 내셨다. 바로 여부스 사람 아라우
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쌓고, 관계 회복을 도모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서신서의 경우는 초대교회 안에서 주님을 온전히 좇아 섬긴 무리와 주 앞에서 위선과 거짓을
취한 자의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각각 어떤 대응을 보여 주셨는지를 확인해 주신 내용을
전한다. 주의 큰 은혜를 받은 무리가 자기 소유를 미련 없이 내려놓고, 모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는 놀라운 섬김과 사랑의 봉사를 펼치는 중에, 그 일원이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
부는 거짓된 손길을 주 앞에 보임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여 결국 부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결국 세 본문 모두는 전적인 하나님과 온전하신 여호와를 섬기게 된 자들의 자세와 대응은 애
매모호(曖昧模糊)가 아니라 분명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만일 목자를 따르는 양이 자기 마
음대로 처신하며 자유분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당연히 죽임이요 버림당하기만 할 뿐이다.
이것이 주시는 하나님과 받고자 하는 인간이 상호 하나가 되어 나가야만 할 이유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를 따르는 우리도 복과 형통을 누리게 된다.
1. 복음서 / 눅14:25-35 /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대체 어디로 왜 가시기에, 당신을 따르는 조건을 그토록 힘들
고 버겁게 제시하셨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주님이 가시는 방향과 목적을 보면, 주님은 자신
이 세상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기 위함도 아니고, 온 천하에 반대 세력을 제압한 후 영웅호걸
의 자리로 올라서 자기 치하에 숱한 신하들을 거느리고자 위함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
다. 곧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세상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러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주님은 그런 당신을 따를 자들, 곧 죽음의 자리까지도 묵묵히 따를 자들의
조건을 엄청나게 부담되게 제시하셨다. 그 길은 진정 아무나 함께 할 수는 없는 길이라서 그
리하셨다. 특히 그 길은 눈앞의 손익계산에 급급한 자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길이다. 오직 예
수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구원의 길인,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길이며 과거로 현재를 구원
할 수 있게 하는 초유의 길’이었기에, 주님에게는 함께할 동역자들을 아무나 택하실 수가 없
으셨다. 이제 주님이 단호하게 제시한,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는 조건 몇 가지를 보자 :
1)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한 자이다(26절). 마태
는 이곳의 ‘미워하지 아니하다’란 표현을 ‘더 사랑하다’란 표현으로 표현하였다(마10:37). 하지
만 누가는 철저한 결단을 요구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자 이 단호한 표현을 사용
했다. 결국 예수의 제자는 철벽같은 가족의 결속 관계를 예수와의 결속보다 뒤에다 배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내와 처자(妻子)보다도 위에다 예수 따름을 올려놓았다. 주께서 말씀
하신 ‘자기 십자가(十字架)를 진다’는 부분은 바로 이런 우선순위 바뀜에 따른 아픔을 감당한
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27절).
2) 자기의 모든 소유(所有)를 버리지 아니하거나 못한 자이다(33절). 예수를 따를 때 소유의
버림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기에게는 이제 세상의 물질이나 소득이나 혜택보다, 자기가 좇으
며 섬기게 된 예수가 자기의 소득이요 자산이며 소유가 되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단호한 모습처럼 말이다(눅5:11 참조). 곧 세상에서 부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예수와 그의 나라에서 영원한 부(富)를 찾는 자가 되었음을 말한다(눅12:29-34참조)
그렇다. 우리가 예수의 확실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가족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의 순
위 조절이 분명해야 하고, 내가 힘과 능력으로 삼아 의지하고 지내는 소유과 재산 관계에 대
한 입장정리도 확실해야만 한다. 이 문제 해결 없이는 손에 쟁기를 들고도 계속 뒤를 바라 보
며 사는 자가 될 뿐이다(눅9:62). 롯의 처(妻)의 신세가 되고 만다(창19:17). 그런 사람은 맛
잃은 소금과 같아서, 종국에는 그 어디에서도 쓸모없어 버림당하는 신세가 된다(34-35절).
2. 구약 / 삼하24:18-25 / “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
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50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재앙이 그쳤더라”
본문은 다윗 왕 생애에 가장 뒤늦게 여호와로부터 혹독한 징벌을 받게 되는 사례를 담았다.
그 사연은 다윗이 각종 전쟁과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마음에 강권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유혹
에 빠져서, 인구조사를 명령하게 된 일에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인구조사 하려
면 그 전에 하나님께 속전(贖錢)을 바쳐야 하는데(출30:11-16참조), 왠지 다윗은 그 부분을 하
나님을 향한 부분을 무시하고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하며 조사를 서둘렀다. (=마치 윤
석열의 계엄선포 행동을 엿보게 한 모습과 같다). 그 결과 북쪽의 이스라엘에는 싸울만한 용
사가 80만명이었고, 남쪽의 유다에는 50만명이 있음이 보고되었다(24:4-9참조).
하지만 문제는 다윗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 조사를 한 일에 대한 자책감에 빠져들게 된 일
이었다(10절). 이는 오직 믿음 있는 자, 곧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영적(靈的) 삶
을 사는 자들에게서 드러나는 가장 무거운 신앙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 역시 그 부분에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부분이다. 예컨대, 곧 옛적의 모세가 최후에 이 부분, 곧 자기 힘을
과시하려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일이 문제가 되어, 백성들의 가나안 이주의 건을 이루
지 못하고 여호수아에게 넘기게 되었던 바로 그 함정에, 다윗도 걸려든 것이다(민20:12 참조).
이에 다윗은 먼저, 자신이 심히 미련한 짓을 행하였다면서 자백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용서를
구하였다(10절). 그러자 여호와는 세 가지 벌칙(罰則)을 제시하며, 다윗 스스로가 선택하라며 ]
지시하셨다. 나라에 7년의 기근이냐, 원수에게 3달 동안 쫓겨 도망 다니겠느냐, 온 나라에 3
일간의 전염병 심판을 받겠느냐를 선택하라 명하셨다. 결국, 짧은 기간에 당할 벌칙인 전염병
심판이 부여되었는데, 그 결과는 너무도 참담했다. 무려 칠만 명의 백성이 죽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인구 자랑, 힘 자랑할 마음의 여지를 완전히 초토화(焦土化)시킨 여호와의 징벌이었다.
극심한 두려움과 책임감에 빠져든 다윗은 결국 여호와께 회개하며 매달려 호소했다. 범죄와
악행은 자기가 했고, 이 무죄한 양무리(백성)는 더 이상 치지 마시고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
버지 집을 쳐달라며 매달렸다(17절). 백성을 살리려고 간구하며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함으로써, 다윗이 모세와 같은 지도자의 위치에 들어선 순간이다(출32:11-14,30,32 참조).
본문은 그런 목숨을 걸고 겸손히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다윗을 받으신 여호와의 깊은 배려
의 손길을 전한 내용이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매입하여, 그곳에서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
제를 드리면서, 그동안의 불편했던 모든 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
기 때문이다. 이때 땅 주인인 아라우나는 왕에게 모든 필요한 땅과 제물들을 무상으로 드리겠
다고 하였으나, 다윗은 조상 아브라함의 거래 전통을 좇아서, 그 주인에게 은 50세겔을 주고
산 후에 제단을 쌓았다(22-25절, 창23장 참조). 결국 이 성소는 나중에 그의 아들 솔로몬 왕
에 의하여 예루살렘 대성전으로 자리하게 된 역사적인 성지가 되었다(대하3:1참조).
3. 서신서 / 행4:32-5:11 /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본문은 앞에서 거론된 내용 전체에 대한 총(總)정리(整理)와 같은 내용이다. 주님을 좇는 일에
서, 전부와 성심을 다하는 무리의 모습과 거기에서 품어 나오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엇인지를
전하는 전반부의 모습과(행4장), 그런 중에도 전부가 아닌 일부 또는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여
전히 우선하는 허위와 가식적 신앙의 모습을 견지한 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전하는 후반
부의 모습(행5장)이 매우 극명하게 대비되어 소개해 주기 때문이다.
1) 처음 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이 큰 권능 속에서 전하는 예수의 부활 복음에 큰 은혜를 받아
서, 거기에 함께 모인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을 이루면서, 생활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곧 모든 물건을 통용하게 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
다. 그 바람에 그곳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밭과 집을 가진 자들이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모두 사도들 앞에 두자,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모
델이 레위족인 바나바였는데, 그가 공동체에 큰 위로를 안겨주었다(4:32-37 참조).
2) 이런 밝은 새 시대의 도래 중에도 아주 불행한 사례도 발생했다. 일행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런 움직임과는 전혀 반대되는 엇박자 행보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령
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치와 협력과 공존과 공영의 새 시대를 지향하는 교회 공동체와는 정
반대의 행동을 하였다. 곧 부부가 하나 되어, 처분한 재산의 일부를 사도들 앞에 내놓으면서,
그게 자기들의 전부를 바친 것으로 거짓을 고했기 때문이었다(눅14:33절 참조). 이는 그들이
사도와 성도들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어서, 맛 잃은 소금처럼 그 즉시 버림
을 당했다(5:1-11절, 눅14:34-35 참조). 이런 단호함은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절대 필요한 자
세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표본으로 삼은 것이다.
o 우리는 모두 주님을 따르는 주의 자녀요 제자며 백성이다. 그러기에 태도를 더욱 확실히해
야만 한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우왕좌왕(右往左往) 하면 안 된다. 바나바와 같아야 하고,
아나니아 부부와 같이 처신하면 망한다. 신실하고 온전한 믿음의 복종을 주께 드려서, 나를
통하여 새 세상을 활짝 열어가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자. 그의 사람으로 끝까
지 쓰임 받게 될 주역들이 되자. 사순절이 임박했다. 더욱 몸과 마음을 주께로 나아가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