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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9)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교개혁주일- 이단경계주일

관리자 2024-10-21 (월) 18:17 22일전 58  

본문) 신 7:6-11, 마 5:43-48, 롬1:1-7 


오늘은 창조절 아홉째 주일이다. 밝은 하늘에 드높은 가을 구름이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사방의 숲들도 어느덧 총천연색 단풍으로 물들어서 그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조석으로는 냉기마저 흘러서 가을의 또 다른 맛을 진하게 풍기어 준다. 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아닌가 싶다. 순식간에 지나겠지만, 모두들 한껏 즐기시고 새 기운을 회복하시길 빈다. 


이런 때, 우리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이한다. M.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성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게시판에 95개조의 논쟁적 항의문을 내걸면서 시작된 종교 개혁의 물결이 이제는 어느덧 507주년이 되었다. 종교 개혁이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敎會)개혁이다. 당시의 유럽 사회는 로마카톨릭이 단일 종교로 위세를 떨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루터의 주 논쟁점은 교회가 무엇이며 성서가 무엇이냐에 집중되었다고 본다. 이 질문은 폭발성을 발휘하면서, 프로테스탄트란 개신교가 지구촌이 탄생했고, 개혁(改革)교회가 등장하였다. 


카톨릭이 가장 심하게 교회 됨을 훼손시킨 일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설교를 사유화(私有化)시킨 일이었다. 말씀대로 설교하지 아니하고, 교회와 사제의 사익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껏 이용한 일이었다. 그래서 개혁자들의 공동적 구호는 말씀의 사유화 행위를 회개하고, <말씀으로 돌아가자>였다. 그래서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자는 다짐이었다. 그 바람에 개신교는 성서 번역과 교육이 번성했고, 강단의 말씀이 성서적(聖書的)이 되도록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세계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회는 어떤가? 제대로 된 말씀으로 돌아갔는가? 말씀의 사유화에서는 자유로운가? 저 로마교회와는 확연히 다른 교회가 되어서, 더 이상 개혁될 것이 없는 교회가 된 건가? 유감스럽지만, 전혀 아니다! 말씀의 사유화 현상은 우리에게서 오히려 더 심화된 느낌일 정도이다. 원인은 많지만, 교단이 난립(亂立)되면서, 신학교도 난립 되고, 신학도 하나 되지 못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증언하지 못한 채, 삼위(三位) 중의 한 분만을 붙잡고 편중되어 편협하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부흥에 목마르면서 말씀에 대응이 부실했다. 


게다가 교인과 교세의 덩치가 커진 교회들은 그 세력을 지키기 위하여 보수화되었고, 또 분단으로 인한 이념 논쟁에도 깊이 휘말리면서 상당 교회들이 진리의 힘보다는 세속적인 극우적 성향을 보이면서, 복음의 본질에서 일탈(逸脫)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지금의 한국교회는 공공성을 상실하고, 사회적 신뢰도를 심각히 의심받을 지경까지 떨어졌다. 개혁교회답지 못해서 다시 재개혁되지 않으면, 완전히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본다. 


오늘은 또 교단이 제정해서 지키는 이단(異端) 경계 주일이기도 하다. 이단은 분명히 경계하고 배척해야 한다. 하지만 기득권을 가진 채, 행동과 가르침이 말씀에서 이탈한 이단적 요소를 가진 교회들의 행태를 보면, 이단 경계가 더욱 모호해지고 힘을 잃게 된다. 비(非)삼위일체적인 교회들, 신앙과 행위가 일치되지 못한 교회들, 이단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대하고 있는 교회들, 입과 손에는 용서와 화해보다는 정죄와 돌맹이를 들고 있는 교인들이 지금 한국교회엔 다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는 예수의 말씀(요8:7)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 숱한 교회들이 빠져 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하여 본 삼위일체력은 지난 주일의 말씀에서부터, 우리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하여, 최고요 최선의 첫째 구원의 원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적 계명을 하나로 묶어서 증언하기 시작했다. 이

는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의 세 본문의 내용들도 바로 그 맥락 위에 있다. 신명기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왜 당신의 성민(聖民)으로 택하여 세우셨는지를 밝혀 준다. 그들이 공로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연약한 그들을 자비와 사랑의 눈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지극히 작은 민족임을 주목하시면서(7-8절), 그들을 앞세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 거룩한 민족의 모델이 되게 하시고자 그들을 택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님 사랑보다는 이웃 사랑에서 실패하였고, 그 대가를 온몸으로 혹독히 치르게 되었다. 


복음서에서는 그 대가로 얻게 된 오랜 저주의 그늘을 제대로 벗어나게 하시려고 오신 예수께서, 그 치명적인 실패점이었던 이웃 사랑에 있어서의 필요한 기준선을 명확히 제시하신다. ‘바로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절)는 말씀으로 복음의 새 지평(地平)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비로소 무자격자를 먼저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는 것이다(45절). 


로마서에서는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왜 하나님이 이방인인 그들을 사랑하시고 성도로 부르셨는지를 일깨운다(7절). 이방인은 본토인에 비하여 유리(有利)보다 불리(不利)함이 많다. 차별도 많이 받고, 툭하면 배척도 당하며, 폭력 앞에서도 취약하다. 그런 그들이 타국에서 살아남을 비법이 있다면, 그게 무엇인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비법을 본받으면 된다. 곧 그곳에서도 통하고 힘 있게 살 방법, 곧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며 사는 일이다. 


이번 종교개혁주일을 통해서는 우리가 삼위일체력에 따른 말씀의 인도를 잘 받아서 내부에서 힘을 잃고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복음을 다시 찾는 일에 집중하여야 하겠고, 이단경계주일을 통해서는 이단과 약자에 대한 분별력을 키워서, 이단은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약자는 더욱 사랑으로 포용하여 돌아보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교회는 결코 정죄의 힘이 강하면 안 된다. 하지만 사랑의 힘은 강해야만 한다. 사랑의 힘만이 모든 약함과 부족함까지도 모두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1. 구약 / 신7:6-11 / ”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택하심은 -“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인지를 규정해 주면서, 그 연유와 함께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진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 사랑의 방법은 구체적이다. 그가 오늘 그들에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 일이다. 


1) 모세는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正體性)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성민(聖民-holy people)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지상 만민 중에 ‘자기 기업의 백성’(his own special people)으로 택하신 것이다(6절). 


2) 그 택하심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덩치가 커서가 아니다. 수효나 규모로 보면,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다. 그런데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까닭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8절,상). 적은 것이 여호와의 선택에 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고 본다. 본래 적은 것은 힘이 없고 연약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을 적합한 그릇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출애굽의 은혜 주신 여호와께 잊지 말고, 항상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8절,하). 


둘째는 여호와가 그들 조상인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맹세하신 바를 지키려 하신 까닭이다(8절, 중). 여호와는 근본 신실하신 분이기에, 한번 약속하시면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특히 여호와는 조상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그 후손들을 통하여 세상 만민들이 복을 받도록 하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창12:3 참조). 그러기에 여호와께서는 그 복이 실현되도록 하시려고, 그 후손들이 이웃 사랑의 모범과 표본이 되도록 훈련을 오랜 세월 받게도 하셨다. 그게 바로 애굽에서의 430년간의 오랜 종살이였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이웃 사랑의 훈련을 그들 이스라엘이 냉혹히 받았던 것이다!


3) 따라서 성민이요 여호와의 기업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삶은 어떠해야만 한가? 마땅히 그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고, 그의 계명과 명령을 준행하며 살아야만 한다. 그런 삶이 그들의 운명이요 책무요 사명이었다. 하나님과 조상 사이의 계약을 좇아 사는 일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천 대에 이르게 내려주시는 복(福)과 인애(仁愛)를 누리며 살아가야만 했다(9절). 그런 계약을 무시하고 외면하여 여호와를 미워하게 되어서, 그때부터 발생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저주의 보응으로, 급하게 멸망 당하게 되는 어리석은 일이 없도록 해야만 했다. (10절)


2. 복음서 / 마 5:43-48 /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


당시 이웃 사랑이 무너졌고 그래서 하나님 사랑 자체는 이름만 남아 있었던 유대 종교사회에서, 그 사랑의 양 날개 곧 아브라함에게 본래 패키지(package)로 주셨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창12:2-3) 제대로 복원(復元)해 내시려는 예수님의 언행은 매우 강경(强硬)했다. 무엇보다도 그 복원의 열쇠는 결국 무너진 이웃 사랑의 회복에 있었기에, 이웃 사랑을 위한 마지노선을 제시하는 일은 더욱 적극적이셨다. 


그 기준점은 바로 네 이웃 속에 들어있는, ‘네 원수(怨讐)를 사랑하라’였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였다(44절). 그 동안 유대 경건주의자들에게서의 이웃 사랑은 철저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대접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과 대접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본능적이요 인간적인 차원의 사랑이었을 뿐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자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비판하거나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이웃에게서 제거하였고, 외면한 것이었다. 


원수나 박해자는 더더욱 내 이웃 명단에선 없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셨다. 네가 제외해 버린 이웃의 범주를 다시 돌아보라고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아니, 내 마음과 관심의 영역의 명단에서 제외(除外)시킨 자들, 바로 그들을 너희는 이웃 명단에 다시 포함시키라고 요구하셨다. 그들도 너희 사랑과 축복기도의 대상에 포함시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45절). 아, 이 얼마나 난감한 주의 명령인가? 내 사랑과 기도의 범주에 원수와 적들이 들어와야만 되다니-, 이 어찌 난감한 일이 아니겠는가? 목적은 분명하다. 내 사랑의 완성을 이루기 위함이다. 


자세히 보면, 나의 이웃 선정은 너무도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자는 모두 제외되었다. 더럽다거나 죄인이라거나 무시당할 만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내 이웃 명단에서는 빠져 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내 사랑은 하나님이 바라신 인간 사랑의 모습과는 아주 다르게, 오직 나의 욕망과 이익 중심으로만 채워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45,하). 곧 온전하지 못한 이웃 사랑의 늪에 내가 깊숙이 빠져 지내왔음을 알게 한 것이다(48절). 이런 시각이라면, 곧 있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 자신도 제외당할 대상이 분명할 것이 아니겠는가! 


3. 서신서 / 롬1:1-7 / ”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기 자신이 사도(使徒)로 부르심을 받은 일과 그들 교우들이 모든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도(聖徒)로 부르심을 받은 일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그 중요성과 의미를 환기(喚起)시켜 준다. 이는 바울이 그들 로마교회 가족들에게 자신들에게 부여된 은혜의 소명에 대한 영적 각성을 통하여, 그들이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하고자 함이었다. 


1) 바울은 먼저 자신의 사도직에 부르심을 받은 일을 거론하였다. 그는 이 직분의 자리에 들어가 일하게 된 자체를 최대의 기적과 영광으로 간주한 사람이다. 왜 그런가? 자기는 원래 예수 공동체를 박해했던 원수요 괴수였던 자였는데(딤전1:12-16 참조), 그런 자인 자기를 택하셔서 이토록 생명의 복음을 위해 앞장서 일하게 하신 주님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열린 복음의 능력이요, 거룩한 힘의 실체를 보여준 일임을 힘써 소개하고 싶었다. 


2) 그 예수는 로마교회 식구들에게도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들이 예수의 소유자들이 되었고 그것도 거룩한 무리의 집단인 성도들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바울이 일깨워 주고 있다. 사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제외된 존재들로 간주 되기도 했다. 소위 영혼 없는 개돼지(?) 취급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 십자가의 희생은 하늘 구원의 문을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활짝 열어서 참여하게 해주셨다. 그 은혜를 입어, 이제 이방인 중심의 로마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영접받기에 이르렀다. 


o 이런 사도의 모습과 로마교회의 모습은 어찌 그 교회만의 것이겠는가? 이 말씀을 받는 우리 모두의 처지와도 완전 똑같다. 우리 역시 예수의 생명의 바람에 예수의 원수가 친구가 되고,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에 영접받는 은혜를 맛보게 되었다. 그러기에 이 예수의 은혜를 입어 사도 된 자나 성민과 성도 된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될까? 


우리의 약함과 죄악을 은혜로 감싸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주변의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또 이런 좋으신 구원의 주님이 계시고 복된 세상이 활짝 열려 있음을 열심히 증언하는 자들로 살아가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비난하거나 외면하지도 아니하시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이 여기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여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이 모습을 본받아, 우리의 이웃 사랑도 보다 실질적인 사랑, 생명력 있는 사랑, 원수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내 이웃 사랑이 되도록,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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