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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22-11-30 (수) 16:05 2년전 905  

본문) 슥 2:1-13, 눅 19:28-40, 롬 11:25-32


대림절 둘째 주일이다. 날씨가 갑자기 강추위를 보이면서 전국을 얼어붙게 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의 위세가 여전해서, 독감과 함께 우리의 건강을 해칠 수 있기에 우리 모두 건강 돌봄에 유의해 주시기 바란다. 화물노조 등의 파업으로 정부와의 마찰도 크게 일면서, 우리의 경제에 주름살도 커지는 듯해서 걱정이 된다. 무엇보다도 지난 10.29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이 비로소 자기 목소리가 나오면서, 우리 정부의 그 동안의 무성의한 대책이 다시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밖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의 장기화로 유럽의 겨울은 시베리아에서 공급해 온 천연가스의 문제가 여의치 않아 매우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리라는 소식이 들린다. 어서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의 소식이 들리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악화되는 기후 위기도 금년 겨울에는 어떤 모습으로 이 지구촌을 흔들지 염려된다. 바라기는 우리나라의 대북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부디 대미. 대일 종속외교가 아닌 자주외교를 펼치길 소망한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무엇인가? 오실 분에 대한 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한 구조이다. 그것은 영광으로, 평화로, 긍휼의 주로 오셔서 이 세상에 구원을 안겨 주려고 하시는 바로 그 주님이 오늘의 말씀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분하면, 구약 내용은 영광(榮光)의 주님을 말한다(6,8절). 꿈과 환상의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증언된 오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안겨 주실 하나님이신데, 그 회복은 시온을 떠나셨던 영광의 하나님의 귀환을 통해서였다. 여기에서 놀라운 일은 유대인들만의 환국이 아니라, 많은 나라들(백성들)이 더불어 오는 환국이었다는 점이다.  


복음서 내용은 하늘의 영광이었던 그 분이 땅의 불평등과 갈등을 해결해 주실 평화(平和)의 주님으로 오셨음을 보여준다(38절). 로마 황제 같은 인간 메시아의 위선을 벗어나 모든 세상의 낮은 자들까지도 함께 외치며 환영하고 맞이할 그 진정한 평화의 주님을 알리려 한다.


서신서 내용은 긍휼(矜恤)의 주되신 성령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음을 알린다(30-32절). 그것도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성령께서 안겨주시는 은사와 부르심의 틀 안에서 서로 만나고 협력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하나로 참여하게 되는 신비를 전한다. (그러기에 이제 이 말씀들이 안내하는 길을 충실히 좇아서, 여러분 모두가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 뵙고 새 힘과 지혜를 얻고 승리의 삶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1. 구약 / 슥 2: 1-13 /   “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의 세 번 째 환상 내용이다. 그는 ‘여호와는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진 예언자로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며 예언운동을 하던 선지자였다. 그가 이 환상을 받은 시기는 주전 520-518년 경으로서, 무너진 성전이 오랫동안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된 시기였다. 


이 때 그는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하여 말하면서(1:7-6:8), 낙담해 있는 귀환자들에게 그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전환이 있을 것을 예고하면서, 그러기에 모든 불의(不義)에서 떠나라고 부르짖는다. 그런 중에 오늘의 본문에서의 그의 증언은 그들에게 오실 메시아가 자신들에게서 떠나간 영광을 회복시켜 주실 분으로 오실 것을 전한다. 이는 단순한 무너진 성전의 재건만이 아니라, 망가진 예루살렘의 명예까지 많은 나라들의 참여 속에서 회복되리라는 복음이었다. 


1) 스가랴는 환상 속에서 측량줄을 가진 한 사람을 만난다. 알아본 즉, 그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넓이와 길이를 측량하려는 자였다(1-2절). 그런 후 잠시 후엔 다른 천사가 소식을 전한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에 관련한 증언인데, 당시와 같은 황폐한 상황에서는 가히 꿈만 같은 상황이 예루살렘에 임할 것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영광의 예루살렘 시대의 예고였다.  


어떻게 될 일인가? 머잖아 예루살렘은 너무 많은 사람들과 가축 때문에, 거리를 측량할 수 없이 거대한 도시로 변하리라는 것이다. 인구 면에서나 경제에 있어서 큰 나라가 될 것에 대한 예고였다(3-4절). 이런 현상은 안전 국가가 아니고서는 꿈꿀 수 없는 일이어서 더욱 반갑고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여호와께서 덧붙여 주신 말씀이 더욱 중요하다.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5절). 이런 범상치 않은 말씀은 무슨 뜻인가?  


2) 이는 바벨론 포로생활과 함께 떠나갔다고 보았던 여호와 자신이 이제는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과 온 시온 백성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 모두를 친히 불로 지키시는 방패와 수호자가 되시겠다는 선언이었다(10절). 그래서 그들의 영광의 주가 되시고, 그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도성과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3)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곧 예루살렘의 인구 급증과 잘사는 도시에 따른 영광 회복은 유대인과 돌아온 유대 디아스포라들로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 대신 주변의 많은 나라들과 족속들이 이미 여호와의 백성들이 되어서, 그들의 예루살렘 방문과 이주, 그리고 다양한 신앙적 경제적 교류를 통한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됨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11절). 그래서 이런 대변혁의 중심에 예루살렘을 서게 하실 것이라는 환상이었다.   


4) 이런 환경 변화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이란 쓰라리고 치욕적인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부여받게 된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다. 철통같은 ‘순혈(純血) 유대주의’를 벗어나면서, 하나님을 영접한 모든 세계인은 다 같은 주의 형제요 자매라는 신앙의 새 틀은, 실로 포로생활을 통하여 온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맛볼 수 없는 일이었다. 


5) 하지만 이 이방인들의 합류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라는 환상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이제 자신만이 아닌 ‘전체 속에서의 자신’을 다시 정립해야 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귀환하신 하나님도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셨고, 세상 만민들을 위한 하나님이심을 비로소 유대인들은 받아들여야 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음이 통보된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가운데 계신 분이고, 그러기에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알아야 된 시대가 열린 것이다.    


6) 이런 놀라운 환상을 제시한 하나님은 이제 아직도 바사 왕국을 비롯한 예전의 바벨론 제국의 그늘 속에서 머뭇거리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촉구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그곳 제국을 떠나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시온에로 오셨으니, 이제 어서 그곳 북방 땅에서 떠나서 돌아오라고 하셨다(6-7절).  


7) 그러면서 주님은 그간의 당신의 입장을 밝히신다. 주님은 깊은 뜻 속에서 당신의 포로 된 백성들과 동행하시고 연단시키고자 그곳에 가셨으나, 이제는 그들 제국들도 당신의 용도폐기(用途廢棄)의 대상이 되고, 그 점을 그들도 알고 고레스같이 유대인들의 환국을 순수하게 허락하기에 이르렀기에, 당신이 그곳에 머물던 백성들을 이끌고 유대로 이제 귀환하셨으니, 이제는 외지의 시온 백성들은 서둘러 돌아오라고 지시하신 것이다(8-9절, 사40;1-11 참조).    


8) 이런 여호와의 증언이 타당성을 가진 것은 주변의 많은 나라들과 백성들이 영광의 하나님이 제국에서 유대와 이스라엘로 들어오셨음을 보고, 함께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 일로서 입증된다. 선지자는 이런 환상을 통한 민족의 미래를 긍정하면서 이렇게 외쳐 전한다.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10절). 그렇다. 영광을 안겨주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누리게 하신다.     


2. 복음서 / 눅 19:28-40 /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 


본문은 흔히 종려주일에 합당한 내용으로 인식된 곳이다. 여기에서의 말씀의 깊은 주제는 기다림이다. 자신들과 자신들이 처해 있는 이스라엘의 오랜 아픔과 고통을 완전히 해결해주실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다. 본문에서의 함성과 찬양은 그런 오랜 고대(苦待)함의 숙원이 목전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는 것에 대한 뜨거운 감동과 반응이다. 


그 기쁨에 찬 외침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平和)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의미가 큰 고백이다. 삼년 모시고 살면서 본 스승의 참 모습을 담은 제자들의 외침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오실 메시아 예수를 향한 제자들의 외침의 배경과 거기에 담긴 의미를 살펴본다.


1)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정에서 예수님은 베다니 근교에 이르자, 제자들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신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그곳에 매여 있을 터이니, 풀어 끌고 오라고 분부를 내리신 것이다. 혹 누가 왜 푸느냐고 이유를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라고 답하고 끌고 오라고까지 하셨다. 실재 상황은 주님의 예고하신 대로 진행되었고, 결국 그 나귀 새끼는 예수 앞으로 끌려오게 된다(28-35,상 참조).  


2)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웠고, 앞으로 가실 때마다 그들은 자기의 겉옷을 밟고 가게 해드렸다. 일행이 감람산 내리막길에로 접어들자, 제자의 온 무리는 자기들이 본 바를 좇아서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38절). 그곳은 슥9:9에 나타난 바, 그들의 왕이 임하시기에 기뻐 외치게 되는 예루살렘이 되어 있었다. 그 내용대로 예수님은 단순한 스승 이전에, 이미 그들의 왕(王)이셨다. 


3) 왕이시되 전쟁이나 무력의 힘을 과시하는 왕이 아니라, 세상의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남북 그 어느 곳 어떤 사람들도 모두 품어주실 평화의 왕이셨으며, 이미 하나님의 오른 편에 영광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영광의 주님이셨다(28절). 이런 모습은 이 왕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 태어나 오실 때, 하늘의 천군천사가 외쳤던 그 함성인,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1:14)에 대한 응답송이기도 했다.  


4) 예수님 자신은 이러한 제자들의 외침을 모두 수용하셨다. 당신을 왕으로 부르는 일도 받으셨고, 평화의 주로 오신 분임도 인정하셨다. 사실 이 일은 마치 검의 양(兩) 날개와 같았다. 자신 이외에는 왕이 있을 수 없다는 세상의 독재 권력의 왕들과 그 추종자들에게는 예수가 제거의 대상이 되게 되었으나, 세상에서 온갖 힘의 논리에 따른 차별과 배척에 시달리던 이들과 가난한 자와 부족한 자와 죄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는 예수가 구원의 주가 되어 계셨다. 


5) 그런 역반응은 그 현장에서도 즉시 나왔다. 일부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외침에 불만하면서 책망으로 중단시키라며 예수께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단호히 거부하셨다. 이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까지 답변하셨다. 이미 주님은 현장의 외침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성육신의 목표가 반영된 것을 확인하시면서, 이제 남은 일은 십자가를 통하여 참 평화의 세상 열기를 본격화하시고자 하셨다(39-40절).   


3. 서신서 / 롬 11:25-32 /  “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의 구원하시는 손길을 ‘신비’(-mystery, 비밀)라고 표현하면서, 우리가 그 부분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을 구원해내시려고 할 때에는 유대인의 완악함을 활용하시고, 유대인을 구원하실 때에는 이방인의 완악함도 활용하시는 방법을 주목하게 한다. 이는 마치 씨이소나 널뛰기 논리와 흡사한 느낌도 주는데, 그 실례를 우리는 스가랴 내용에서도 인용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의 극심한 배신이 일자, 하나님은 그들을 세계의 대제국인 바벨론의 포로로 끌어내셨다. 그때의 유대인들의 참상은 필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다 큰 일을 하신 때였다.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죄악에 대한 회개와 뉘우침으로 복역하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다니엘을 비롯한 또 다른 역사들로 하나님만이 모든 신위의 신이고, 진짜 살아계신 주로 활동하시면서(단3:28), 결국에는 숱한 이방인과 나라들이 당신을 알고 뒤쫓아 오게 하시는 일들을 펼치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스가랴의 그런 환상이 나온 것이다(슥2:11).  


그래서 귀환할 때의 유대는 이전의 모습과는 한 차원 다른, 폭이 넓고 품이 큰 민족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 연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세계 속에서 자신을 보게 되었고, 여호와가 만군의 하나님이심을 새삼 고백하게 된 것이다. 세계와 자기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공존 공생의 대상임을 알았다. 하나님 역시 유대인만이 아닌 온 세상 만민의 구세주의 자리에 계신 분이 되어 계셨다. 이것이 또한 이스라엘의 신학과 신앙이 포로기 이후에 정립된 이유도 된다.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어떤 종족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교만하거나 독선에 빠진 자들은 배척하신다. 그러면 주의 성령은 우리에게 어떤 구원의 디딤돌을 주시는가? 바로 은사(恩賜)와 소명(召命)으로 하신다(29절). 은사는 재능이고, 소명은 일거리이다. 이 둘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내려 하신다. 이런 선물은 모두 그 분의 긍휼과 사랑에서 나왔다(30-32절). 그러기에 우리 마음 역시 겸손한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모하여야 한다.    


o 이방인이자 하나님과 원수되어 살아왔던 우리를 예수의 사랑으로 받아주셔서, 당신의 소중한 은사들을 부어 주시고, 소명의 자리에서 일하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 입고, 평화의 일꾼이 되며, 주의 긍휼을 베물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다짐하는 계절이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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