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 5:1~15, 출31:12-17, 마12:9-14
오늘은 강림 후 열 번째 주일이다. 그동안 맹렬했던 폭염(暴炎)도 조금은 누그러진 느낌이다. 올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 재해가 컸다. 폭우, 대형산불, 폭염, 산사태, 장마 등으로 너무 많은 인명 피해와 자연재해가 우리 삶을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진정 안전지대도 없고 안전한 시기도 없다는 느낌도 든다. 다시 생각해 보라. 여러분에게 과연 안전한 피난처는 있는가? 가정인가, 친구인가, 교회인가, 자연인가, 누군가?
이는 한편 그만큼 우리 인간에게는 생존하도록 부여된 자유(自由-여유)도 크지만, 동시에 그것을 억제하는 한계와 속박(束縛)하려는 굴레도 역시 크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실존적 힘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까? 물론 이 둘 모두를 관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외부로부터 우리의 삶을 옥죄어 오는 불가항력적 위협만을 생각하며, 그 대책 세우기에 매달려 살 수만은 없다. 특히 이 부분은 대체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심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기에, 보다 다른 차원의 대처가 필요하다.
반면에 하늘로부터 주어진 아주 귀한 선물인 자유(-삶의 여유)는 어떻게 하면 내 삶을 풍성하고 복되게 할 것이냐는 점을 더욱 집중하여 생각하고 사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그것은 이 영역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결단과 선택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자기 책임론도 따른다. 게다가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택하여 사용하며 살 것이냐는 점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풍성하게 거론해 주어서, 더욱 도움을 얻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그것도 부여된 자유 곧 삶의 여유(餘裕)로 간주 되는 자신을 위한 삶의 시간을 내가 어떻게 활용하며 살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주 중요하다. 그 시간이 바로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증언할 수 있을 시간적 자료(資料)가 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 시간의 내용이 바로 우리 모두가 머잖아 하나님 앞에서 보고드려야 할 내용이 될 것들이다. 어떤가? 여러분은 자신에게 부여된 ‘그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며 지내시는가?
그런 점에서 오늘 세 본문 내용은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그 자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지를 짚어 주시는 내용들이다. 대략 세 가지 차원에서 정리할 수 있겠는데-, 오늘의 말씀은 그 내용의 소개와 함께 우리의 잘못된 삶의 내용들도 지적해 주고 있고, 동시에 그러기에 우리 여생(餘生)의 기회를 어떻게 정신 차려서 살아야 할 것인지도 일깨워 주신다.
1. 전체적인 우리의 생각과 과제를 열어주는 내용은, 바울 서신서인 갈라디아서 말씀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과정에서 개척된 곳으로서, 이방인 중심(지금 터어키 수도인 앙카라 일대)의 그리스도인들인 모여 이룬 교회였다(행16:6). 그런데 어느 순간 그곳에 유대교도로 보이는 자들이 그릇된 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그들이 바울의 믿음의 설교를 듣고 성령을 받았던 기쁨까지도 다 빼앗기고 흔들리는 등의 신앙적인 위기에 빠져 있었음을 듣고,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내면서 그 잘못을 극복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바울은 그곳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환기(喚起)시키면서, 두 가지 차원의 서로 다른 성격의 삶을 요구한다. 하나는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1절)는 요구이다. 또 하나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요구한 것이다(13절). 여기에서는 잘못된 행동에 대한 경고와 함께 새로운 방향 제시가 동시에 함께 나온 것이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우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자유란 대체 무슨 말씀인가’부터 확인하자. 이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부여하신 자유로운 해방(解放)된 삶을 말한다. 그것은 용서와 자비와 긍휼이라는 성격의 복음(福音)을 통하여 주신, 은혜(恩惠)의 선물이었다(약2:13). 그동안 그들은 본의 아니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종(從)의 멍에’를 메고 살아왔다.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종의 멍에라고 규정한 이유가 있다(행15:10-11ㅡ갈2:4, 4:5 참조).
그것은 모세의 율법이 인간의 전 삶을 통제하고 방향을 규정하는 생활 법(法)으로서, 그것도 무려 613가지나 되는, 실로 지키기가 불가능한 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법이란 무엇인가? 하나만 범해도, 그는 범죄자요 죄인이 된다. 도둑질하지 않았어도, 이성을 보고 마음으로 간음하면 그는 죄인이 된다. 간음하지 않았어도, 남의 것을 욕심 내면 그것 또한 죄인이 된다. 진짜 그물망처럼 짜져 있고 얽혀 있는 것이 율법이었다. 그러니, 세상 어떤 사람이 그 법으로부터 완벽한 의인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율법은 그 자체가 분명 의롭고 거룩한 것이지만, 그러나 나약하고 지키기 어려운 인간으로서는 그 율법이 ‘종의 멍에’요, ‘죄인들만을 양산하는 법’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절대 차원이 다른 대책이 필요한 법일 뿐이었다. 정죄를 위한 법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위한 싸매고 덮는 법이 필요했다. 하나를 범해서 완전한 죄인이 되게 하는 법이 아니라, 하나를 지켜내어서 모든 죄에서 자유하고 해방될 구원의 법이 필요했다.
그런 법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 바로 예수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의 법이 바로 그 법이었다! 그를 믿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면 된다. 그래서 정죄의 법을 지키느라 수고하지 말고, 예수가 주신 은혜와 사랑의 법만 좇으면, 누구나 의롭게 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그 영적 질서만 좇으면 된다. 이런 놀라운 사랑의 법, 곧 모든 죄에서 자유하고 해방되는 법이 바로 그 예수가 주셨다(6:13-14, 요3:16 참조). 대사면의 법이었다. 갈라디아인들이 처음에 큰 기쁨과 소망 속에서, 예수께 돌아온 까닭도 바로 그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2) 그런 성도들이 지금 딜레마에 빠진 것은 바울이 전한 사랑의 은혜 복음을 외면하고, 율법의 일부인 할례(割禮)까지도 받아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거짓 교사들의 지적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사실 할례는 모든 율법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확실하다. 그것도 이방인인 그들이 유대인들이 받아온 몸의 할례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버거운 부담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도 큰 부담이었고, 시험 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혹 그런 이유로 누가 할례를 받았다면, 그때부터 그는 자동으로 의인이 되나?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그때부터 그는 나머지 612가지 율법들도 남김없이 지켜야만 한다(2-3절). 불가능한 현실만 마주할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결국 그를 위해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예수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만다(2절). 이웃에게는 위선적 율법주의자가 되면서, 자기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의(義)로운 체하려는 또 다른 바리새인으로 살게 된다. 당연히 예수와도 끊어지고, 은혜에서도 떨어진 존재가 된다(3-4절). 그 후유증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다.
3) 이에 바울은 대안을 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관심할 부분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다’(6절). 어떤 유형의 사랑인가? ‘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 이때 바울은 레19:18에 전(全) 율법의 핵심 내용인, 이웃 사랑 부분을 인용하면서 그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너희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4-15절).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까? 간단하다. 내 몸은 사지백체(四肢百體) 오장육부(五臟六腑)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토록 서로 다른 모습과 기능과 차이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등에 전혀 갈등하지 않고 모두가 한 몸이 되어서, 서로 돌보며 아끼며 차별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공존한다. 처음부터 생사를 끝까지 같이하며 사랑한다. 이게 내 몸의 특성이며, 서로 사랑하는 힘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바로 내 몸 안의 그런 사랑의 질서와 능력을 좇아서, 서로 사랑하고 살라고 명하신다.
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면서, 그 중심을 잡아주시려는 가장 큰 시도(試圖)는 바로 안식일 제정(制定)과 그 실천(實踐)에다 두셨다. 이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최초이자 가장 절대적 기초가 되는 절기(節氣)이기도 했다. 이제 말씀의 내용을 통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여 공포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자.
1) 여호와께서는 안식일을 ‘나의 안식일’(my Sabbaths)이라고 선포하셨다(13절). 이는 그날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이 얼마나 엄중함을 명백히 드러내신 것이다. 그날에 대한 성별, 애정, 복, 은혜, 관계 등등이 얼마나 절대적이요 압도적인지를 밝히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날을 사용(私用)하면 안되고, 오직 여호와의 날로 구별하여 거룩히 지켜야만 한다. 그날을 지키느냐 여부가 그가 여호와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할 척도이기도 했다(23,하).
2) 안식일을 어떻게 준수하여야 하는가? 거룩한 날이기에, 그날을 더럽히면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며, 특히 그날에 소득(所得)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그 생명도 끊어지리라 하셨다(14절). 노동은 엿새 동안에 하면 되고,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로서, 휴식을 위한 날‘(Sabbaths of rest)이기에 쉬어야 했다(15절). 이때의 휴식은 창조주 여호와의 쉼을 본받는 일로서, 우리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노동과 휴식을 균형 있게 맞추어 사는 것이 복 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안식일은 육체를 위한 탐욕을 멈추고, 하루의 휴식을 즐기면서, 창조주와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살게 하셨다. 이는 본질상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휴식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그가 부리는 노예들, 가축들과 모든 생명체들의 쉼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주일성수는 인간은 물론 생태(生態)계 돌봄도 연계된다.
3) 또 안식일 준수는 후손들과 함께하는 것이 강조된다(16-17절).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은 자기 대(代)에만 유효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자자손손으로 계승(繼承)되어야 하는 사안임이 된 것이다. 특히 자기와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신앙 삼대가 더불어 주일성수하는 가계 이루기가 다른 그 어떤 계명 준수보다 우선적이고 본질적임을 훈련받았다. 그 바람에 그 가계는 여호와 중심의 가계가 되고, 여호와의 돌봄과 사랑을 항상 받게 되면서, 온갖 여호와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는 족속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 가계 중심의 주일성수 신앙의 공고함 때문에, 이스라엘은 기원후 70년부터 나라 잃은 민족이 된 이래 세계 2차대전 직후까지, 무려 근 2천년 동안 떠돌이 백성으로 온 세계에 흩어져 지냈으나, 그러나 때가 되면서 그들은 금방 결집하여 세계를 움직이는 놀라운 백성이 재생할 수 있었다. 우리도 그렇다. 가계 전체가 주일성수 신앙으로 굳게 서 있는 가정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 숱한 어떠한 환란과 역경에도, 그 가계는 그럴수록 일어나 빛을 발하게 된다.
3. 이곳 복음서에서는 안식일이 잃어버린 양과 같은 버려진 인간을 치유하고 되살리는 날이어야 함도 강조한다. 이는 앞서 구약의 율법서에서 여호와의 날을 성수할 것을 강조한 부분에 대한, 또 다른 측면에서의 예수의 안식일 성수론(聖守論)이다. 곧 안식일은 분명히 여호와의 날로 거룩히 성수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날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날이기도 해야 한다는 점을 함께 일깨우신 것이다. 이런 논법은 마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이중(二重) 계명으로, 우리의 구원의 조건을 완벽히 설명하신 바와 흡사하다.
1) 바리새인의 특징은 문자주의적이라는 데 있다. 그 문자 속에 들어있는 의미와 정신에는 별로 관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안식일 이해는 매우 편협하다. 곧 ’안식일에는 어떤 경우에도 일하면 안 되었다. 일하면 그는 죄인이고 죽임을 당하여야 마땅했다‘ 본문은 그런 엄격한 안식일관(觀)을 가지고, 차제에 어느 날이든 구별없이 병자를 치료하고 있던 나사렛 예수를 고발할 목적으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와 있었던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지목하며 예수께 물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10절).
2) 예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보셨는가? 당시 종교인이면서 지도자들인 그들의 한없이 메마른 영혼에 가슴 아프셨다. 그들에게는 민중과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영혼이 없었다. 특히 병자들에게는 정죄하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당시의 그들은 인과응보 사상이 철저해서, 모든 장애와 질병을 대체로 죗값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병자들의 인격과 인권에는 전혀 무자비한 태도를 보여 준 것이다(눅10장 참조). 한마디로 이웃 사랑이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이렇듯 당시의 유대교는 자비의 기능이 말살되었고, 정죄의 기능만이 기승하였다. 요즈음의 한국기독교 극우세력의 흐름과 너무도 흡사했다. 한쪽만 보고, 달려가는 돌격대였다.
3) 결국 예수께서는 어떻게 행동하셨나? 그들에게 사라져 버린 이웃 사랑의 법을 끄집어내어 그렇게 선보이셨다. 예수께서 보여 주신 이웃 사랑의 법은 어떤 법인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율법의 핵심 논리였다(레19:18, 갈5:14참조). ’너의 양 한마디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의 물음으로 접근하셨다. 그래서 그들로 ’당연히 끌어낼 것이다‘라는 무언의 양심적 답변을 끌어내셨다.
4) 그 답변을 발판으로 예수님은 ’양보다 훨씬 귀한 인간에게 치료를 선사하는 것이 분명 선인고 사랑인데, 어찌 안식일에 위법한다고 하겠느냐‘라고 되물으시면서, 그의 손을 즉시 치료해 주셨다. 원상회복을 시켜 주셨다. 곧 안식일을 거룩히 성수하는 일에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영광 돌리는 일이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고난 중에 있는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선행(善行)도 당연히 주일성수에 포함되어야 마땅함도 우리 모두에게까지 알려주신 것이다.
o 우리는 예수와 그의 선포하신 사랑의 복음을 믿고 산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악과 모순됨을 씻어내고 구원을 받고 있다. 다만 이제 다시 명심할 것은 그 말씀과 믿음의 도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어야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웃 사랑을 외면하면서 자신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한다고 하며, 당신에게만 열렬히 매달리는 자들을 외면하신다. 이 이중 사랑의 균형이 깨진 신앙인은 극우 신앙인이 된다. 다시 출발하자. 사랑 없는 신앙은 위험이고 독이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그 예수 복음으로, 나와 너 모두를 살라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