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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평화 통일주일

관리자 2025-08-05 (화) 23:22 12일전 59  

본문) 롬 12:9~21, 레19:9-18, 눅6:32-38 


오늘은 강림 후 아홉째 주일이다. 예기하지 못한 폭우로 전국이 또다시 물난리에 시달리기도 한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그 덕분에(?) 폭염으로 시달리는 백성들이 한숨 돌리는 듯하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이렇듯 다 좋고, 전혀 완벽한 곳은 진정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다시 든다. 자식이 많은 부모에게는 그래서 마음 편히 웃고 기뻐만 하고 살기가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날씨가 좋으면 그때 기뻐할 자식이 있지만, 날씨가 나쁘면 그때 좋아할 자식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에서든 항상 기쁘고 감사한 곳과 시절은 언제일까?


오늘은 우리나라 광복 제80년이 된 주일이자, 동시에 조국 분단 제80년이 된 때이기도 하다. 웃음과 함께 슬픔이 몰려들어 온 때이다. 제국 일본으로부터의 해방(解放)은 우리에게 한없이 기쁜 때이지만, 공산주의의 기승으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分斷)이 시작된 것은 한없이 슬픈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분단이 준 아픔과 고통이 너무 커서, 우리는 여태껏 해방이 준 감격과 기쁨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아픔이다.


이 분단의 시작으로, 우리 한반도의 남쪽인 대한민국은 지난 80년간 내외환 위기와 분열과 갈등과 대결로 점철해 왔다. 가장 남쪽인 제주도 4.3사건을 통한 약3-5만 명의 대학살 사건을 필두로 시작된 이념 논쟁은 그 후로, 50년에 발화된 3년간의 민족 대전쟁을 거쳐서, 나라의 허리를 동강 나게 했고, 그것도 모자라 반도 전역을 이념을 고리로 대숙청과 학살과 배제(排除)와 척결의 싸움장으로 만신창이가 되게 하였다. 지금도 우린 이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현재도 정치판에서는 툭하면, 이념공세와 편파적 파상공세로 ‘친북, 종북, 좌파, 빨갱이, 공산주의--’ 등등의 공세를 펼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대적자들을 코너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런 모습은 특히 보수주의 영역에서 아예 자신들의 보호막이나 낡아빠진 전가의 보도(寶刀)로 휘두르고 있다. 그 바람에 건강한 정치 토론이나 진보적 견해들이 빛을 보지 못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아예 골통 수구세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래저래, 분단의 폐해로 인한 늪은 우리를 계속 옛것과 옛사람으로 머물게 한다. 아, 이 얼마나 한스럽고 슬픈 일인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가장 최악질의 현장이 있다. 바로 한국의 그리스도 교회가 이런 악질의 분단 싸움의 최전선에 휘말려 있다는 점이다. 구원 복음의 깃발을 휘날려야 할 곳인 교회가, 화해와 평화를 위해 앞장서야 할 교회가, 모퉁이 머릿돌 예수의 영성으로 서로 다른 차이를 하나로 묶어내야 할 교회가, 정죄보다는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가, 그 언젠가부터 이 세속 이념전(理念戰)의 앞잡이가 되어, 세상 정치인들보다도 더 추악한 모습으로, 국민과 교인들을 패거리 싸움에 휘말리게 하며, 서로를 갈등하게 한 집단이 된 것이다. 


최근 윤석열 내란의 실상도 이 모든 왜곡된 이념 논쟁의 결정판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이들 내란 세력은 철저히 북한을 자기가 벌린 전쟁판에 끌어들이고 이용하여, 그것을 빌미로 계엄을 합법화시키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숙청 내지 처형하며, 자기들의 장기 집권을 도모하려 한 것이 이미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그들의 기독교계 친위 세력으로 전광훈이나 신현보 같은 극우세력의 목회자들을 앞잡이로 활용했고, 그 배후 후원 세력으로는 김장환이나 이영훈이나 김삼환 같은 그럴듯한 기독교 보수 원로들을 앞세워 자신들의 패륜적(悖倫的) 활동을 묵묵히 지지하게 만들어 왔다. 그 바람에 한국교회는 길잃은 양들이 범람하는 현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 기독교 지도자들이 범한 치명적인 과오(過誤)들이 있다. 이들이 그런 패륜적 패권주의자들인 내란 세력의 들러리로 활동하는 바람에, 그들은 권력자들의 또 다른 이단 후원 종교 세력들인 신천지나 통일교와 하나님의 교회나 기타 범기독교 이단 세력들의 발흥을 조장하게 하였고, 우리 정통 기독교를 한국에서 모든 사이비 기독교 세력들 중의 하나 정도로 격하(?)시킨 일에 크게 일조하였다. 그 바람에 국민들은 과연 기존의 우리 한국 개신교회가 자기들을 제대로 구원할 참 신앙 집단인지를 회의(懷疑)하게 만들고 말았다. 참 경악할 일이다.


지금의 한국교회 상황은 마치 사순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시면서, 그 성전이 제 기능을 저버린 행태를 보시며, ‘이 성전을 헐라’라며 질책하신 바로 그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교회와 성전이 제 기능을 잃게 될 때, 성직자와 성도가 제 임무와 사명을 상실하고 살 때, 교회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 모를 때,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이며, 그 세상과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바로 그때와도 너무 흡사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 오늘 주신 세 본문 말씀은 이런 혼란기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 공동체(共同體)에게 매우 주의해야 할 메시지를 주신다. 이 말씀들은 대체로 이웃 사랑의 영역에 관련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그 이웃 사랑의 근원은 그들을 배후에서 관리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에 서 나온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내용의 합(合)이기도 하다. 이 이웃은 좁게는 같은 교회 공동체이지만, 넓게는 동족이요 백성들을 포함한다. 그러면서 그 사랑은 보편타당성과 상식의 차원을 넘어, 예수께서 강력히 새롭게 지시한 <원수 사랑>의 차원까지 포함하는 이웃 사랑이기를 요구한 내용이다. 


‘원수 사랑’은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지시하신 새로운 범주이다. 이 사랑은 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보상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날 미워하고 거침돌이 되는 사람을 향한 역습(逆襲)적인 것이다. 이 사랑은 분명 낯설기 그지없는 새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본받아 나온 순종 차원의 것이어서, 제대로 실천만 하면 새 역사를 맞보게 될 사랑이다. 


한국교회가 발목이 잡혀 있는 돌도 바로 이 원수 사랑이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이웃을 배척하고 배제하려고만 한다.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원수 사랑으로 담을 넘어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바람에 교인들의 사랑에는 감동이 없고, 상식에서도 낙제점을 면치 못한다. 그러기에 부디 이 말씀을 잘 배워, 이제 우리 교회 공동체도 원수 사랑까지 실천하고, 이념과 배제의 높은 담을 넘어, 나와 서로 다른 모두를 하나로 묶어낼 이웃 사랑을 해보자. 


1. 서신서 / 롬12:9-21 /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네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바울의 글에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을 향한 이웃 사랑의 삶을 독려하는 말씀이 가득하다. 그가 증언하며 강조하는 이웃 사랑의 성격에는 매우 강한 특성이 있다. 그 사랑은 ‘거짓이 없으며 악(惡)을 미워하고 선(善)에 속한 것’이다(9절). 그러면서 그는 성도의 이웃 사랑은 피동적(被動的)으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주도적(主導的)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사랑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여기에는 상대로부터의 대가를 바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를 기뻐해서 나오는 진정성을 담은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은 악과 악인(惡人)을 구별한다. 악은 절대 환영할 수 없는 미움의 대상이다(9절). 하지만 악은 보복으로 상대할 대상이 아니다(17절). 이는 악은 또 다른 악을 불러들여 오는 특성이 있기에, 보복으로는 그 악을 해결할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악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바울은 악을 이길 대안으로 선(善)을 말한다. 곧 악은 보복 대상이 아닌 극복(克服-overcome)할 대상인데, 그 결정적 수단은 바로 선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21절).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실체를 보았고, 바울은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던 자기를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에게서 그 실체적 체험을 하였으며(행9장), 한국교회는 자기 아들들 둘을 처형한 공산주의자를 나중에 자기 양아들로 삼아버린 손양원 목사의 원수 사랑의 모습에서 그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델을 생생히 목격하기도 했다. 


대체로 악과 선은 멀리 있지 않다. 양면(兩面)의 얼굴을 갖고 있다. 특히 인간들 사이에서의 악은 선을 지켜내지 못하여 빼앗기고 상처받게 될 때, 순간적으로 어둠과 미움과 보복의 얼굴과 가슴을 가지고, 한순간에 나의 원수(怨讐)가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모습은 가족이나 부부간에도 있고, 교인들 간에도 있으며, 직장인과 이웃들 간에도 얼마든지 확인한다. 그 바람에 대부분의 원수는 그야말로 변질된 가까운 이웃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까운 이웃들부터 제대로 사랑하고 사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내게 나타날 원수를 막을 수 있는 선제적 수단이며 지혜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이웃 사랑은 선제적(先制的)이고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모습을 취해야 한다. 


1) 선제적 이웃 사랑은 어떻게 하는가? 상대에 대한 우애(友愛)와 존경(尊敬)하기를 내가 먼저 하면 된다(10절). 이 일에는 주님을 섬기듯 부지런해야 하고, 열심을 품어야 한다. 성도들의 쓸 것을 살펴서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13장). 진지한 헌신과 수고가 필요하다. 


2) 원수나 박해자에 대한 사랑의 대응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14-20절). 먼저는 저주 대신에 축복해야 한다(14절). 정죄 대신에 내 부분에서 회개할 부분이 없는지부터 먼저 살피라(15-16절). 어떤 경우에도 그의 악에 보복하려는 마음 대신에, 선하게 대하고 그와 화목하고자 힘써야 한다(17-18절). 이는 원수 갚는 것(권한)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19절). 그러면서 그의 형편을 깊이 살펴서, 그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면 된다(20절). 


2. 구약 / 레19:9-18 / ”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광야의 백성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면서, 그들의 생활 문화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곳은 기름진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면서, 그 땅의 소산인 곡물과 양식으로 생존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문화도 정착하였다. 이와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영적 멍에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도 사랑하며 살라는 명령이다(17-18절). 오직 여호와에 의한 계명 하달(下達)이었다(10,12,14,16,18절). 


분문은 그 이웃 사랑의 구체적 실천 사항을 담고 있다. 먼저 강력히 요구하신 사항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들이다(9-10절). 그래서 우상인 다산의 신들을 위한 제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으로 사용하게 돌리셨다. 도둑질, 속임, 거짓 증언, 거짓 맹세, 약자 억압, 착취, 품삯 희롱 등등으로 강자나 부자가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괴롭힘을 절대 금하셨다(11-13절). 장애인을 위한 배려도 강조하셨다(14절). 


불의한 재판이 아닌 정의롭고 공의로운 판결도 명하셨다(15절).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도 금하셨고, 불의한 이익위해 이웃을 희생시키는 일도 금하셨다(16절). 형제 미워하는 마음도 금하셨고, 그 이웃 때문에 죄를 떠맡는 것도 금하셨다(17절).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 것도 지시하셨으며(롬12:19), 동포에 대한 원망도 금하셨다(18절). 그러면서 이웃 사랑의 기준을 이렇게 제시하셨다-‘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8절,마22:39 참조). 본능적인 자기 사랑 정도를 이웃 사랑의 기준으로 주셨다. 다만 이 기준은 예수의 새 계명을 받기까지였다(요13:34 참조). 


3. 복음서 / 눅6:32-38 / ”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 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도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


예수님 마음의 진수를 읽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로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35-36절). 


예수님의 시선은 의인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인과 악인에게까지도 향하신다. 그 점이 우리와는 아주 다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의인을 향하심은 믿는 자가 당신의 자녀다운 모습을 진정 보여 주고 사는가를 지켜보시려는 것이고, 악인을 향하심은 과연 그가 누구에 의해서 최후의 순간에라도 악의 늪에서 구출되어 살아나올까에 관심을 두고 계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우리의 이웃 사랑은 마땅히 전혀 다른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우선은 우리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는 상식선 정도를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 그 정도라면 구태여 그리스도인의 것이랄 수 없기 때문이다. 죄인도 그 정도 수준은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느 정도여야 하나? 적어도, 원수나 비판자나 공격자 정도에게 보여 줄 것이 있어야 한다(35-37절). 곧 원수를 선대(善待) 하는 모습이다. 그것도 대가를 전혀 기대하지 않고 내어줄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임을 확인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웃 사랑은 격조(格調)가 있어야 한다.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는 모습과 쉽게 사랑을 정죄하려 들지 않는 품격과 가능하면 상대의 과오와 실수를 용서하려는 너그러운 자세가 필요하다(37절). 그리고 받으려 하기보다는 주려고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이런 모습을 견지하면서 살게 되면, 의롭고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런 그에게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인생으로 올려 주신다(38절). 


o 이번 주일은 조국 분단 80년을 맞이하는 때이다. 우리가 통일부터 앞세워 모든 일을 밀어붙일 처지는 못 되지만, 그러나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접근하면 길은 열리게 된다고 믿는다. 이에 앞서 우리는 남북의 동족과 동포가 원수가 된 현실을 깊이 아파하고, 개탄하면서 그 극복 방안으로 평화운동부터 한 걸음씩 전개해야겠다. 다행히 새 정부의 남북화해정책이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는 일이 매우 긍정적이다. 우리 교회는 이웃 사랑 정신과 행동으로, 그런 움직임을 앞장서 실천해 가면 좋겠다. 하나님의 일은 방향만 좋으면, 금방이라도 기적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원수 지우기는 선의 힘, 사랑의 힘밖에 없다. 기도하며 그 힘을 모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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