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강림후(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강림후(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5-07-29 (화) 23:01 19일전 63  

본문) 벧전 2:11~17, 잠8:1-21, 마6:19-24


오늘은 강림 후 여덟째 주일이다. 날씨도 8월에 접어들면서 더위의 절정에 들어섰다. 우리는 밤낮 없이 흐르는 땀의 계절인 이 폭서(暴暑)의 시기를, 보다 정신 차려서,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온갖 정욕들을 제어하며 살아야 하겠다. 이는 우리 행실을 그 어느 때보다 선(善)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계19:8, 벧전2:12-15 참조). 그런데 이런 삶의 내용을 향한 권고의 말씀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이번 주일에도 연이어지고 있음이 특징이다. 삶과 인격에서, 우리 믿는 자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가 바로 ‘선한 자’여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서신서의 집필자인 사도 베드로의 권면에는 매우 주목될만한 부분이 있다.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거류민(居留民-aliens)’과 나그네(strangers)‘와 같은 존재로 본 것이다. 이는 그의 국적(國籍)이나 혈족(血族)과는 상관없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진 새로운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깨움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예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이 세상 안에서 어떤 차이와 차별을 안겨 준 사건인지를 알게 한 지적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어느 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면, 그때부터 나를 보는 시선이 이전과 달라진 것을 쉽게 느낀다. 그가 친구들이어도 그렇고, 이웃들이라도 그러하며, 심지어 혈육 가족이라도 그렇다. 그 시선 속에는 단순한 질시와 배척의 시선만은 아니다. 일종의 기대(期待) 같은 것(?)들이 진하게 담겨 있다. 사유가 어쨌든 자기들이 선택하지 못한 그 기독교인이란 영역에 ’너‘가 들어간 일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이 그 안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못한 것을 너는 해주어야 한다‘는 기대감도 있다. 그게 잘 되면, 그때는 힘을 발한다. ’신자라 역시 다르구나‘라는 인정과 함께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전도도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도 된다. 하지만 실망을 주면, 그때는 분노하거나 ’너도 별수 없는 존재구나‘라면서 얕잡아 보게 된다. 심하면 분노까지 드러낸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사회와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는, 진한 실망감과 같은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도(聖徒)의 자리에 들어선 자 자신이다. 세상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 어떤 존재 의식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자의식이 필요하다. 단순한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식이 아닌, 보다 본질적인 새 존재로서의 변화된 자의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사도 베드로가 지적인 점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곧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은 자‘라는 의식이다(11절). 


이런 의식은 그동안 자기의 본향(本鄕)을 세상과 땅에다 두고 살았던 모습을 넘어선 차원의 것이다. 세상 인간이나 소유에 의지하고 살아온 자신이, 더 이상 자기 모습이 아님을 인식할 때 가질 수 있는 의식이다. 대체 거류민이란 누구인가? ’남의 나라 영토에 머물러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 세상의 삶을 주인이 아닌, 잠깐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로 사는 자이다. 따라서 주인과 거류민의 차이는 엄청나다. 물론 주인과 나그네의 삶의 양식도 아주 다르다. 

내 삶의 진정한 변화는 여기서 나온다. 곧 내가 이 세상과 터전을 상대하고 바라보는 마음이 마치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을 때에 나온다. 생각해 보라. 내가 거류민이란 생각으로 이 세상과 ’지금 여기서‘를 살려고 하면, 내가 발 딛고 머물고 사는 이곳을 과연 어떻게 상대하여야 할까? 한마디로, 매사가 조심스럽고 진중해야 할 것이다. 이곳의 법과 원칙과 풍습을 존중하고, 원주민과의 마찰이 아닌 평화와 화목을 도모하면서 사는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다. 그게 말썽이 되면, 그는 어느 순간에 그 땅과 공동체로부터 퇴출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세 본문 전체의 내용은 이런 영적 나그네와 거류민 의식을 품고 사는 자들이 세상을 향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벧전), 자기 마음을 무엇으로 무장하고 살아야 하는지(잠언),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물과 소유를 어떻게 다루고 관리하며 지내야 하는지(복음서)를 차근히 일깨워 준다. 곧 이 세상을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자의 윤리와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여러 차원에서 일깨워 준다. 이런 안내를 잘 받아 살면, 그는 분명 환영받는 자가 될 것이고, 그곳의 기여자도 될 것이다. 하지만 거슬려 살면 그는 퇴출을 당하고, 큰 미움과 배척을 당하리라. 


1. 서신서 / 벧전 2:11-17 / “ 너희는 자유(自由)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


지금 우리나라에도 외국인 노동자들 중심으로 각 나라에서 들어온 외부 거류민들이 많다. 그들은 체류 기간 언제나, 우리들의 나그네로 지낸다. 그러기에 그들이 우리 안에서 어떤 내용의 삶을 살 것인지를 연상하면, 쉽게 답을 찾을 수도 있다. 


우선은 자기 관리를 잘하고 살아야 한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지적이 바로 그 점을 거론한 것이다(11-12절). 자기 마음과 육신을 함부로 드러내고 살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 기본이 무너지면, 그는 이 땅에서 쉽게 축출(逐出)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류민으로서의 삶의 충분조건은 무엇일까,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한다(12절). 그래서 원주민들의 원성을 살만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차라리 원주민의 마음속에 이들과 함께 사는 삶이 자기들에게도 크게 유익하다는 판단을 하게 하면 좋다. 그런 품격 있는 태도는 그를 그곳에 살게 파송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2) 주거하는 나라와 지역의 모든 제도(制度)나 법(法)에 순종하여야 한다(13절). 그래서 그곳의 모든 사회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그곳의 왕(王)이나 총독(總督)인 지도자들에게도 선행을 보이는 것이 좋다. 그들은 원래 악행자를 징벌하고 선행자들 포상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13-14절, 롬13장 참조). 종종 포악 자들이 나라의 위정자인 경우도 있다. 이때는 중심을 잘 잡고, 주의 영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면 된다.


3) 주어진 개인적 자유는 오직 하나님의 종다운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한다(16절). 다음의 4가지 영역을 두고 사도 베드로는 좋은 방향을 제시하였다(17절). 


첫째는 ’뭇 사람을 공경하는 자세‘이다. 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소중한 생명들임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사는 태도를 말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모든 인간의 가치를 그렇게 신앙적으로 인정하며 사는 따뜻한 마음이다. 


둘째는 형제를 사랑하는(brotherhood of believers) 삶이다. 이는 함께 믿는 자들과의 동류애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연대감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세이다. 교회에 이런 정신은 매우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아주 강하게 유대감을 발휘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런 유대감과 연대 의식에도 투철해야 한다.


셋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모든 그리스도인 행동의 근간이다. 이 부분에서 허약해지면, 그때는 인간 본능만 되살아나고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하며 자기의 욕망과 뜻을 관철하려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 바람에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지켜보시고 심판하신다는 마음으로 이 세상의 주어진 모든 임무들을 수행해야 하겠다. 


넷째는 왕을 존대(尊待)하는 일이다. 이는 왕과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이다. 왕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기에, 그 권위를 존중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지극히 마땅한 행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 선교사들이 고종 황제와의 좋은 관계를 구축하면서, 이 나라와 백성들이 의료혜택에 커다란 도움이 된 것도 그 까닭이었다. 이 관계가 뒤틀리면, 그곳의 선교나 사랑은 결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2. 구약 / 잠언 8:1-21 / “ 내게는 계략(計略)과 참 지식(智識)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 


성경 최대의 지혜서인 잠언을 통하여 본, 거류민과 나그네의 필요한 삶의 요소는 무엇인가? 지혜와 명철이다! 외국인이 타국에서 살아남고, 여력을 가진 존재로 빛을 발하려면, 그는 우선 지혜롭고 명철해야 한다. 어리석고 탐욕적이며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면, 그는 절대 그곳에서 생존할 수 없다. 특히 명철의 부분이 주목된다. 그것은 이해력과 분별력을 담고 있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명철은 조심성, 신중함, 침착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능이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생존할 수 있는 핵심적 기능이 아니겠는가!


특히 잠언의 대표자랄 수 있는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역사 속에 그 존재감을 드러낸 부분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받은 신령한 지혜였다(왕상3:4-14 참조). 그는 어린 왕인 자기에게 주의 백성들로부터 오는 모든 청원에서 ’듣는 마음‘을 달라고 구했으며, 특히 재판에서의 선악을 분별할 지혜를 달라고 구함으로써, 여호와로부터 전무후무한 축복을 받게 된 왕이 된 것이다. 그는 지혜가 주는 무궁무진한 은혜와 선물이 무엇인지를 절실히 깨닫고 증언한 인물이었다. 


1) 본문에서 말하는 ’나‘는 곧 지혜 자체를 말한다. 그것도 창조주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을 담은 지혜이다. 그러기에 이 지혜는 가장 선한 것을 담고 있고 정직을 담고 있다(6절). 진리와 의를 담아내고 있으며, 그러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다(8절). 당연히 온갖 악을 미워하기도 한다(7절,13절). 또한 교만, 거만, 악행, 패역한 입을 미워한다(13절).  


2) 따라서 주를 사랑하는 거류민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받고자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한다. 저 솔로몬이 보여 준 선례처럼, 은(銀)보다는 훈계를, 정금(精金)보다는 지식을 더 우선해서 얻고자 해야 한다(10-11절).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에는 계략(計略)이 있고, 참지식이 있으며, 명철인 분별력이란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14절). 심지어 그 안에는 부귀(富貴)까지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번영)까지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18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인가! 그러기에 지혜는 가장 우선해 받아야 할 선물이다. 


3) 주목할 대목은 세상의 왕들이나 방백들(지도자)이 이 하나님의 지혜를 치리의 도구로 삼고, 자신의 공의를 실현할 대상으로 삼으며, 재상이나 재판관들은 자신의 의로운 재판을 집행할 무기로 활용한다는 점이다(14-16절). 이는 지난 주일의 미가 예언의 말씀에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곧 하나님에게서 나온 도(道-율법과 복음이란 진리)가 온 세상에 흘러나와, 모든 이들을 먹이고 마시게 하며, 새 삶을 살게 할 것을 예고한 말씀이기에 그렇다(미4:2-3 참조). 


4) 따라서 세상의 거류민인 우리는, 지혜 없는 금이나 정금을 우선하는 삶은 거부해야 한다. 이는 지혜가 금은 소득보다 귀하고 우선하는 것이며, 나의 삶을 정의롭고 공의롭게 인도할 것이어서, 열심히 구하여 반드시 받아서 누리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19-20, 17절).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주님의 지시처럼(마6:33), 지혜 중심의 인생살이가 되도록 힘쓰자. 


3. 복음서 / 마6:19-24 / “ 한 사람이 두 주인(主人)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重)히 여기고 저를 경(輕)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삶을 편안하고 쉽게 사는 사람이 있고,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다. 그 갈림길은 무엇일까? 자신이 섬길 주인을 하나로 분명히 하고 사는 사람은 쉽고 편안한 인생을 살게 되지만, 두 주인을 섬기고 사는 사람은 힘들고 어렵고 복잡하게 산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재물을 두고, 하나님께 재물을 그 밑에 복종시켜서 사는 사람은 쉽고 편하게 산다. 하지만 하나님과 세상 모두를 함께 섬기며 사는 사람은 인생을 무척 힘들게 산다. 그 주인들 둘이 종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단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만다. 


주님은 엄히 당신의 종들에게 경고하신다. 그들이 다루는 보물(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명하신다(19-20절). 그 이유는 땅에는 그것을 도둑질하려는 도둑이나 좀들의 공격이 있지만, 하늘에는 아예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보물을 둔 곳에 있기에, 보물을 아예 땅이 아닌 하늘에 쌓아 두고 살면서, 마음까지도 하늘 본향을 추구하며 편하게 살라고 권하신 것이다(21절). 


따라서 건강한 시각이 중요하다. 몸과 재물, 성공적 삶과 행복한 삶 모두를 건져낼 수 있는 영적 시야가 요긴(要緊)하다. 그것은 주인의 뜻과 명령을 최우선하여 살아야 한다는 영혼의 시야를 보유한 인생일 때 가능하다. 불행한 시각은 어떤가? 하나님보다 세상과 재물을 우선 구하는 마음이다. 그런 후, 여유가 되면 하나님께도 바치면 된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전자는 모든 것을 다 얻게 되지만, 후자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만다.


당신의 지금은 어떤가? 거류민이요 나그네임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재물(세상)을 다 섬기려고 애쓰고 사는 것은 아닌가? 주님은 그런 자에게 단호하고 준엄하게 경고하신다(24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 영과 육은 함께 같이 갈 수가 없다. 위와 아래를 뒤섞지 말라! 


o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한시도 잊지 말자. 우리가 세상에 올 때, 가져온 것이 하나도 없듯이, 세상을 떠날 때 역시 가져갈 것도 없다. 하지만 가져가진 못하나, 그곳 하늘에다 우리의 것을 쌓아 둘 확실한 방법은 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땅의 육체의 것들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것들로 좇아서 누리며 살다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법을 세상의 육정의 법이 아닌, 하늘의 신령한 법을 좇아 살다 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예상치 못한 그곳에 있는 우리에게 주어질 상급들에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런 영광의 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