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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26-07-29 (수) 09:41 15시간전 16  

본문) 롬 3:21~31, 출12:51-13:10. 눅18:9-14


오늘은 강림 후 열 번째 주일이다. 때는 무더위의 절정인 8월로 접어들었다. 주변 나라들로부터는 그 어느 해보다도 폭염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리고 태풍 피해도 엄청나고, 지진 피해도 아주 위협적이다. 그런가 하면, 벌써 끝날 것 같은 미국과 이란 전쟁은 또다시 불씨가 되살아나서, 거칠어졌다. 참다운 안전과 평화가 몹시 그리워지는 때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화재와 안전사고들이 이어지고 있어서 안타깝다. 


이런 때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와 그분으로부터 피조 세계의 관리를 위탁받은 인간들의 잘못된 행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창조주께서 정해 주신 질서와 규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안일과 편의만을 추구하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매를 맞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망가진 모습들을 선지자 이사야는 지난 주일의 말씀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폐하였고 --(사1:5-7).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인간들에게 ‘회개하고 조물주인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계속 외친다. 그러면서 그 돌아오는 방법도 전한다. 곧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롬1:17)는 말씀으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 위에 건축하여 살아가라고 외치고 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바로 창조주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와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실천하여 사는 일이다. 


오늘의 세 본문은 지난 주일의 증거들에다 좀 더 심화(深化)된 내용을 더한다. 곧 우리의 믿음의 주제인 복음(福音)이 그 믿는 자들에게 안겨 주는 하나님의 의(義-righteousness)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밝혀주신다. 그 기본적 틀 정리를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해준다(롬3:21-26 참조).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는 두 가지 차원에서 나타난다. 


그 첫 번째는 모세가 전해준 율법에서 드러났다. 그 큰 틀은 십계명을 통하여 압축되어 나타났다. 곧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맛보게 되며 구원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일 때여야 한다. 그런데 대체로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 사랑보다는 인간 사랑을 함께 실천하는 부분에서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은 잘 믿는다면서도 이웃을 향해서는 하나님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바람에, 자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다. 이는 율법에 의한 실패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代案的) 하나님의 의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속적(代贖的) 희생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바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갖게 되는 의이다. 이 믿음을 접하게 될 때, 그는 자신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23-24절). 


그러기에 이 예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믿음을 품게 되면, 그는 누구나 변하게 되고 새 사람이 된다. 먼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자기 자랑을 포기하게 되면서, 상대하는 이웃들에게도 자기가 받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하게 된다. 곧 믿음 안에서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차원의 사랑을 동시에 실천하며 살게 된다. 


오늘 세 본문들은 그런 미세한 차이를 지적해 주면서, 우리가 믿음에 의한 의를 선택하도록 돕는다. 구약 본문 출애굽기는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접하게 해준다. 반면에 복음서는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지도 소개해 준다. 사도 바울은 이 둘을 함께 소개하면서, 결국은 오직 십자가에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당신도 의로우시며 또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도 의롭다고 하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취하도록 우리를 안내한다(25-26절).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이 안겨 주는 의’를 결코 외면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곳에는 자기 자랑을 유발하는 위험성이 내재함으로 인하여, 그 율법에 의한 의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한다(27-29, 31절). 그 점은 본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 자신이 너무도 잘 아는 대목이었다. 보라! 누구보다도 하나님 섬기기에 열심인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며 그토록 냉혹한 책망을 받았던가?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내재한 율법을 붙들고 살면서도, 자기 자랑이라는 함정, 자기와 같지 못한 자들을 향한 정죄와 배척의 함정에 빠져서 살았다! 그 바람에 그들은 이웃 사랑이라는 구원의 절대조건에 완벽한 결격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자기희생의 의를 접하고 믿게 되면, 그는 바리새인의 늪에는 더 이상 빠져서 살 수 없게 된다. 곧 그 예수 앞에서 그 누구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다는 점과 그런 구원이 어느 누구에게나 세상 모든 죄인에게 까지도, 어떤 차별이나 제한도 없이 열려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온전히 담긴 것임을 체득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 하나님의 의의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본다. 


1. 구약 / 출12:51-13:10 / ”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胎)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된 가장 큰 행동 지침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일이다. 곧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인정하고 그의 의와 영광을 먼저 구하는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 이 점은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도 맺은 언약의 내용이기도 해서 더욱 그렇다. 본문은 바로 그런 점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직접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내용들이다. 


두 가지가 제시되었다. 첫째는 첫 열매 신앙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첫 태생은 모두 다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리라는 명령이다(1-2절). 둘째는 출(出)애굽한 해방일을 기념하여 그 날을 유월절로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는 일이었다(3-10절). 이 두 가지 특별 명령은 백성들의 하나님 사랑을 제일로 삼는 영적 훈련이라는 점에서 모든 율법의 의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1) 먼저 모든 산 것의 수컷 첫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는 일이 첫 열매 신앙으로 규정되었다. 이는 본디 ‘하나님의 숨’으로 사는 생물이라면서, 그 무엇이든 하나님의 것임을 시인하는 일이었다(창2:7, 시104:29-30 참조). 동시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돌려드림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을 생명의 주로 인정하게 하였다. 가인와 아벨 이야기에서도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도 아벨이 첫 새끼를 성별한 신앙 때문이었다(창4:4 참조).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성별된 지파인 레위인도 넓은 의미에서 대속 제물로 간주 된 것이다(민3:11-13 참조).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종(從)되었던 애굽에서 해방된 그날, 곧 출애굽한 그날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시고자 해마다 지켜야만 하는 절기(節氣)로서 유월절을 제정해 주셨다(3-10절). 그날은 아빕월인 니산월인 3-4월의 첫날인 14일로써, 전 백성이 평소 먹는 누룩 있는 빵인 유교병이 아닌 누룩 없는 빵인 무교병만을 먹어야 했다. 그것도 이레 동안이나 그렇게 무교병과 함께 절기를 지켜야 했다. 


다만 여기서 주목되는 대목은, 이 유월절 예전의 시작이 그들이 출애굽하여 40년간 광야 생활을 했던 곳도 아니고 때도 아니라, 40년 광야 생활을 완전히 끝낸 후인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완전히 들어간 후였다는 점이다(5절), 이는 그 가나안에로 이주하여 제대로 된 예식을 집행할 수 있게 된 날을, 사실상의 출애굽 대역사의 최종 완성된 날로 간주하셨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그때가 그곳 가나안 땅으로서는 수확의 절기도 되기에, 여호와께서는 그 땅의 순수한 소산물로 이레 동안의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으면서 가족 및 후손들과 출애굽은 물론 가나안 이주의 의미도 되새기면서, 여호와의 행하신 놀라운 역사를 경배하고 기억하게 하시고자 그런 유월절 예전을 마련하신 것이었다(7-10절). 


3) 여기에는 특히 함께 출애굽에 동참하며, 이스라엘 백성과 출애굽과 광야 생활, 그리고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행보를 함께했던 이방인 계절노동자들에게까지도 유월절 축제에 참여할 문을 열어놓으셨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출12:51절 참조). 유월절 축제는 모든 족속에게도 열린 의의 축제였음을 엿보게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2. 복음서 / 눅18:9-14 /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 


본문에 소개된 예수님의 비유(比喩-Parable)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의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매우 실제로 소개한 내용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의는 인간들 사이에서 통용될 수 있는 성격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자신의 의에 대한 성격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로 인간들이 내세우려는 의는 다른 이들과의 차이와 차별에서 얻어내려는 성격을 갖는다. 


자신의 것 자체에 대한 옳고 그름보다는, 비교 대상인 상대보다는 내가 낫고, 더 우수하다는 판단 아래에서 자신의 우월함과 무죄함까지도 과시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런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과오를 애써 무시하거나 정당화시키며 산다. 그 바람에 그는 정작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개와 반성할 기회마저 상실한 체, 살다가 끝난다. 위선자요 정죄자의 신세를 벗어 나지 못한 체, 그의 일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크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가!


반면에 자신의 잘못과 범죄를 철저히 직시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 누가 보아도 그는 진짜 죄인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벗어나고자 그 누군가를 끌어들여 자신을 구명(救命)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그저 자신의 죄인 임만을 철저히 고백하면서, 오로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간절히 요청할 뿐이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상극적(相剋的)인 면을 가진 인물들 두 사람을 소개하신다. 하나는 당시의 거룩한 종교인인 바리새인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죄인 그룹의 대표 격인 세리(稅吏)였다. 세상에서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이들 두 사람의 성전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태도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1) 바리새인은 오직 감사만 드렸는데, 그 이유가 특별했다. 곧 자기가 다른 사람들인 죄인들, 토색, 불의, 간음, 그리고 옆에서 기도하는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한 것이다(11절). 그뿐 아니다. 자기가 일주일에 두 번씩의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드리는 것도 고하였다(12절). 그 말이 틀린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내용에는 상대와의 차이와 구별, 그리고 자기 자랑과 의로움만이 가득했다. 기도의 기본인 자신의 부족함을 고하는 것이 없었고, 하나님께 도움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구함이 전무였다. 


2) 또 하나의 기도자인 세리는 정반대였다. 온통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깊은 죄의식 때문에,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한다. 해결되지 못한 죄의 굴레에 매여 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아픔에서, 자기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罪人)이로소이다’라고만 뜨겁게 고백할 뿐이었다(13절). 압도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만 매달린 것이다. 


3) 그 둘에 대한 주님의 판정은 어땠는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간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14절)! 주님은 본래 당신을 진정 필요로 하는 자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상대의 신분(身分)에 대한 관심보다는, 당신을 믿고 도움을 원하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3. 서신서 / 롬3:21-31 /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결국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의(義)들 두 가지 중에서, 율법에 의한 의가 아닌 예수 십자가의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데에서 나오는 의가 모든 사람(죄인)을 구원한다고 선언한다(27-28절). 물론 율법은 죄를 막아 주는 법이기에, 그 자체가 지닌 의는 분명하다. 그것을 준수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도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범죄에 취약하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그 많은 법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다는 점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는 한계를 가진다. 


o 따라서 이제 우리는 바리새적 율법 신앙 양태를 버리고,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은혜의 선물로 주신 대안적(代案的) 의에만 전심을 다 해 매달려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받게 되는 하나님의 의로써, 저 세리처럼 진솔하게 회개하며 매달려 구하면 되는 의이다. 그 문은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 문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믿고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뵙게 되고 그의 풍성한 사랑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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