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전 9:19~27, 잠16:1-9, 마5:27-37
오늘은 절기 마지막 주일인 열두 번째 주일이다. 다음 주일이면, 9월 첫 주일로서, 창조절의 첫 주일에 들어간다. 교단 총회는 이 주일을 삼위일체 교회력 셋째 해의 첫 주일로 맞이한다. 날씨는 처서(處暑)를 보냈음에도 지속되는 폭염과 열대야로, 임박한 9월 맞이까지 염려하게 한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이미 높아진 수온으로 인하여, 바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고, 모든 농산물 생산의 현장들도 이 열기로 인한 예상 밖의 추수 상황 예측으로, 초비상에 들어갔다.
사실 우리는 이미 진정한 종말(終末)에 들어섰다. 이는 모두가 창조주의 생태계를 존중하지 못하고 이기심과 탐욕으로 악용하다가, 이런 현상에 빠져든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주엔 연세대에서 국제사회보장 학술대회가 <인구, 디지털, 기후>라는 세 가지 삼중 위기로 밀려온 거대한 물결 앞에서, 복지국가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를 주제로 진행되기도 했다. 세계의 두뇌집단이 모임이었다. 그런데도 문제 지적과 제기는 활발했어도, 그것을 해결할 출구 찾기에는 한계를 드러냈다. 진정 할 일들이 산적했음 만을 확인하였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월 주간에 연이어 증언된 세 본문 말씀은 또 다른 각도에서 우리 사회와 교회의 무너진 현장을 만나게 하였고, 동시에 그 대안까지도 확인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8월에 들어서 주신 말씀들은, 놀랍게도 그 주제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재건(再建)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계속 강조하신 말씀이었다. 결국 그 이중 사랑의 규격과 틀이 무너질 때, 교회는 결국 사회와 역사 속에서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는 것도 진단해 주었다.
특히 최근 우리나라 백성들은 지난 12.3 내란(內亂)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 주도 세력들 중의 하나가 폭력적 극우(極右)세력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 한국 개신교 보수 집단의 열성적 참여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하면서, 그 충격과 부끄러움을 씻어낼 수 없다. (이번 우리 대통령과 미국의 대통령 회담의 밥상에까지 오르는 해프닝이 될 정도로 파장이 큰 문제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최근엔 개신교 원로 지도자들 몇 분(유경재,김상근,신경하,권호경,이재정 신부)이 <소금과 빛 방송>이란 이름 아래, <조곤조곤 TV>란 유튜브 방송을 개설하여, 그동안에 자신들 사역에 대한 부족한 부분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인터넷 방송을 개설하고 송출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우리 모든 성도께서도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여기 나오는 원로들의 프로들을 꾸준히 시청하여 주시길 바란다. 참 기독교의 얼굴과 보다 온전한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 내용들을 통하여,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 본다. 언제 우리가 신앙의 곁길로 빠져드는가?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양 날개를 잃게 될 때이다. 특히 한 날개로만 믿음 생활을 해보겠다는 신념주의자들이 바로 신앙의 실패자들이 된다. 특히 ‘나는 오직 하나님만 잘 믿겠다’,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겠다’라는 입장을 갖고 지내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특징(特徵)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그들을 알리는 전형이 있다. 곧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박 터지게 싸웠던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이 누군가. 당시 그들은 진짜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고, 섬겼다. 요즈음으로 보면, 진짜 주일성수 잘하고 헌금 철저히 하며, 직분 감당 잘한 모범적인 성도였다. 성경도 열심히 잃었고, 문자의 일점일획도 믿는 정도였다. 얼마나 모범적인가! 그러면 됐지-, 무엇이 문제인가? 교만(驕慢)했다. 특히 자기와 같지 아니한 부족한 사람들과 이웃 성도들에게 교만했다. 차별했고, 무시했고, 정죄했다. 그 바람에 그들은 항상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어서, 나약한 이들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마음에 이웃 사랑의 선(線)이 구축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에는 은근히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병들고 가난하고 강도 만나서 신음하고 재난에 고통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과 섬김이나 나눔이 없었다. 그들은 고난이나 환난은 그들이나 그들 조상의 죄과 때문이었다는 간편한 이해와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 때문에, 그들은 안식일에도 병든 자를 계속 고쳐 주시는 예수를, ‘안식일 위반자’라면서 미워하고 증오했다. 사실 예수께서 그런 행동을 바리새인들 앞에서 보여주신 까닭은 바로, 안식일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실천하는 때임을 시범으로 알게 하시려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 그들은, 끝내 그런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하는 최악의 극우적(極右的) 행태를 자행하였다.
인과응보 사상을 경계하자. 정죄의 몫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대가 아무리 죄인이고 우리에게 원수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정죄하는 것 대신,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웃 사랑의 문을 가로막는 무서운 논리가 바로 인과응보 사상이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시종일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뿐이었다. 미움과 저주의 무서운 함정은 무엇인가? 믿는 우리부터 흔들고, 우리의 마음에서 이웃 사랑의 마음을 삭제시키는 일이다.
깊이 주목할 것이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일관되게 주신 이웃 사랑에 관한 권면 말씀이다. 그것은 바로 전체 율법의 핵심 내용인,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명령이었다(레19:18, 갈5:13, 약2:8, 참조). 이것이 왜 그리 중요한가? 우리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까? 간단하다!
내 몸은 사지백체(四肢百體) 오장육부(五臟六腑)로 구성되어 있다. 전 지체가 모두 다 다르다. 하지만 이토록 서로 다른 모습과 기능과 차이가 있음에도, 내 몸은 서로에게 하등에 전혀 갈등하지 않고 모두가 한 몸 되어 산다. 서로 돌보며 아끼며 차이에도 차별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산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산다. 이게 내 몸의 특성이며, 서로 사랑하는 힘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바로 내 몸 안의 그런 사랑의 질서를 본받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이런 이웃 사랑의 틀 안에서, 오늘 마지막 주일에 주신 말씀들도 재정리해 본다.
1. 서신서 / 고전9:19-27 / ”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福音)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
사도 바울에게는 최고의 경계하는 대상이 있었다. 바로 자기(自己) 자신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이래, 그 예수님과 복음의 세계 전파를 위해, 새롭게 부르심을 입었던 사람이었다(행9:15-16 참조).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위한 삶은 포기하고, 온전히 예수와 그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삶에만 전력하였다. 그러자 그는 외부로부터 숱한 역풍과 오해와 미움과 공격을 받으며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오직 경기장의 경주마처럼 앞만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로 인한 그의 수난사(受難史) 내역에 대하여서는 고후11:22-30을 참고해 달라).
그때 그는 자기를 미워하고 배척하며 죽이려는 그런 숱한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경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숙명(宿命)으로 받아들이면서 담대히 맞서서 살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를 힘들게 하는 대상이 따로 있었다. 바로 바울 자기 자신이었다! 그것은 틈만 있으면 자기 몸이, 보다 쉽고 편한 길을 찾으려고 방향을 틀려고 하는 움직임들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바울은 그런 자신을 내려쳤다. ‘이러다가, 나 자신만 버림을 당하게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스스로에게 불어넣어 주면서 자신을 다스렸다(26-27절). 그러니 얼마나 치열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성령 받아 주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엄중한 인생관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1) 바울의 목표는 분명하다. 바로 예수의 사람을 하나라도 더 얻고자 싶어 했다. 곧 선교(宣敎)의 열매를 얻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물불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만났다(19-23절). 그때의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었다(19절).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맞추면서,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진력하였다. 실로 복음을 위하는 일이라면, 모든 짓을 다 했다(23절). 오직 그들을 예수와 그의 복음에 참여하고자 해서 그렇게 했다. 이러한 바울의 사역은 아울러 지구촌에 흩어진 모든 선교사들과 복음 사역자에게도 영원한 사역 지침이 되었다.
2) 바울은 먼저, 총력을 다하는 경주자의 자세를 요구한다(24절). 하나님으로부터의 상(償)을 받도록 달음질하라고 명한다. 그러면서 절제의 삶도 요구한다. 달려가기에 몸과 마음이 지장이 없도록, 가볍게 하라고 한다. 목표는 선명히 하여서, 과정에서 우왕좌왕하는 일도 없게 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가짐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까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은 모든 행동거지에 더욱 엄격하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25-27절).
2. 구약 / 잠16:1-9 / ”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할까? 본문은 바로 그런 이들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귀한 지침들을 제공하여 준다. 결론은 이렇다. ‘일은 일꾼인 내가 한다. 그러나 그 결과와 평가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여호와께서 내리신다.’(1,9절). 이는 씨는 인간이 뿌리지만, 열매는 창조주께서 허락하시는 이치를 따름과 같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그 일꾼의 어떤 부분들을 당신의 평가 자료(資料)로 삼으시는가?
1) 주가 주목하시는 부분은 행동하는 자의 마음의 중심이다(2절). 곧 인간이 취한 행동 자체보다는, 그 마음의 동기(motives)가 무엇이었는지와 함께, 그 무게도 함께 보신다.
2) 동시에 자신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고 하는 지, 여부도 중요하다. 곧 계획(計劃)과 구상(構想)하는 것을 놓고, 여호와께 사전에 기도하며 말씀을 드리는 행위를 말한다(3절), 그러면 그 사람의 계획이 잘될 것이다. 이는 기도하면서 여호와의 뜻을 구한 과정이 있었기에, 그의 선하신 응답도 얻게 됨을 말한다.
3) 하지만 보다 더 생각을 해야 할 부분도 있다. 그것은 여호와는 만물을 지으실 때,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고, 심지어 악인까지도 악한 날에 쓰시려 하셨기 때문이다(4절). 이는 마치 출애굽 때의 애굽의 바로나 예수 고난의 때의 빌라도와 같은 악역을 떠맡은 자의 같은 경우도 만나게 될 수 있음을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응답 중에는 구하는 자의 요구와 생각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게 응답하시는 면도 많이 있음을 감안(勘案)하라는 말씀이다.
4)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여호와께서는 교만한 자를 아주 미워하신다는 점이다. 그와 연대하는 자들까지도 모두 벌을 면치 못하게 하시는 까닭이다(5절). 그러기에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은 반드시 인자와 진리 위에서 일하여야 하고, 그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여야 한다(6-7절). 그러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시는 축복을 주신다(창31:24, 33:4 참조). 아울러 그의 모든 일들은 공의(公義)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불의나 거짓 위선은 조그만 것이라도 안 된다(8절).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 질서 위에서 자기를 쳐서 복음을 위해 일하면, 주님은 반드시 그의 발걸음을 선히 인도하신다.
3. 복음서 / 마5:27-37 / ”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자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언행(言行)에 관하여, 매우 엄격하고도 분명한 지침을 내려주신 대목이다. 즉 당신의 제자들로 복음 선교를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이들은 매일 사용하는 언행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 행태가 아니라, 몸과 마음에서부터 시종 담백하고도 정직(正直)한 태도를 보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래야 선교의 열매도 얻기 때문이다.
1) 먼저 몸과 마음의 일관성을 강조하셨다(27-32절). 몸은 간음까지는 범하지 않았어도, 이미 그 마음으로 간음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간음자라는 것이다. 마음의 범죄부터라도 엄격히 다스릴 것도 요구하셨다. 그것은 몸과 마음은 서로 연대책임을 지닌 지체들이기에, 한 부분의 타락을 방치할 경우, 몸 전체의 몰락과 지옥행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음행 사유 없이 배우자를 버리는 일,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일도 간음임을 경고하셨다.
2) 지키지 못할 일을 두고 맹세하는 일도 금하셨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맹세하는 일은 자신의 품위와 가치를 심각히 훼손하는 일이기에, 맹세를 원천적으로 금하셨다(33-37절). 그러면서도 언행의 원칙만을 굳게 할 것도 요구하셨다. ‘예’와 ‘아니요’, ‘옳다’와 ‘아니다’라는 입장만은 고수(固守)하라 하셨다. 사실 확인이 안 되어서 그럴 수는 있으나, 사실을 알고서는 입장은 분명해야 한다.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해야 한다. 여기에서의 거짓은 설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요즈음 내란 사건의 증인들의 행태를 보면, 바로 이 부분에서 그들의 운명이 갈라지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잖은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구원의 유일한 증표로 ‘예’라고 해야 한다. 그게 곧 살길이다!
o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언행은 분명히 세속인과는 달라야 한다.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식이거나 즉석요리하듯이 처신하고 말하면 안 된다. 상대인 인간의 생명과 영혼을 구하느냐 멸망시키느냐에 관련된 내 몸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구원의 획기적인 방정식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이중 계명 익히고 전하기에 온 교회와 성도가 더욱 집중해야 한다. 그중에 특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교회는 깨어 일어나야 한다. 이 균형을 잃으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없다. 반면에 제대로 실천하는 교회가 되면, 우리는 다시 소생하여 세상과 백성을 살리는 구원 공동체로 재도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