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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후(10-3) -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양 날개로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25-08-18 (월) 14:56 9일전 49  

본문) 갈 5:1~15, 출31:12-17, 마12:9-14


오늘은 강림 후 열 번째 주일이다. 그동안 맹렬했던 폭염(暴炎)도 조금은 누그러진 느낌이다. 올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 재해가 컸다. 폭우, 폭염, 대형산불, 산사태, 장마 등으로 인해 너무 많은 인명 피해와 자연재해가 우리 삶을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진정한 안전지대도 없고 안전한 시기도 없다는 느낌도 든다.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는 과연 안전한 피난처는 있는가? 


이는 한편, 그만큼 우리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해 부여된 자율적 여지도 많지만, 동시에 그것을 억제하고 속박하려는 어둠의 실세도 역시 막강하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상반된 힘들, 곧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물론 이 둘 모두를 관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외부에서 오는 불가항력적 위협만을 생각하며, 그 대책에만 매달려 살 수만은 없다. 특히 이 부분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적 성격이 강해서, 또다른 대처가 필요하다. 


반면에 위로부터 주어진 선물인 삶의 자유, 곧 스스로 택하여 행동할 여지에 대하여서는 항상 깊이 관심하며 살아야 한다. 그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선택과 행동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전적인 자기 책임(責任)도 따른다! 하지만 이 책임적 영역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풍성히 우리를 돕고 있잖은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 곧 삶의 자율적 공간으로 제공된 이 세월을 내가 어떻게 활용하며 사느냐 하는 문제가 절대 중요하다. 그 시간 활용의 내용이 바로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 아주 생생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간 사용의 내역이 바로 우리가 머잖아 하나님 앞에서 가서 보고드릴 내용이 될 것들이다. 어떤가? 여러분은 자신에게 부여된 ‘그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며 지내시는가? 


오늘 우리가 받은 세 본문 내용은, 바로 그 자유의 시간을 내가 어떻게 보내고 사는 지를 짚어 주는 청진기와 같다. 본문은 대략 세 가지 차원에서 정리할 수 있겠는데, 그 핵심 내용 제시와 함께, 우리의 잘못된 삶의 모습도 지적해 주면서, 동시에 그러기에 우리 여생(餘生)을 어떻게 정신 차려서 살아야 할 것인지도 더불어 일깨워 준다. 


1. 우리의 생각과 과제를 열어주는 첫 내용은, 바울 서신서인 갈라디아서 말씀이다. 요점은 피차 멸망할 싸움에 휘말리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며 살자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처럼 사랑하자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때 개척된 곳으로서, 지금 키르케 수도인 앙카라 일대인 이방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였다(행16:6). 그런데 어느 순간 그곳에는, 그릇된 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선동하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바울을 통해 믿음의 설교를 듣고 성령을 받았던 기쁨까지도 다 빼앗기는 등의 신앙적인 위기에 빠져들었다. 바울의 이번 편지는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에서 환기(喚起)하면서, 올바른 선택을 요구한다. 하나는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1절)는 요구였다. 또 하나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요구였다(13절).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먼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자유란 대체 무엇일까?’. 이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부여하신 자유로운 해방(解放)된 삶을 말한다. 그것은 용서와 자비와 긍휼이라는 성격의 복음(福音)을 통하여 주신, 은혜의 선물이었다(약2:13). 그런데 그곳 신자들은 언젠가부터, 그런 복음을 주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율법(律法)이라는 무거운 종(從)의 멍에’를 메기 시작했다. 여기서 바울이 모세의 신령한 율법을 ‘종의 멍에’라고 규정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행15:10-11갈2:4, 4:5 참조). 


그것은 율법이 인간의 전 삶을 통제하고 방향을 규정하는 생활 법(法)으로서, 그것도 무려 613가지나 되었기에, 실로 인간이 지키기에는 불가능한 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법이란 무엇인가? 다 잘 지켜도 하나라도 범하면, 그는 범죄자요 죄인이 된다. 도둑질하지 않았어도, 이성을 보고 마음으로 간음하면 그는 죄인이 된다. 간음하지 않았어도, 남의 것을 욕심 내면 그것 또한 죄인이 된다. 그러니 세상 어떤 사람이 이토록 그물망처럼 얽혀져 있는 그 촘촘키로부터, 초연할 만한 의인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러기에 율법은 그 자체가 분명 의로운 것이지만, 그러나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그 율법이 ‘종의 멍에’요, ‘죄인들만을 양산하는 법’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차원이 다른 새로운 대안이 필요한 법일 뿐이었다. 정죄가 목적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가 목적인 사랑의 법이 필요했다. 하나를 범해서 완전한 죄인이 되게 하는 법이 아니라, 하나를 지켜내면 모든 죄에서 자유하고 해방될 그런 생명의 법이 필요했다. 


그런 법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과 용서의 법이 바로 그 법이었다! 그를 믿어서 누구나 죄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면 되었다. 그래서 아이가 부모의 그 사랑만 받으면 인간이 되는 것처럼, 예수가 주신 은혜와 사랑의 법만 좇으면, 누구나 의롭게 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그 은혜의 법을 만들어 주셨다. 이런 놀라운 사랑의 법, 곧 모든 죄에서 자유하고 해방되는 법을 예수가 안겨 주셨다(13-14절, 요3:16). 대사면(赦免)의 법이었다. 갈라디아인들이 처음에 큰 기쁨과 소망 속에서 예수께 돌아온 까닭도, 바로 이 감격 때문이었다. 


2) 그런 성도들이 지금 영적 위기와 혼란에 빠져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이 전한 사랑의 복음을 외면하고, 율법의 하나인 할례(割禮)까지도 받아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거짓 교사들의 지적에 자기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할례는 무거운 것이 확실하다. 그것도 이방인인 그들이, 유대인들이 받아온 몸의 할례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은 더 큰 부담이었다. 할례도 구원 문제라니까, 순진한 그들이 할례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되물을 게 있다. 그렇게 해서 그가 할례를 받았다면, 그때부터 그는 자동으로 의인이 되나? 천만의 말씀이다! 더 큰 불가능한 현실만 대면할 뿐이다. 그때부터 그는, 나머지 612가지 율법들도 남김없이 모두 지켜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2-3절). 더 무서운 현실은 그때부터 그는, 결국 이 무거운 멍에를 해결해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만다(2절). 이웃에게는 위선적 율법주의자가 되면서, 자신은 의(義)로운 체하며 산다. 당연히 은혜도 못 받게 되고, 율법에 따른 최후의 심판만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다(3-4절).


3) 그러기에 바울은 이 율법주의 함정을 벗어나게 하고자,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6절)이기에, ‘이제 육체를 가진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13절)하며 살자고 호소했다. 이를 위하여 바울은, 레19:18에 있는, 전 율법의 핵심(核心)인 이웃 사랑 부분을 인용하면서 그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하라’는 말씀이다(14절).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까? 간단하다. 내 몸은 사지백체 오장육부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서로 다르다. 기능도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내 몸은, 이토록 서로 다른 기능과 차이를 가지고서도, 모두가 아무 소리없이, 서로 돌보고 아끼며 차별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공존한다. 그것도 죽기까지 그렇게 한다. 이게 내 몸의 특성이며, 서로 사랑하는 실상이다. 교회의 일원으로 산다는 것도, 바로 그렇다. 내 몸이 이 사랑의 질서를 좇아서 살듯,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명하셨다. 


2.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면서, 그 중심을 꽉 잡아주시려는 가장 큰 시도로서, 안식일(安息日) 제정(制定)과 그 실천에다 두셨다. 이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최초이자 최후까지의 가장 절대적 기초가 되는 절기(節氣)였다. 이제 말씀의 내용을 통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여 공포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자. 


1) 여호와께서는 안식일을 ‘나의 안식일’(my Sabbaths)이라고 표명하셨다(13절). 이는 그날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이 얼마나 엄중함을 명백히 드러내신 것이다. 그날에 대한 성별, 애정, 복, 은혜, 관계 등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압도적인지를 밝히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날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면 안 되고, 오직 여호와의 날로 구별하여 거룩히 지켜야만 한다. 그날을 지키느냐 여부가 그가 여호와의 사람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판가름할 척도가 되었다(23,하).


2) 이날을 어떻게 준수하여야 할까? 거룩한 날이기에, 그날을 더럽히면 절대 안 되는데, 특히 그날에 소득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다(14절). 소득위한 노동은 엿새 동안에 해결하고,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로서, 휴식을 위한 날‘이어야 했다(15절). 이때의 휴식은 창조주 여호와의 쉼을 본받는 일로서, 우리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노동과 휴식을 균형 있게 맞추어 사는 존재라는 점을 일깨워 주셨다. 


아울러 이날은 창조주와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고자 제정하셨다. 이는 본질상 하나님보다는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특히 이 휴식의 대상은 당사자뿐 아니라 자유가 없는 노예들, 가축들,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의 쉼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 여호와의 날인 주일은 인간은 물론, 온 생태계 돌봄도 포함하기에 지극히 큰 축복의 날이다. 


3) 이 안식일 준수는 후손들과 함께하는 것도 강조된다(16-17절). 여호와를 섬기는 일은 자기 대(代)에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으로 계승(繼承)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특히 자기와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삼대(三代)가 함께 주일을 성수하는 가계를 이루는 일은 다른 그 어떤 계명보다 우선적이고 축복된 일이었다. 그럴 때 그 가계는 든든한 가계가 된다. 곧 여호와 중심의 가계가 되고, 그의 돌봄과 사랑을 항상 받게 되며, 온갖 여호와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는 가족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계 중심의 공고한 주일성수 신앙 때문에, 이스라엘은 기원후 70년부터 나라 잃은 민족이 되어 세계 2차대전 직후까지, 무려 근 2천 년 동안 떠돌이 백성으로 온 세계에 흩어져 지냈으나, 때가 되자 그들은 금방 결집하여 세계를 움직이는 놀라운 백성으로 다시 소생했다. 이제 우리도 가계 전체가 주일성수 하는 가정을 이루야 한다. 그러면 그 가정은 견고하다. 어떠한 환란과 역경에도 일어나 빛을 발하게 된다.

 

3. 복음서는 이런 안식일이 잃어버린 인간을 향한 이웃 사랑의 날이어야 함도 강조한다. 이는 구약에서의 안식일 성수 강조한 부분과 함께, 예수께서 보완해 주신 새 차원의 안식일 성수론(聖守論)이기도 하다. 곧 안식일은 분명히 여호와의 날로 거룩히 성수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날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함께 일깨우신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우리 구원의 충분조건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이중(二重) 계명의 실천에 있음을 알리신 것이다. 


1) 바리새인들은 본래 문자주의적 신자들이었다. 그 문자 안에 있는 의미와 정신에는 별로 관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안식일 이해는 매우 편협했기에, 그들은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 된다‘는 문자에만 붙잡혀 살았다. 일하면 그는 죄인이고 죽임을 당하여야 마땅했다. 그런 그들이 어느 날 안식일 문제로, 예수와 치열한 마찰을 하였다. 그들은 안식일 불문하고 어느 날이든, 쉼 없이 병자를 치료하고 있던 나사렛 예수를 고발할 목적으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와 있었던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지목하면서 예수께 심문하듯 물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10절). 


2) 예수님은 그들 바리새인들의 메마른 영혼의 모습에 가슴이 아프셨다. 그들에게는 민중과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영혼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병든 자들을 향해 무시하고 정죄하는 마음은 대단했다. 그 마음에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 철저해서, 그 모든 장애와 질병은 자신들의 죗값 때문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병자들이나 고통당하는 이들의 인격과 인권엔 아주 무자비했다(눅10장 참조). 당연히 그들에게는 이웃 사랑이 발붙일 여지도 없었다. 이렇듯 당시의 유대교는 자비의 기능이 죽었고, 정죄의 기능만이 왕성하였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모습은 요즈음의 한국기독교 극우(極右)세력이나 동성애 공격자들의 흐름과도 비슷하다. 마치 한쪽만 보고, 달려가는 돌격대의 모습이다. 


3) 이에 예수께서는 어떻게 대응하셨나? 그들이 외면하고 있는 이웃 사랑의 법을 끄집어내시며 대응하셨다. 바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율법의 핵심 계명이었다(레19:18, 갈5:14 참조). 그래서 ’너의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인지상정의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당연히 살려내야지요‘라는 양심적 답변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4) 찔림받은 그들은 침묵했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이 양보다 훨씬 귀한 데, 어찌 안식일에 병으로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위법하다고 할 수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즉시 그의 손을 원상회복 시켜 주셨다. 이는 안식일을 거룩히 성수하는 일에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영광 돌리는 일과 함께, 고난 중인 이웃에게는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선행도 함께 포함되어야 함도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알려주신 것이다. 


o 우리는 예수와 그가 선포하신 사랑의 복음을 믿고 산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악과 모순됨 속에서도 구원을 받고 산다. 다만 이제 다시 명심할 것은 그 말씀과 믿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웃 사랑을 외면하면서 자기는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면서, 당신에게만 열렬히 매달리는 자들은 멀리하신다. 이 이중 사랑의 균형이 깨진 신앙인은 필연 극우 신앙인이 된다. 다시 출발하자. 사랑 없는 신앙은 위험이고 독이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예수 복음으로, 나와 너 모두를 살리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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