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57장 14~19절, 야고보서 2장 1~13절, 누가복음 14장 1~11절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열한째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에 우리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간청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해서, 청종, 변화, 오직 하나님만, 종이 할 일, 대비, 지혜 있는 삶, 그리고 거룩한 백성의 삶까지 이어졌습니다. 매주 하나님은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낼 성도들을 향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차원 높은 삶, 곧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거룩 곧 세상과 차이나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또 거룩하게, 구별되게, 그렇게 성도답게 살아야 하는지 알면서도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돌배나무에 거름을 주고, 가지를 치고, 그렇게 땀 흘리고 정성을 쏟아도 그 나무에 참배가 열릴 수 없는 것처럼 타락한 본성을 가진 내 삶에 거룩이라는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백성의 삶, 곧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여러분 거룩한 삶은 우리가 노력하고, 힘을 내고,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열심을 낼 때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가진 내가 죽는 그 자리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의 희생제사 제도를 마련해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고, 사도들은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조금 더 노력하고, 내가 조금 더 열심을 내고, 그렇게 내가 더 힘쓰고 애쓰면 된다는 교만한 생각과 결국 내 의가 되는 그 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죄를 전가한 희생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린 것처럼, 로마서 12장 1절에 기록된 바울의 권면대로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의 십자가 앞에 나도 죽었음을 인정하고 받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내 마음,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내 생각, 하나님께서 원하신 삶과 다른 내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이곳, 이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다시 사는 은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는 새로운 삶,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복음서 말씀인 누가복음 14장 1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완고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율법에도 없는 안식일 금지 규정을 39개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처음 시작은 안식일을 보다 거룩하게 지키려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규정들을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다 보니, 정작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안식일을 주신 본질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들은 잘못된 안식일 규정을 지키느라 하나님께서 주신 쉼과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사는 6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안식일조차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병들고 아파하는 이웃의 아픔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말씀과 다른 전통을 지키느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더 큰 계명을 놓친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시작하는 안식일에도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패역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기에,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사람이기에,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5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누가복음 6장 9절 안식일에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누가복음 13장 16절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묶고 있는 것을 풀어주는 것은 합당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삶을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붙잡고 살아온 잘못된 기준을 바꾸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완고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바꾸는 대신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예수님을 책잡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지금 예수님께서 초청된 자리는 바로 이런 속셈을 가진 바리새인들이 만든 자리입니다. 그들이 설계한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수종병 든 사람도 초청했습니다. 그들의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급한 환자만 치료해야 했습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사람을 고치는 것은 불법입니다. 여러분 수종병은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입니다. 당시 수종병이 불치병이긴 하나 생명이 위급한 질병이 아니라 만성적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법에는 생명이 위급하지 않은 수종병은 안식일에 고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 왔던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 예수님은 분명히 그를 고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고발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 곧 마음의 생각까지도 다 아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이런 속셈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초청에 응한 것은 그들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책잡으려고 모인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예수님의 질문은 당시 율법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 너무나 쉬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을 보면,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 누구도 아무 대답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안식일에 수종병을 고쳐주는 것은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에 의하면 분명히 죄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일러 준 율법, 곧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했을 뿐입니다. 율법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금한 항목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질문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라는 말에 합당하다고 하면 자신들이 세운 전통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아니라 하면 그것은 율법에 없는 것이니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완고함이예요. 내 안에 말씀과 다른 것이 발견되었다면 나를 말씀에 맞추어야 하는데, 그렇게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그들은 말씀 앞에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메시야인 예수님 앞에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자신을 말씀에서 떠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 채 불순종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시 불치병으로 알려진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신 것을 보면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요, 바로 그 일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 예수님을 통해 고쳐졌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앞에 자신들의 기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도대체 하나님의 역사와 메시야인 예수님 앞에서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그 완고함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요? 두 말할 필요없이 교만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그들은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남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16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모든 사람을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새 번역 성경은 이를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실까요? 왜 교만한 사람은 넘어지고, 망하게 되고, 결국에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될까요? 교만은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잘난 체하는 태도로 겸손함이 없이 건방짐”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을 보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누가 하나님 앞에 잘난 체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래서 교만해 봤자, 거만해 봤자 우리는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여러분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는 주인에게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껍데기는 창고에 들이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태우는 거예요.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교만에서 떠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겸손해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자아를 굴복시킬 수 있고, 그렇게 겸손해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면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을 경우 본문 9절 잔치에 초대한 주인이 찾아와 그 자리를 비우라고 할 것이고, 그러면 거기에 있던 모든 자들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인 잔치는 세상의 끝에 있을 천국 잔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는 교만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살고 있는 그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낮추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내 안에 스스로 믿음 있다고, 스스로 능력 있다고,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고 여기는 교만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지도자, 당신을 책잡으려 했던 패역한 삶에게도 사랑으로 권면해 주셨습니다. 본문 13절 “잔치를 베풀려거든” 여러분 지금 이날은 안식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회당에서 있는 의식이 끝난 후에 이렇게 다른 사람을 초청해서 식사를 나누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그것이 경건한 일이고, 또 율법에 충실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식탁을 배설한 주인에게 경건을 위해 다른 사람을 초대한 것이라면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초청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언 19장 17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갚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베푼 선행은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십니다. 그러니 갚을 것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할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없는 이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나누는 것이, 그렇게 안식일에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거룩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에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와 거룩한 삶을 시작하는 안식일에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시작하는 안식일에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 다시 말해 생명을 살리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순종해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안식일의 기준이 되신 예수님께 내 삶의 방향을 맞추어야 합니다. 누가요? 누가 그래야 할까요? 세상 사람이 아니예요. 하나님 앞에 나온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성도들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서신서의 말씀인 야고보서 2장 1~13절을 보면, 흩어진 성도, 다시 말해 고국을 떠나 해외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완고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절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었던 주의 형제 야고보는 박해로 말미암아 세상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했습니다. 여러분 당시 이 편지의 수신자인 흩어진 성도들은 쫓겨 간 그곳,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삶의 자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하나에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친 자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렇게 믿음 좋은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붙잡고 살았던 그들이 어느새 세상의 가치를 붙잡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의 일이, 그대로 회당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서조차 가난하다는 이유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을 차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세상 것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세상처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그리고 흩어진 성도들은 믿음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에 거룩이 보입니까? 이들의 모습에 내일을 향한 소망이 보입니까? 과연 이들을 통해 인생들의 욕심으로 무너졌던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의 삶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이들의 삶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정말 이들이 하나님께서 이 어둔 세상에 남겨 놓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고대하고 있는 피조세계가 이들에게 소망을 걸어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서와 서신서 말씀을 살펴보았듯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믿음이 좋다고 자부했던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서조차 세상과 차이나는 거룩, 세상을 변화시켜 낼 소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주일,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아직도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거룩하게 될 수 있고, 내가 조금만 더 힘을 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그렇게 우리 모두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내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니까요.
대단히 죄송하고, 너무나 원통하지만,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믿음, 나로부터 시작된 선행, 그렇게 나로부터 시작된 모든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나로부터 나온 열심은 결국에 내 의를 이루는 교만이요, 남을 정죄하는 기준이요, 나도, 그리고 남도 넘어지게 만드는 앞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면 좋을까요?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 소망을 찾아야 할까요?
구약의 말씀인 이사야 57장 14~19절을 보면, 소망은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대단히 죄송하고, 송구스럽지만, 목사에게서 소망을 찾지 마세요. 금새 실망합니다. 여러분 성도들에게서 소망을 찾지 마세요. 실망한다니까요. 어떻게 목사가 그럴 수 있냐?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장로가, 어떻게 권사가, 어떻게 집사가, 어떻게 교회 다니는 성도가 그럴 수 있냐?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의 소욕으로 인해 실수할 수 있고, 우리는 유혹과 미혹 앞에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할렐루야!!
본문 14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본문 바로 앞 문단인 이사야 57장 3~13절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사는 사회에 만연한 우상 숭배의 행태를 하나하나 열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회개한 자들 곧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은 반드시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먼저 낮은 길은 돋우고, 무너진 길은 고치고, 발에 걸려 넘어질 것들은 다 제거해 주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회복과 치유, 그 구원의 역사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전부 제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품었던 교만한 맘을 버리고 겸손히 나를 낮추면, 지난날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은 다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죄사함, 곧 다시 사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완전한 용서와 온전한 회복은 단지 말 한마디로 끝내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을 열어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죄 값이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치러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기만 하면, 우리 주님께서 죄와 허물로 침식되었던 우리 마음을 고쳐주십니다. 죄책감과 정죄감으로 무너졌던 우리 삶을 다시 세워주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새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이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 – 세상과 차이나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겠지요. 여러분 예배드림으로 시작하는 이 한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그리고 우리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미움, 다툼, 시기, 질투로 사람 사이에 무너졌던 더불어 사는 삶 곧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해 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구별된 삶을 통해 세상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성도답게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 한 주를 예배드림으로,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때로 믿음 없는 모습이 내 삶에 비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지금은 말씀대로 다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느새 말씀보다 육체의 소욕을 선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세상을 변화시켜 내리라,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드러내리라 마음먹지만 정작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나 자신조차도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는 나약함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을 잃어버렸을 때,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을 잃어버렸을 그때, 여러분 낙심한 채로, 무너진 채로, 넘어진 채로 있지 마시고, 그때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게 내미시는 못 자국 난 주님 손을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주를 간절히 찾고, 또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주와 함께 거룩한 백성의 삶을 다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이 어둡다고, 교회가 빛을 잃었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주께서 주신 말씀의 빛, 은혜의 빛을 가진 사람이 주님 손잡고 일어서면 됩니다. 그렇게 누군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 거룩한 삶의 자리에 서면 됩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을 살리고 복 되게 하는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