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31:12-17, 갈 5:1-15, 마 12:9-14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출 31:1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이미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안식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나 여호와가 엿세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언약(출 31:16)과 표징(출 31:13, 17)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할례(창 17:10)를 통해서도 언약을 삼겠다고 하셨는데 할례는 한 번의 행위로 그치는 언약의 표징이지만, 안식일은 일곱째 날마다 지켜야 하는 행위의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언약이요 표징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니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합니다.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러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 엿세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31:14-15)
하나님은 세 번 거듭하여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그 생명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담보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은 어떤 뜻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쉰다는 것은 육의 쉼을 넘어서서 구원을 완성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430년간 머물렀던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애굽의 총리대신에 올랐던 요셉이 죽고 난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은 종의 삶으로 전락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이요, 거류민이요,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쉼이 없는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신명기가 전하는 안식일은 애굽의 종살이를 소환합니다. 종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5:12-15)
40년 광야 연단이 끝나갈 무렵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명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왜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이리라”는 엄중한 말씀을 했을까?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도 보전할 필요가 없다고 했을까? 안식일은 생명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를 깊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성찰의 결과가 안식일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한 출애굽 구원의 현실을 나타내는 것이요, 동시에 출애굽 구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언약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 번의 의식으로 끝나는 할례 언약과 달리 안식일은 매주마다, 일곱째 날이 되면 지켜야 할 언약으로서, 그로인해 하나님의 구원이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양식이 떨어져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고, 물이 갈하여 목이 마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은, 출애굽 구원을 육의 유혹과 바꾸고자 했던 것입니다. 순간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갈 때, 그들은 다시금 자유를 박탈당한 종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안식일은 달콤한 육의 유혹 뒤에 숨어 있는 뼈아픈 눈물과 고통의 올무를 경계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자유를 보전하며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과연 안식일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구원의 언약이요 징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같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되 그날은 거룩한 날이니 더럽히지 말라(출 31:14)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모두 생명이 끊어지리라고 하였으니,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뒤집어 보면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의 거룩함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일은 무엇입니까? 탐욕입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안식일은 자식을 포함하여 종들과 가축들과 나아가 유숙하는 객에게도 아무 일을 시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일을 시킨다는 것은 생산을 늘려 더 많은 이익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은 일체의 탐욕과 욕심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엿세 동안 힘써 일하여 얻은 열매에 감사하면서 그 수고의 열매로 일곱째 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은, 출애굽 구원의 모형을 가지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보내셨습니다. 어린 양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자는 죄에서 사함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의 자유를 버리고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기에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구원의 자유를 버리고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구원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 자입니다.(갈 5:13) 바울은 할례를 예로 들면서 율법에 정한 할례를 받은 것을 의의 징표로 삼고 할례받지 않은 자, 곧 이방인을 멸시하고 스스로 의로운 자라는 오만에 빠진 자를 구원의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자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이 율법에 정한 할례를 행함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인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참 정신은, 요약하자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한 말씀”(갈 5:14)에서 이루어졌는데, 율법을 지켰노라고 하는 할례주의자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웃을 비하하고 멸시하였으니 오히려 그들은 율법을 범한 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을 때, 다시금 종의 멍에를 메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함을 입은 자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자”(갈 5:13)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안식일에 종들에게 일을 시키고 가축에게 쟁기를 메게 하는 것은 안식일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은 출애굽 구원을 버리고 다시금 바로의 종의 삶으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이제 우리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좀더 깊게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일하지 않는 소극적인 안식일에서 일하는 안식일, 다시말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이 안식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소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질문을 던집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2:12)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병 고치는 행위가 옳으냐고 묻고, 만약 예수님이 병든 자의 손을 고쳐준다면 이를 문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손 마른 자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평소 자비를 강조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모순이 있음을 비판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양보다 귀한 사람을 위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에게 손을 내밀라 하시고 그가 손을 내미니 손이 펴지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의 거룩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안식일에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음으로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을 훼손하고 더럽히는 것은 탐욕에 빠진 자들이 착취하는 노동입니다. 그것은 애굽의 바로 아래에서 신음하는 종들의 수고입니다. 기계처럼 부림을 당하는 노동의 현장입니다. 이를 금하는 것이 안식일의 거룩함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구덩이에 빠진 위급한 생명을 구하고, 손 마른 자를 고쳐주고, 나면서 보지 못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것, 이 모두는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의 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대가 없이 베푼 선행입니다. 이러한 선행은 쉼과 구원이라는 안식일의 정신에 부합합니다. 예수님을 공격한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조차도 부정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봅니다. 탐욕을 내려놓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취하고자 쉼이 없는 일곱째 날을 보낸 결과, 피조물은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함으로 자연은 파괴되고 상상을 초월한 기후위기의 재난이 몰려옵니다. 일곱째 날에 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의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물은 새롭게 주어진 엿세를 힘써 일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창조의 완성인 안식일은 지속가능한 생명의 삶을 살게 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이후로 안식일은 주일로 지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묵상하면서 엿세를 힘써 일하고 거룩한 주일을 보내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키게 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생명의 하나님, 출애굽으로 종의 멍에를 벗게 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의 정신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믿음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