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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부활절(1-1) - " 부활의 증인들 " / 부활주일 / 제주 4.3기념주일 / 이병일목사

관리자 2024-03-29 (금) 14:21 30일전 67  

본문) 23:50-24:12, 14:15-31, 1:10-18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신앙은 초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었으며, 기독교를 태동하게 한 근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에 의해서 선포된 주된 메시지(케리그마) 가운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나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도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위협과 죽음에도 불굴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담대하게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기독교인이나 아닌 사람들도 많은 논쟁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논쟁이 끈이지 않는 것은 그것을 보도하는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각 복음서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과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났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빈 무덤)나 예수님의 나타나심(현현)의 구체적인 묘사는 복음서마다 그 중심과 당면한 문제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따라서 복음서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의 순서를 꿰어 맞추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며, 부활의 사건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죽음 이후에 우리의 몸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추축을 하는 것도 부활의 핵심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구절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날조된 유언비어라는 구실로 삼아 기독교를 공격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거나 체험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에 중요한 것은 부활한 예수님이 누구에게 어디에서 나타났고, 그들에게 나타나서 무엇을 하였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여러 모양으로 여러 장소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누구에게 어디에서 나타났죠?)

무덤 앞에서 당황해 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에게, 의기소침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에게, 무서워서 예루살렘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에게,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면 열두 제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와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그 사실을 남성 제자들에게 전파한 이들은 여성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듣고 본 여성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파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했다고 합니까?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여성들의 말을 무시하고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써 제자들이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었고 예수님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빈 무덤 이후의 일을 알지 못하던 여인들에게 그 상황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갈릴리로 돌아가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희망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절망과 희망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절망의 끝에서 갈릴리로 돌아온 여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꿈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시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빈 무덤에 절망한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약속은 두려움과 망설임을 넘어서 희망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몸이 아프거나 직장이 불안정할 때에, 당장의 삶의 어렵고 피곤할 때에 그 순간순간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남은 사람들에게 대한 걱정은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절망을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 속으로 끌어내릴 때 희망이 보입니다. 절망을 거스르는 희망, 모든 희망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붙들고 놓지 않을 때, 이 희망은 우리에게 상황적인 압박과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존재함을 가르치며 사랑은 하느님이 선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만, 희망은 하느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보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절망의 끝에서 갈릴리로 돌아온 여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꿈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시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현장인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희망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매일매일 죽을 것 같은 위험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어두운 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이 다가올지라도, 가야할 방향이나 함께 갈 사람들이 적을지라도, 세상에서는 언제나 의롭고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거라고 포기하고 싶을 지라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죽을지라도 다시 살아서 일어나고, 다시 희망을 품고 부활을 믿으며 나아갑시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선택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의 미래를 하느님께 걸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서의 삶에서 탈출(Exodus)하여 해방(Exodus)된 이스라엘 인민들이 홍해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에는 절망이었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길을 막고 있으며 뒤에서는 무장한 이집트 군대가 추격하는 상황에서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는 인민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바다에 발을 내딛었을 때에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을 때에 이스라엘 인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의 은혜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하느님 안에서 현재를 누리십시오. 한 순간순간의 삶을 사랑할 때에 절망은 희망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질 것입니다.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현장인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희망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십자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 날과 시간을 정하여 과거의 사건으로 기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참여의 영역이며, 따라가야 할 길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감정을 새로운 힘으로 승화시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로 삼는 사람은 갈릴리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민중들과 함께 하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잊지 못하고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들은 이제 갈릴리에서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역사 속에서 실현하려는 사람들, 비록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나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사람들, 뒤따르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무쳐서 그들의 길잡이가 되는 사람들, 예수님의 활동 본거지였던 갈릴리와 같은 현장을 찾아서 다가가는 사람들, 그들의 행동 속에서 예수님은 지배자들의 정치적 음모를 깨뜨리고 부활하십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제자들은 숨어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다른 말로 부활복음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어간 예수님을 보고 황망한 가운데 전의를 상실하고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당당하게 자기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행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의 본래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일이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일이란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인간들에게 직면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그의 지상 활동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사건을 그리스도만의 특권이라고 배타적으로 돌리는 것은 부활의 참 뜻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국한된 메시지가 아닙니다. 부활에의 참여라는 의미가 배제되고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결과에 빠지고 맙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제시할 뿐 그 완성을 안겨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제자들은 다시 모여서 예수님의 길을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당당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함으로써 교회는 출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남겨놓은 그 일을 이제 제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하여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에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그가 십자가에 처형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를 따르고, 믿고, 그의 임재를 체험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끝장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과거의 예수님이, 계속 존속하는 공동체 속에, 완전히 새로우며 초월적인 현존 방식으로 계속해서 임재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와 우리 공동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가운데 그 예수님을 날마다 체험하는 사건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그 날과 시간을 정하여 과거의 사건으로 기념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참여의 영역이며 따라가야 하는 길이 될 뿐입니다. 절망적인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삶을 위한 해산의 진통일진대 예수님의 제자들, 아니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언제나 그 죽음과 부활에 함께 참여하도록 초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천년 전에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무덤의 무거운 돌덩이를 옮기고 다시 살아난 이유는, 하느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과거에 일어났던 일, 빛바랜 사진처럼 추억 속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그리워하는 일, 우리의 미래에 혹은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상상하며 논쟁하는 일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지금 살아서 하느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이 친히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함께 하느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을 기억하는 바로 나와, 바로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며, 우리는 그 사건에서 큰 희망과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 하루는 예수님이 부활한 그 이유에 의해서 더욱 가치 있게 될 것입니다. 한 번은 죽었으나,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신예수님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만드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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