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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7-1) - " 피의 땅에서 정의의 열매를 " /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 이병일 목사 >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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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부활절(7-1) - " 피의 땅에서 정의의 열매를 " /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6-05-15 (금) 12:17 3일전 29  

본문) 사 32:9-18; 행 1:12-26; 요 16:16-24


지난 5월 14일(목)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요즘 기독교에서는 교회절기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북유럽에서는 아직도 그날을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서 부활의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산 위에서 500명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십니다. 부활주일 후 40일이니 항상 목요일이 됩니다.

해발 800m가 되는 감람산 꼭대기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 안에 팔각형의 건물이 있습니다. 팔각건물은 예수님의 승천을 상징하여 지붕을 씌우지 않았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모스크를 상징하는 돔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승천의 상징을 없애고 재림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팔각 건물 안에는 예수님이 승천할 때에 밟았다고 하는 바위가 있는데, 희미하게 발자국이 움푹 패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고 하는데, 아마도 여기에는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믿거나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교회 사람들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사도행전, 에베소서(1:20)와 히브리서(4:14)와 베드로전서(3:22), 그리고 사도신조에서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하늘로 올라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간 것은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가버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하는 상징은 우리가 하늘을 마시듯이,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묘사한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이는 부활한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함께 하신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때, 하늘에 오르사 하느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하늘과 같이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 120여명이 다락방에 다시 모였을 때의 장면입니다. 그 무리들 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함께 있습니다. 곁가지이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복음서에 많이 등장하는데,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 탄생과 어린 시절 이야기에만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때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면서 잡으러 왔는데, 부활과 승천 이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속에 함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베드로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먼저 유다를 대신하여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뽑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긴 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자살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불의한 삯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꾸러져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졌습니다.”(행 1:18) 마태복음에는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넘겨준 유다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그 은돈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고, 말하였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하였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은돈을 거두고 말하였다. "이것은 피 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으면 안 되오." 그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한다.”(마태 27:3-8)

전승에 의하면 유다가 목을 맨 나무가 박태기나무라고 합니다. 봄에 붉은 튀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꽃이 박태기나무 꽃입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밥티나무라고도 하고, 북한에서는 꽃봉오리가 구슬 같다 하여 구슬꽃나무라 하고, 그리스말로는 Cercis, 즉 칼처럼 생긴 꼬투리가 달린다 해서 칼집나무라고 부릅니다. 또한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이 나무에 목매어 죽은 나무라고 하여 ‘유다나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나무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전승이 생겨난 것도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그러려니 하면 됩니다. 프랑스 유다지방에 이 나무가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나무는 ‘더러운 죄인이 목 맨 나무’가 되었음을 너무 부끄러워 한 나머지 얼굴이 붉어졌고, 흰 꽃을 피우던 나무가 변하여 붉은 꽃과 붉은 가지를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튼 자연도 부끄러워한다는 생각이 이입되어 있습니다.

유다가 죽은 자리, 혹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 피 값으로 산 곳을 ‘하켈 드마(Hakel dema)-피밭’, ‘아겔다마(Akeldama)-피의 밭’, ‘하켈다마하(Haceldama)-피의 밭’이라고 합니다. 그 위치는 예루살렘 시온문 밖 힌놈의 골짜기가 끝나는 지점인 서남쪽에 있는 실로암 연못과 인접해 있습니다. 이곳을 산 돈이 예수님의 피 값이라 하여 ‘피의 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1874년 그리스 정교회 수녀원(St. Onuphrius)이 세워져 속죄와 기도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겔다마, 피의 땅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 있습니다. 불의한 돈으로 사들인 땅, 그리고 부정한 권력으로 지은 건물들, 가난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지은 도시들, 노동자들의 노동뿐만 아니라 생명을 담보로 착취하여 이룬 기업들,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으로 유지하려는 권력들. 이 모두가 아겔다마, 피의 땅입니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아겔다마, 피의 땅에서 이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일하고 평온한 듯이 걱정거리 없는 듯이 살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안일하고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복할 것을 약속합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심판은 대부분 다른 민족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32장에서처럼 땅이 황패해 지고 농사를 망치게 되는 모습입니다. 밭농사와 포도농사를 망치고, 사람들이 살던 곳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뒤덮게 됩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의 회복을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에 비추어 말하면, 문명으로 이룬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너져서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전기가 없이 며칠만 지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전세계에 있는 핵발전소와 핵무기는 지구 자체를 수십 번 폭파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전체가 아겔다마, 피의 땅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이사야 32:15-18) 황패해 져서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된 땅에서 다시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자기의 영을 보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50일 후에, 승천한 지 열흘 후에 하느님의 영이 제자들에게 내렸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일하는 사람들을 연대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여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는 바벨탑 사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성령강림은 서로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령은 서로 소통하게 하는 영, 텔레파시의 영, 하나 되게 하는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적인 언어로는 만물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기(氣)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는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하느님의 입김으로서 하느님의 생명의 기운이며, 모든 생명이 생명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니게 하는 바탕입니다.


하느님의 영, 거룩한 영을 받기 전에 제자들은 배반한 유다의 직분을 맡기기 위해서, 피의 땅에서 정의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일군을 뽑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비를 뽑아서 일할 사람을 정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조금의 오해가 있습니다. 그 오해 때문에 선거의 폐해나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곤란할 때에 쉽게 제비뽑기를 제안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제비뽑기는 이미 그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사람을 뽑은 후에 마지막 단계에서 사용한 방법입니다. 제비뽑기를 하기 전에 그 대상자를 충분히 검토하고 선정해야 합니다. 무작위로, 아무나 되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행 1:21-22)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정의와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후보를 잘 검증해서 꼭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후보들 중에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선출된 사도는 맛디아(Matthias)입니다. 마티아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한 이름인 마티티아(Mttithiah: 야훼의 선물)의 약칭입니다. 열두 사도로 선출된 사실 이외에 그에 관해 알려진 바는 없으나, 후대 전설에 의하면 마티아는 예수가 파견하였던 72명의 제자(누가 10:1~12)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마티아의 선출 이야기 외에 신약성서의 다른 어느 곳에도 마티아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그의 이름으로 된 외경 복음서(Gospel of Matthias)가 있었다고 합니다. 열둘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숫자이며, 열두 사도는 메시아적(的)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대표자들입니다. 그들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여 진정한 이스라엘의 기초가 될 사람들이기에 유다로 인해 생겨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마티아를 뽑아서 열두 사도를 채운 것은 공동체를 온전하게 회복하여 하느님의 영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무는 봉사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큰 모토는 생명과 평화가 되었습니다. 남한의 현대사에서 민주화(군부독재 청산)나 민족통일과 노동해방 등의 이슈가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했었는데, 최근에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의 세상에서 자신의 평안과 행복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존재의 그것들을 침해하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화는 가까이는 자기 내적인 문제에서부터 멀리는 국가와 민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까지 다양하고 방대하고 복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에 대한 해결 혹은 대안을 모색함에 있어서 그 대상이 작은 것이든지 큰 일이든지 복잡하고 다차원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자칫 갈망의 힘에 의해 허상을 좇아서 달음질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전능한 신의 능력이 개입하지 않는 한 평화를 이루는 일은 우리 인간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남한)이라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전세계 혹은 주변 강대국들에게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경우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평화를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의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좁은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해를 받지 않는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 완전함, 완성, 질서, 복지, 안전, 축복, 정의, 사랑, 해방, 구원 등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샬롬은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의 궁극적 목표”이며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해 주는 “구원의 상태”와 상응하는 말로써 이해될 수 있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그리스어의 ‘에이레네’(εἰρενή)는 “연합”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는데, “질서와 통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라틴어의 ‘팍스’(pax)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동의”와 같은 어근에서 나왔는데, “평안과 안식”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평화는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인간의 역사적 상황에서 언제나 위협받고 침략 당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 민족 분단, 국제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평화에 대하여 은연중에 우리에게 들어와 있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평화가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실현되는 하나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상태로 인정하게 되면 그 과정의 서술은 항상 맥 빠지고 과정의 생동성이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평화는 우리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며, 노력으로 이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오류는 평화를 단순한 전쟁의 부재, 즉 공공연하고 집약적인 폭력사용의 부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과정, 기독교적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여기에서 과정이란 목표를 향한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과정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차원과 영역에서 하느님 통치와 그의 평화라는 목표를 지향하려는 항상 새로운 시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한 평화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요한복음 13:31-16:33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행한 고별연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기가 떠나간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 연설은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데, 예수님은 기쁨과 평화를 약속하면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세상 속에서 너희는 근심에 잠겨 있지만,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20절). 또한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지만 용기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33절). 이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에서 세상은 예수님과 그들 따르는 공동체에 적대적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야 좋은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별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과 그 주변에서 이 둘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서만 그러한 구별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나 세상은 오히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교회에서만 인위적으로 억지로 구분하고 차별화하려고 합니다. 게다가 세상을 이긴다고 하면서 자기의 교리나 논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세상으로 몰아붙이면서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적대시했던 그 세상 속에는 공산주의(빨갱이), 이단, 뉴에이지, 정치적 경쟁자, 심지어 우리의 전통문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으로 온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따르며, 사랑의 행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참 평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3:16; 20:31).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뿐 아니라 당시 유대 지역과 실질적으로 분단되었던 갈릴리 사마리아에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뿐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세례요한 종파에 속한 사람 중에서도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요 2:22; 4:39-42,53; 9:35-39; 12:11,19,20-23). 이 점에서 유대주의자들이 편협한 교리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출교시킨 것과 달리, 예수님의 승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 되는 길을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러한 하나됨의 시작이고 근거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예수님은 해산의 진통을 참고 견디는 여인으로 비유합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해산의 진통을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21절). 해산의 고통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인이 해산을 하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았을 때에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나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은 것은 단순한 열매를 거둔 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아이는 결과물로써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오히려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해야지만 그 아이를 비로소 사람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희망을 말합니다. 어떻게 양육하고 자라게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해산한 여인의 기쁨이며 평화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해산의 진통을 참고 견디면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수많은 요인들을 이기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산의 진통을 참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덜 쓰고 덜 입어야 합니다. 더 크고 넓게는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시간을 아껴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위한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이사야 32:17) 이 말씀이 더욱 간절하게 들리는 요즘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내려오면 공평과 정의가 이뤄질 것입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와 편안과 안전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먼저 받는 우리가 피의 땅에서 정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피의 땅에서 정의의 열매인 평화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이러한 활동의 대상이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평화와 기쁨을 위해서 극복하고 이겨야 할 대상 중에서 가장 큰 대상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편견을 넘어서지 못하면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예수 안에서의 평화”입니다(33절). 그런데 우리는 내 안에서의 평화, 나만의 평화를 더 추구합니다. 예수 안에서의 평화와 나만의 평화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평화는 나뿐만 아니라 남의 평화도 함께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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