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상 3:5-14; 골 3:1-11; 요 4:31-38
+ 교우 여러분,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부활절 셋째주일인 오늘, “새 사람을 키우는 교육”, 이런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의 부활
오늘 사도서간문인 골로새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행 28:16-31에 나오는 바와 같이, 로마에 구금되어 있을 때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골 1:1에 보면, 바울과 디모데는 지금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 소아시아의 브리기아에 있던 작은 도시 골로새의 교우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골 2장에 보면 요즘처럼 당시 교회에도 교묘한 말로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 서신에서 우리는 부활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말씀입니다.(골 2:12)
지난 부활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또 기념했습니다. 그 부활은 2천여년 전의 오늘 우리들에게 아무 관계 없는 사건입니까? 아닙니다. 골 2:13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고 단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고”(골 2:20),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부활로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골 3:1)는 요구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활을 마음 속에 새기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3:3)
이어 부활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새 생활의 지침이 제시됩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중략)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골 3:5-9a, 발췌)
이것이 부활한 우리에게 요구되는 새 생활의 모습입니다.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골 3:9b-10a)라는 말씀입니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골 3:10b)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지식’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스어로는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인데, 그 뜻은 사리를 온전하게 분별하고 인식, 수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정보의 수용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를 ‘참 지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부활한 우리는 사리를 온전하게 분별하는 참 지식에 이르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교육의 과제
오늘은 교회교육주일, 어린이·청소년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활, 우리들만의 참 지식을 넘어서, 교육의 과제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첫째로, 지난 4월 28일, 영화 <본회퍼>를 감상했습니다. 마치고 김응교 교수의 초청으로 마이크를 받아 이런 취지로 감상평을 했습니다.
지난 4월 9일 연세대 송도캠퍼스에서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그날이 본회퍼 목사의 80주기임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수업에서는 한 독일 학생이 본회퍼에 대해 소개하는 발표를 했습니다. “악 앞에서 침묵하는 것도 악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는 것이며, 행동하지 않는 것도 행동하는 것이다.” 그 학생이 발표 때 소개한 대목이 이 영화에 나와서 반가웠습니다.
영화에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번역하면 ‘수정의 밤’이 언급됩니다. 1938년 11월 9일 밤, 나치의 지령 하에 독일 등지에서 유대인 소유의 상점, 시나고그(회당), 학교와 집들을 파괴합니다. 본격적인 유대인 탄압의 서막이었습니다. 수천 개의 유리창이 깨져 거리 곳곳이 유리 조각으로 뒤덮혀서 깨진 유리가 마치 수정처럼 반짝거렸다는 뜻입니다. 그때 백 명 가까운 유대인들이 살해되었고, 수만 명이 체포당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이 이야기에 소개한 크리스탈나흐트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kristallnacht.
에 행동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나치 게쉬타포나 경찰, 정규군인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SA(Sturmabteilung)라고 돌격대원이나 히틀러 유겐트 단원 등 그냥 주변에서 만나는 평범한 일반 국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서서 유대인들을 응징하겠다는 각오로 뛰쳐나와, 돌을 던지고, 린치를 가하고, 불을 질렀던 것입니다.
둘째로, 지난 4/29 오후 광주 전일빌딩에서 개최된 “사회대개혁, 어떻게 이룰 것인가” 주제의 토론회에서의 제 발언 요지(재정리)입니다:
지난 12.3 내란 패악질에 대해서 국회에서 탄핵 가결한 이후에 공감연대와 6월민주포럼 등이 함께 12월 25일 오후 노무현 시민센터에서 시민사회단체 원로들, 시민사회 원로들 또 시민사회단체의 핵심적인 활동가들 50여 명이 5시간 반 정도 토론회를 했습니다. 아주 긴 토론회를 했고 당시에 그런 형국에서 정말 사회가 다 바뀌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에서 저한테 이제 마이크가 돌아왔을 때 제가 말씀드렸던 내용이 지금 대표님께서 주문하셨던 내용에 대한 답변입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것 그것이 사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 제게 그거 말고 다른 게 뭐가 문제냐?”라고 한다면, “저는 촛불혁명의 뜻을 이어서 시민성을 고취하는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그 ‘내란극복’이라는 것은 윤석열과 그 주변에 있었던 일당의 그 처벌, 감옥을 보내고 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그 내란을 옹호하고 찬양하고 하는 세력이 정치권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 또 현실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 사람들을 어떻게 저기까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여러 가지 정책적인 것들 이전에, 우리가 기억해 보면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폭식투쟁을 합니다. 이태원 참사,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들에게 ‘시체팔이’니 (5.18도 거기에 끼어 있습니다만) 하는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반호남, 반성소수자, 반중국, 반페미니즘, 반장애인, 반이주민, 반이슬람... 이런 것들로 그들에 대해서 차별하고 혐오하고 악마화하고 함으로써의 어떤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노력들을 계속해 왔습니다.
옛날에는 국정원을 통해서 댓글 조작을 했습니다. 그것이 제도적으로 어렵게 되니까, 일부 교회를 빙자한 세력들이 “선교사 229명이 내일 오후에 처형된다. 중보 기도해 달라” 이따위 가짜 뉴스를 통해서 반이슬람 혐오를 조장했던 것입니다. 또 아침에 일어나면 들어오는 첫 번째 뉴스, 가짜 뉴스를 포함해서, 이런 것들로 그동안 그 사람들도 나름대로 ‘눈물로 씨앗을 뿌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노력을 과연 했는가? 얼마나 했는가? 저는 사실 시민사회수석으로 활동할 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국민의힘 당권주자였던 한 국회의원으로부터 ‘여성들도 민방위 교육을 받도록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아, 내가 정말 상상력이 부족했구나’ 이 생각을 했습니다. 왜 저 사람들이 여성들에게 민방위 교육을 하겠다는 것일까? 그거는 뭐 분명하죠. 이른바 ‘눈 먼 자들의 나라’를 만들겠다, 이러한 어떤 차별과 혐오, 그리고 공정을 빙자한 공감 없는 나라를 만들려는 그러한 노력을 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저는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사실 사회대개혁이라는 것은 기구와 제도 개헌을 포함해서, 그런 것들은 필요하지만 이런 것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제도와 아울러 의식의 변화, 즉 시민성의 고취로 이어져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민성이란 결국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감에 바탕한 내가 내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공간적으로는 지금 이 시대의 이웃들 또 시간적으로 보면 미래 세대의 이웃들에 대해서 공감하고 함께 살려고 하는 연대, 이것이 바탕이 되는 그러한 어떤 큰 어떤 의식의 대전환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없이 어떤 제도만으로 어떤 금방의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도와 함께 이런 어떤 큰 의식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이제 과제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차원에서 사회대개혁이 그 의식의 대전환, 공감에 바탕을 두는 그런 시민성의 큰 발전의 계기가 돼서 정말 이 땅에 더불어 사는 공화와 민주, 대동정신과 민주정신이 바탕을 제대로 튼튼히 뿌리를 내리는 그러한 사회대개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서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참 지식’, 사리를 온전하게 분별하는 참 지식에 이끄는 것을 교회교육, 제도교육, 나아가 모든 교육의 진정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차별과 혐오, 악마화를 제압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실천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3. 거두어야 할 때
오늘 구약성서 왕상 3장에는 유명한 솔로몬의 간구가 나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는 야훼의 물음에 솔로몬은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하지 않았습니까?
요 4장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심으신 것을 우리들이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씀을 언급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 청소년들이 인터넷, 유튜브, 게임 등에 빠져 삽니다. 참 지식이 아니라 말초적인 자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10년 전 페미니즘에 혐오를 느꼈던 17세 김군은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하는 시대다, 페미니스트가 나는 싫다, IS가 좋다”는 말을 트위터에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튀르키예를 거쳐 IS에 가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후 행적,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등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나 학교, 가정, 나아가 이 사회가 다시 교육의 기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보시대가 되었는데, 이에 발맞추어 정보는 물론, 그 매체의 악마성을 극복하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나아가 자존감을 바탕으로 이웃에 대해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지 함께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바탕하여 사리를 온전하게 분별하는 참 지식을 갖춘 세대를 양성하지 못한다면 이 세계의 미래는 참담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새 사람을 키우는 교육, 학교 현장은 물론 사회 전 분야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앞장서야 할 일입니다.